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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많은 사람들을 고치시는 능력의 예수님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한 종의 관점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차린 귀신들에게도 결코 드러내지 말도록,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기 사명을 다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봤었죠.
주님께서는 그렇게 갈릴리 지역의 수많은 아픈 사람들을 고쳐주셨고, 더러운 귀신들을 내쫓아 주셨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 하지 말라고 해도, 당신이 큰 능력을 가지셨다는 소문이 그 지역 전체에 널리 퍼지게 되었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늘 묵상할 본문 말씀에 두 가지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 1-12절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나와 있고, 13-17절에는 세관으로 일하고 있는 세리 마태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 모두 예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주는 사건입니다.
먼저 가버나움에서 일어난 사건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1-2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북쪽의 게네사렛 근처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곳에 쉬고 있는 상황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니신 능력에 대해 온 갈릴리 지역에 퍼졌고,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지금 쉬고 있는 가버나움까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허준을 떠올리기라도 하듯, 참 의원이요, 영생의 의원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물리치지 않고, 그들을 다 맞아 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 주님의 능력을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도” 곧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전하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본문 3-5절을 보면 네 명의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들 것에 매고 나오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던지, 그 지붕 위를 뜯고 그 지붕 아래로 그 중풍병자를 달아내리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여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를 달아내린 그 사람들, 그 친구들, 그 동료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중보기도자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당사자의 간절함은 더더욱 이루 말로 할 수 없었겠죠.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까? 어떤 난관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을지라도, 그 장애물을 넘어서 주님께 나아가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자에게 주님은 오늘도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커다란 장애물과 같은 난관이 놓여 있을 때, 그 때에도 본문의 중풍병자를 매고 나온 그 네 명의 사람들처럼 주님께 간절히 의지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심령을 겸손한 심령, 가난한 심령으로 삼고 주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는 자에게 당신의 살아계신 능력을 베푸시는 긍휼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중풍병자의 죄만 사해주신 게 아니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면서, 그의 육체까지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거기에 더 쏠려 있는 게 아니었겠습니까? 죄를 사해주시는 것은 어떤 티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전인적인 치유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의 죄도 사함받도록 해 주셨고, 그의 육체도 회복이 되게 해 주신 것 말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불쌍한 영혼이 고침받은 그 아름다운 기적에 대해 그 집을 애워싸고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감동을 했고, 그래서 본문 12절 하반절에서는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노라” 하며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던 거죠.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아쉬운 게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그 순간에도 어떤 서기관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악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죠. 이른바 예수님의 그 행동에 대해,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하는 그 말씀에 대해 그것을 신학적으로 율법적으로 따져 묻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를 이용하고 있다는 취지로, 예수님에 대해 신성모독죄를 덧씌우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그들의 논리가 잘못된 건 아닙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이 거부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이 그들의 가장 어리석은 모습이죠. 지금 내 앞에 기적을 행하시며, 육체와 영혼을 고쳐주시는 이 땅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될 텐데, 그들은 결코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 앞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본문이 알려주고 있죠. 한 부류는 친구의 고침을 위해 지붕을 뜯어서라도 주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 또 다른 부류는 서기관들처럼 주님의 행적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의 행하심 앞에, 성령님의 행하심 앞에,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되어서 그 분의 긍휼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b)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인 13-17절까지는 세리 레위, 다시 말해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 곧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 작은 야고보의 형제인 레위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 당시의 사회통념으로는 모든 세리들은 다 불의한 자요, 죄인취급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심지어 갈릴리의 어부들에게조차 세금을 받아 식민지배국인 로마에 세금을 납부했고, 일부는 자기 주머니에 착복하던 자들이었기 때문이죠. 그것은 세리장 삭개오도 예외이지 않았죠. 그래서 고대 기록에는 그들 세리에 대해 “아첨꾼, 뚜장이, 간통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세리들은 많은 돈은 벌었겠지만, 마음속에는 남다른 아픔을 지니고 살았을 게 뻔하죠. 그런 세리를 향해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이 멀리하는 그를 친구라 부르시면서 식사까지 하는 상황이니, 얼마나 감격스러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회적인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죠. 더욱이 이전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환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데 그가 개과천선(改過遷善)을 해서 새롭게 은혜의 길을 걷고 있다면, 좀체 믿어주려고 하지 않겠죠? 바로 그런 상황과 똑같은 격입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이 의로우신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예수님과 식사를 할 수 있냐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회에 나올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것과 똑같은 격이죠. 바로 그런 관점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상황이죠. 너희 스승이 율법을 범한 자들, 매국노들,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7절에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도 우리 주님은 세상의 관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당사자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병든 몸과 마음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죄악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영혼의 치유자가 되시길 원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주님의 마음, 내 주변에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긍휼이 품을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악에 빠져 있기 때문에 더욱더 주님의 긍휼이 필요하고, 몸도 마음도 힘들어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더 나타내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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