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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읽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연약하여 때로는 사탄의 영향력에 휩쓸릴 때도 있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제자들처럼 감정적인 신앙생활에 치우칠 때도 있고, 세상 염려와 물질의 탐욕에 이끌릴 때도 많다는 점 말입니다. 그렇게 세상의 환경과 상황에 지배받고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은혜로 품어주셔서 일하는 제자들로 살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곧 길가, 돌밭, 가시밭과 같은 우리들의 심령이지만, 주님은 그런 심령들을 부드러운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곧 옥토와 같은 심령으로 변화시켜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그 크신 긍휼과 사랑의 말씀으로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등불의 비유, 자라는 씨의 비유, 또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고, 이어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21-25까지는 등불에 대한 비유입니다. 본문 21-22절을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옮겨 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기에 등경대 위에 두는 것으로, 숨기거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등불은 그래서 빛으로 여길 수 있고, 그 빛은 곧 주님의 복음으로, 또 성령의 조명으로 생각할 수 있겠죠. 더욱이 마태복음 25장에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가 준비한 등불을 생각해 봤듯이, 그 등불이 깨어 있는 신앙생활, 성령의 조명, 그리고 기도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마가복음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한다면, 이 등불은 주님의 생명과 복음의 빛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쫓아내셨을 때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드러내지 말고 잠잠하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소문은 온 갈릴리 사방에 퍼져 나갔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병환자 곧 문둥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마찬가지였죠. 주님께서 그 손을 내밀면서 그를 치료해 주셨는데,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다시 말해 그 사실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만 모세의 명한 예물을 주님께 드려 제사장에 확인을 받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도록 했죠. 그러나 그 역시 그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죠.
그렇듯 하나님 나라를 위한 주님의 진리와 생명은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드러내지 말라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잠잠하면 잠잠할수록 더욱더 밝히 드러나고 소문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사역, 그 분의 삶, 그 분의 행동이 진리와 생명의 말씀 그 자체이셨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본문의 ‘등불’을 주님의 생명과 진리의 빛이요 복음의 빛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점이 아무리 외딴 곳에 있을지라도 그 맛의 참 맛을 아는 사람은 다시금 찾게 돼 있고, 소문을 낼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사람도 성실하고 참된 인격을 갖춘 사람은 그 사람 앞에서 거짓을 꾸며낼 수도 없고, 점차 그 사람으로 인해 진실된 삶을 살게 되고, 소문은 급속도록 퍼지게 돼 있습니다. 농산품이든 공산품이든 그 어떤 제품이든 한 번 그 맛을 알고, 그 제품의 질을 알게 되면, 그 사람과 그 회사가 만들어내는 그 상품은 천리까지 소문이 퍼져나가게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생명과 진리의 등불로부터 우리가 깨닫게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 속에 주님의 등불, 생명과 진리의 등불, 신실함과 성실함의 등불, 참된 인격의 열매를 맺는 등불의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오늘도 그 은혜를 간구하도록 하십시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의 조명 속에 있을 때, 우리가 그 분의 등불을 깨닫고, 주님을 위한 등불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밤이 맞도록 그물질을 하면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잡아 올렸죠. 그때 그 음성을 듣고 ‘주님이시다’하고 기억해냈던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성령님의 조명 속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을 성령강림절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부활승천하신 뒤 10일 뒤에 마가의 다락방에 그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강림하셨기 때문에 칭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전에는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역사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펼치실 때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구약성경에는 성령님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구약시대에도 여전히 성령께서 운행하셨고, 삼손에게, 심지어 사울 왕에게도,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과, 수많은 선지자들에게도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셨고, 능력을 부어주셨죠. 심지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셨죠.
그런데 왜 성령강림절이 중요합니까?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로이드 존스 교리 강좌 시리즈2 - 성령론, 구원론>(부흥과개혁사200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에서 성령은 사람들에게 임하셨다 다시 떠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성령이 오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그의 충만함 가운데 계시다가 전체 몸을 통해 그리스도로부터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의 지체이기에 성령은 완벽하게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오순절의 의의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입니다.(74쪽)
이른바 구약시대에서부터 예수님의 시대까지 성령님은 ‘함께(with)하시는 성령’이셨고, 오순절 성령강림의 분기점은 ‘내주(within)하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 그렇게 내주하셔서 제자들의 의지에 작용(빌 2:13)하고, 그들을 설득하시 인도하시고, 구원의 효력을 발휘하고 지속케 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오늘도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 심령의 진리와 생명의 등불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설득하시고 인도하시고 구원의 효력을 발휘하시는 분입니다.
본문 26-29절은 “자라는 씨의 비유”를 말씀해 주고 있는데, 다음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와 일맥상통하는 비유입니다. 이른바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는 점차 커지고 왕성해지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뿐만 아니라,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많아질수록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그리고 우리가 일하는 제자들로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내 주변에서부터 확장돼야 함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35-41절까지는 바닷가에서 그런 비유를 마친 주님께서 날이 저물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있는데, 광풍이 일어났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37절의 “큰 광풍”은 ‘거대한 폭풍우를 동반한 격렬한 바람’으로, 사도행전 27장 14절에 나오는 ‘유라굴로 광풍’과 비슷한 광풍입니다. 다만 본문 속의 배는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이 탄 작은 배라면 사도행전의 배는 276명이 탄 큰 배였죠. 각각의 배에 맞는 거대한 광풍으로, 그 배를 집어삼킬만한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던 것이죠. 그때 문에 제자들이 죽게 생겼다면서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황급히 깨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은 그 바람을 꾸짖었고, 곧바로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맺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아직도 제자들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자시오, 창조주로서 그 땅의 주관자요 바다의 주관자이심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해 이 세상의 광풍과 같은 위기가 내 인생의 배에 몰아닥칠지라도, 내 심령 안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도 그분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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