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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은 상전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자 주인의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죠. 주인이 하라는 대로,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종의 모습이죠. 헬라어에는 ‘종’ 혹은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둘로스’ 다른 하나는 ‘휘페레테스’입니다. ‘둘로스’는 주인의 통제와 지시에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예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하는 말씀이 바로 그 종입니다. 바울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여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휘페레테스’라는 단어는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 쓰여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거기에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단어가 바로 ‘휘페레테스’죠. 휘페레테스는 ‘벤허’ 같은 영화에 나오는 로마 시대의 거대한 배 밑창에서 ‘노 젓는 노예’(underrower)를 칭하는 단어죠. 손목과 발목은 쇠사슬 차꼬를 찬 채 갑판 위에서 두드리는 지휘관의 북소리에 맞춰 매 밑창에서 열심히 노를 젓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목표는 오직 상관의 명령에 충성하는 것뿐이죠.
마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종’의 관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노예’의 관점으로 기록했다는 것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관점을 역력히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의 첫 무대를 갈릴리에서 펼치셨는데, 주된 선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시몬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세배대의 아들 요한과 큰 야고보를 부르셨고, 그 밖의 다른 제자들도 부르셨죠. 중요한 것은 주님의 부르심 앞에 그들이 “곧” ‘즉시로’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특징 중 하나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주님께서 뭔가 행하실 때 ‘곧바로’ ‘그 즉시로’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주님을 쫓았다는 것 말입니다. 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주님의 모습이요,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특징임을 마가복음서에서 증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곧바로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이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시는데, 그 회당에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찾아오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24절에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고 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드러내는 모습이죠. 그때 우리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나의 정체성을 귀신이 이야기해 주고 있으니, 더 크게 소리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5절에서 주님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하고 명령하십니다. 이른바 그 귀신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게,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잠잠하게 시키고, 그에게서 나오도록 명려하신 것이죠. 물론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 귀신을 제지해도, 귀신이 제압당하는 그 소식이 온 갈릴리에 퍼질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본문 29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는 열병을 고쳐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의 의술로는 그 열병을 고칠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그 열병이 떠나가고 그녀가 예수님을 향해 수종들었다고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32절에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이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고침받았다는 소식이 순식간에 퍼졌고, 그로 인해 동네 사람들 중에 병들고 귀신 들린 자들이 주님 앞에 더욱더 많이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죠.
그런데 중요한 부분이 본문 34절의 끝 부분입니다. “많은 귀신을 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귀신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봤다는 것입니다.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심을 말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잠잠하라고, 말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상황이죠.
이와 같은 모습이 두 번째 일어나고 있는데, 그 모습은 본문 35-39절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새벽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따로 놔두고서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를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제 있던 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 나왔고,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제자들에게 묻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그들을 데리고 주님께 나아가면서 그렇게 말하죠. “주님, 지금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그들을 맞아주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본문 38절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시면서 자신을 찾아 나온 사람들을 놔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물론 다른 지역을 다니면서,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아주시긴 하시죠. 그런데 기껏 자신을 찾아 나온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고, 다른 곳으로 가시는 주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죠.
그런데 이런 흐름, 곧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거룩한 분이심을 만방에 알리지 말도록 하는 이 분위기는 본문 40-45절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병 환자 곧 문둥병 환자가 주님께 나아와 꿇어 엎드려 간구합니다. 구약의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사회적인 격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동네에서 함께 어울려 살지 못하고 동구 밖 외딴 곳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을 각오를 하고 나온 것이죠.
그때 주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 손을 내밀면서 말씀을 하셨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고 말입니다. 그러자 42절의 말씀처럼 이번에도 “곧” ‘즉시로’ 그 나병이 떠나가고 깨끗해 졌다고 말씀해 주고 있고, 또 43절에 “곧” ‘그 즉시’ 그에게 경고하시면서 한 말씀 하시죠.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이번에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초점은 그것이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 여러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능력을 펼쳐보여줬는지, 떠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구약의 율법대로 너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주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판결 받고, 모세의 명한 감사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하라고 당부하죠.
도대체 주님께서 귀신들에게 침묵하라고 하시는 이유, 헐레벌떡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지나치시는 이유, 나병환자에게도 자기 정체를 노출시키지 말고 침묵하라고 하신 이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정확한 답을 명시하지 않지만,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기 사명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종은 결코 자기 자랑이나 자기 영광의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상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이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종된 자세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마가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죠.
그렇기에 우리들도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하고서도 ‘나는 다만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을 위한 휘페레테스’입니다, 하는 자세를 지닌다면 그 삶이야말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남은 인생 속에서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를 공급받는 하나님의 종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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