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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중풍병자의 사건과, 세리 레위를 주님의 제자 마태로 부르신 장면을 통해 그와 같은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을 지라도 그 난관을 극복하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우리도 그 사람처럼, 그 친구들처럼 주님께 간절히 의탁하고 나아가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도 죄인들을 부르시며 소외된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고 영혼의 치료자가 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도 세상의 죄악 속에 빠져 있는 그 누구라도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을 품고 사는 자들이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크게 두 가지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금식에 대한 논쟁이 그 첫 번째 사건이요, 또 다른 사건은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자른 사건의 내용이죠.
본문 18절을 보면 두 무리를 놓고 저울질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찾아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요한의 제자들도 지금 금식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바리새인들도 종교적인 관습에 따라 금식을 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들을 살피고 있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 질문하는 형국이죠.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 것이냐?’하고 말입니다. 이른바 금식을 통해 참된 종교적인 경건성을 보여줘야 되지 않느냐는, 그런 질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본문 19-2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금식에 대한 그릇된 관념에 집착하고 있는 무리들을 향해 ‘혼인집 광경’을 비유로 답변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혼인은 특히 경사스러운 행사였습니다. 초대된 손님들은 때로는 한 주간이나 지속되는 축하연에 참석했죠. 즐거움과 행복함과 경사스러움이 어우러진 그 혼인 잔치에서 금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죠. 혼인집 경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최고조로 즐길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의 율법에는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신20:7), 혼인식 전후에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조항까지 두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혼인에 대해 즐거워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스스로를 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으로 자처하셨기 때문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기쁨에 참여하면 될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잔치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빼앗길 때에는 금식이 어울릴 것이라고 덧붙여 말씀하시죠. 실제로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난 이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금식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종교적인 관습에 치우쳐 금식하는 그들에게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생베 조각’은 ‘표백 처리하지 않고 재단하지 않은 천’을 가리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새로 짠 천을 의미하죠. ‘낡은 옷’은 ‘거의 헤어져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찢어져 버리는 생명력이 없는 천’을 말합니다. 새 천을 낡은 천을 위해 사용하면 둘 다 사용할 수 없게 되죠. 또한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신축성을 잃고 늘어난 낡은 가죽 부대는 견디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생긴 가스로 인해 낡은 가죽 부대가 터벼 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버린다는 지적이죠.
혼인집에서는 즐길 줄 알고, 새 천을 낡은 천에 사용하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위해 새 가죽 부대를 사용할 줄 알기는 했지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율법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바꿔 말해 새 시대에는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 땅에 메시아요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를 깊이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두 번째 사건은 ‘안식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조항을 39가지로 규정해놓고 지켰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은 목숨처럼 지키고 있는 규정 중에서 밀 이삭을 자르는 행동을 보인 제자들의 행동을 책잡고 있습니다. 23-24절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밀 이삭을 자른 행위를 바리새인들은 추수로 본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증거하는 누가복음 6장에는 제자들이 자른 밀 이삭을 손으로 비벼먹었다면서, 그런 제자들의 행위 곧 손으로 비빈 행위를 ‘타작을 한 행위’로 바리새인들은 바라본 것으로, 도무지 제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죠.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면서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한 행동을 상기시켜 주죠. 사무엘상 21장 1-6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율법에는 매 안식일에 12덩이의 떡을 새롭게 만들어 성소에 들이게 돼 있는데, 그것이 진설병을 갖추는 것이죠. 그래서 이전 것과 새 것으로 교체하는데, 교체된 떡은 제사장들이 먹도록 돼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 장수들이 사울의 칼날 앞에 쫓기며 배고팠던 터에 성소에 진설된 그 떡을 먹게 된 사건이 있었죠. 하나님께 바치는 거룩한 떡을 먹어서라도 생명은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 당시 다윗과 그 무리들의 상황이었고, 하나님은 기꺼이 그것을 용인해 주셨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과 직결된 직접적인 필요가 단순한 의식 규범과 형식적인 종교 행위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인용하면서 너희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은 구약의 그 내용의 의미와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어린 마음을 품고 있느냐, 하시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중요성보다 종교적인 틀에 매어 있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가두어 두는 게 아님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안식일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실은 모든 날들이 다 주님의 날이요, 주님의 생명의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날들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죠.
그래서 율법의 멍에는 인간을 법조문으로 찌들게 하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가벼우며, 생명과 환희를 맛보게 하는 참된 기쁨을 주시는 것이죠. 주님께서는 인자가 안식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들의 주인임을 선언하심으로, 안식일에 대한 온전한 설명을 하실 수 있는 자격과 신분을 지니고 계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식의 안식일, 곧 주일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날이 주일이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주일의 주인으로서 그 생명과 은혜를 무한대로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말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주일뿐만 아니라 모든 날의 주인으로서, 우리의 모든 날을 나를 위한 날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모든 날, 모든 시간, 모든 재물, 모든 생명의 주님을 위한 청지기들의 모습이죠. 주님의 뜻과 그분의 목적에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모든 날에 하나님의 은총의 복이 가득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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