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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이제 마가복음을 살펴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한 책이고,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마태는 본래 갈릴리 바다 위쪽의 가버나움 근처에서 세관원으로 일한 사람이었죠. 그런 마태를 주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셨죠.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자신을 ‘세리 마태’라고 밝히는데, 마가복음(막2:14)과 누가복음(눅5:27)에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로 혹은 ‘레위’로만 소개하죠. 본래 세관원으로 일하는 사람에 대해 유대 백성들은 불의한 자로 죄인으로 취급하죠. 유대 백성들, 심지어 어부들로부터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일부를 납부하고 나머지는 자기 주머니에 착복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자신은 본명인 레위보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마태’라는 이름을 선호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 안에서 그가 죄인의 삶을 청산하고 다시 태어난 삶을 살고자, 주님의 제자로 살고자 다짐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세관원으로 몸담고 있던 그 일들을 토대로 마태복음을 기록했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에 관한 메시아의 정체성과 다윗의 왕권을 상속받은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모두 유대인들을 겨냥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가복음과의 차이점이자 또 유사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요한 마가’로서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마가’는 헬라식 이름이죠.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종종 제자들과 모임을 가진 곳, 성만찬을 제정하신 곳, 오순절에 120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던 그 곳, 곧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그 마가죠. 그는 부유한 집안의 출신이었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나바의 조카였죠. 훗날 바나바와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 청년 마가를 수행원으로 대동하죠. 그런데 구브로 섬의 바보 항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 반도 현재의 터키에 위치한 밤빌리아의 버가 항에 당도할 때,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리죠.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마가)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행13:13). 마가가 왜 돌아갔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하지만 몇 가기 추측을 하죠. 삼촌 바나바가 팀장 서열에서 바울에게 밀렸다는 설, 그는 할례파요 바울은 무할례파라 둘 사이의 다툼이 있었다는 설, 그리고 그가 부잣집 출신이라 고생길에서 낙오했다는 설이죠. 그런데 그곳 버가 항에서 다음 목적지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려면 해발 2-3천미터에 달하는 험산준령의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도적떼가 들끓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평생 고생해 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 산을 넘는 게 쉽지 않아, 중도에 낙오해버리고 말았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죠.
그런데 그 낙오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2차 선교여행 때 다시금 바울이 팀을 꾸려 나가려고 하는데, 바나바는 다시금 마가에게 기회를 주자고 하는 상황이고, 바울은 안된다고 책임감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죠. 결국 바울은 실라를 수행원(행 15:37-41).으로 데리고 가고, 바나바는 그 마가와 함께 가는데, 둘의 선교지 노선이 갈리게 되죠. 바나바는 이전의 1차 선교여행지로 나가게 되고, 바울은 유럽대륙으로 나가게 되는 길목이었죠.
그런데 3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데, 그때의 주된 목적지는 유럽 대륙의 그리스 반도였죠. 2차 선교여행 중에 세운 교회들을 되돌아보고자 하는 길이었죠. 바울은 그 3차 선교여행 도중에 귀중한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자신의 마지막 생을 던질 곳이 바로 로마제국의 심장인 로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로마 교회의 교우들을 위해 로마서를 집필했고, 그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이제 말년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게 되는데 가택연금 상태로 2년의 세월을 보내고, 잠시 풀려났지만 다시금 붙잡혀 로마의 네로 황제 치세 때 그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메마틴 지하 감옥에서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하 감옥에서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볼 때 자신이 2차 전도여행지로 유럽을 순례할 수 있었던 것도, 또 3차 전도여행때 로마에까지 마음을 품게 된 것도, 실은 그 요한 마가와 결별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걸 깨닫고, 주님의 크신 은혜를 받게 되죠. 그런 일이 없었던들 여전히 로마는 엄두도 못내고 그저 소아시아 반도에 국한된 전도여행으로 끝마쳤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마가의 덕분이요, 마가의 그 일도 주님의 은혜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깨닫게 된 것이죠. 그래서 로마의 감옥 속에 있을 때 붙잡혀 온 빌레몬과의 만남을 통해 편지를 써 보내면서 그 마가에 대해 “나의 동역자 마가”(몬1:24)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메마틴 감옥에서 순교 직전에 쓴 편지 곧 최후의 서신서로 알려진 디모데후서를 통해 바울은 마가를 자기에게 데리고 오도록 편지한 사실이 있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이런 바울의 깨달음과 그 포용력으로 품고자 했던 그 신앙에 반한 요한 마가는 그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도 바울이 품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내려놓고, 그 이후에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턴하게 되죠. 그래서 그 마가는 그 이후부터 베드로의 수행원으로 자기 삶을 내던졌던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때까지 그 무식한 베드로 곁에서 통역자로 또 짊을 챙기는 이로, 또 숙소를 예비하는 자로, 베드로 곁에서 음으로 양으로 온전한 동역자의 삶을 살았던 마가였습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5:13) 베드로가 마가를 ‘내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죠. 일각에서는 갈릴리의 무식한 베드로가 로마에서 베드로전후서를 남겼는데, 그것도 마가가 대필한 것으로 생각을 하죠.
바꿔 말하면 오늘 본문을 비롯한 마가복음도 그 요한 마가가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마가복음 역시 로마에서 자기 생을 다할 때까지, 베드로 사도로부터 전해들은 예수님의 일대기 중에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치심 집중하여 기록했다는 점이죠. 더 놀라운 점은 요한 마가가 기록한 이 마가복음이 다른 사복음서가운데 제일 먼저 곧 주후 50년대 중반에 기록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왜 사복음서 가운데 제일 먼저 기록한 것이 중요한가? 마태나 누가나 요한이 마가복음을 참조하였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마가복음 1장 1-11절 말씀의 초점도 마태복음의 서두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나 혈통적인 관점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렇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관점은 마가복음의 시작점뿐만 아니라 끝 지점에도 동일하게 강조한다는 것이죠. 그걸 나타내기 위해 당대의 위대한 세례 요한을 대비하여 예수님의 우월성을 돋보이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리 세례 요한이 주의 길을 예비하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해도, 그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도덕적인 삶을 살았어도, 이 땅의 진정한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걸 강조하기 위해 본문 9-11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오셨고, 하늘 아버지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하나님의 친밀한 음성을 들었노라고, 요한 마가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누군가에게 사도 바울도 될 수 있고 요한마가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이 들어 자기 견해만 강조할 수도 있고, 또 그 견해에 반대의견을 당차게 밝힐 수도 있고 말이죠. 그 일로 인해 복음을 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길에 뭔가 뒤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그리고 마가처럼 그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어떤 모양이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길에 그 뜻을 받드는 마음과 자세가 주님의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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