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선택하신 것은 그들이 능력이 있고, 세례 모든 민족 가운데 월등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수효가 다른 민족보다 훨씬 적고, 더 연약했을 뿐이죠. 그런데도 그들이 선택받은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이 능력있고, 지혜가 뛰어나고,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작고 초라할지라도 주님의 선택과 긍휼하심 때문에 제자가 된 것이었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주님의 일꾼, 주님의 둘로스요 휘페레테스로 삼으신 것도 똑같다고 했습니다. 전적인 주님의 선택과 긍휼하신 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데 대해 그 집안 식구들 곧 친족들과 예루살렘의 서기관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의 반응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 20-2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이 본문만 대한다면 예수님의 친족들이 너무 이상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 친족들이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할 정도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을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너무 아끼는 마음에서 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것으로 말이죠.
사실 마가복음 1장에서부터 지금 3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보여준 행적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때 모든 군중들은 열렬히 원하고, 더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머무신 가버나움의 집에까지 찾아 올 정도였죠. 그런 그들을 예수님은 저버리지 않고 사랑과 긍휼함으로 품고 치유해주셨습니다. 심지어 안식일조차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더 많이 몰려들었고, 예수님은 눈코 틀 새 없이 바쁘셨죠.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제 몸을 가눌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하는 첫 번째 관점입니다. 자기 몸도 가눌 수 없이, 본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식사할 겨를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피고 보살피고 치료해 주시는데, 그것은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미쳤다고 하는 그 친족들의 반응이 정말로 예수님을 걱정해서 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는데, 그 일대에 소문이 퍼졌고, 더 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죠. 그리고 사회적으로 격리의 대상이었던 문둥병 환자에게까지 당신의 손을 내밀어 고쳐주셨고, 중풍병자의 죄와 몸도 사해주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주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좋은 은총이지만, 그 사회의 기득권층들, 이른바 예루살렘 산헤드린 의원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대제사장들과 그 제사장들을 지지하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는 예수님의 그런 행적들이 달가울 리가 없다는 점입니다. 여태껏 백성들로부터 받아 온 존경과 지지를 빼앗길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안식일에 중풍병자를 고칠 때 서기관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향해 정죄하고 비판한 것도 그런 이유요,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못마땅해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눈초리를 예수님께서도 아셨지만 그 친족들도 어찌 모르겠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친족들도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심지어 식사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그들을 돌보고 치료해 주시는 게 좋을 수 있겠지만, 예수님의 영향력이 유대 사회의 기득권층에 버금갈 정도로 탄탄해진다면, 그 친족들 역시 사정 당국의 눈치와 감시와 견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주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산헤드린 의원들과 종교 권력층으로부터 더 많은 견제와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 21절에서 그 친족들이 예수님을 향해 미쳤다고 하는 두 번째 이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4:24)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 하신 말씀에서 어느 정도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몰랐으니, 그 친족들 역시 예수님께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치료하고 죄인들의 죄를 사해주는 그런 일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곧 구세주로서 하시는 일이 아니라 그저 선지자 중의 하나로서 하는 일로 여겼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선지자 중의 하나로 예수님을 바라봤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정치적인 영향력을 생각해서, 그만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강해서,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족들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 본문 22절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 곧 당대의 기득권층이 나와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하고 있으니, 그 친족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다른 귀신들을 제압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사탄끼리 분쟁할 수 있겠느냐, 하시면서, 결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요, 결코 그 죄를 사함 받지 못할 것임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여동생들이 그 집에 와서 예수님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쭉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오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의 친족들조차 예수님을 미쳤다고,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상황이고, 또 예루살렘의 사두개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여기는 상황이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가족들조차 그런 관점으로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 친족들이 안 되니까, 그 가족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쉬도록, 예수님의 활동에 제동을 걸어달라는 뜻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족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3절에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하시면서 35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와 자매요 어머니이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두고 예수님은 인격도 없으신 분인가? 무뢰한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은 그런 게 아니죠. 예수님을 구원자의 관점,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관점, 구세주의 관점이 아닌 단순한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는 자라면, 결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가 아닌,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라면 그 누가 됐든지 그가 바로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땅의 구원자요 메시야요 구세주 곧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초점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에 동참할 수 있기 바랍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돈을 벌든지, 그 모든 초점을 구원의 관점으로, 영혼을 돌보고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관점으로, 이를 위해 더욱더 중보기도하는 그 관점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때 ‘너는 내 사랑하는 가족이요 내 기뻐하는 형제자매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친히 듣게 하실 줄 믿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새벽묵상DewSermon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막4:21-41) (1) | 2024.01.08 |
---|---|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막4:1-20) (1) | 2024.01.05 |
열 둘을 세우셨으니(막3:1-19) (1) | 2024.01.03 |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2:18-28) (1) | 2024.01.01 |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2:1-17) (1) | 2024.0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