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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런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분이란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그때 일어난 ‘큰 광풍’으로 제자들이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 배 고물에서 자고 계신 예수님을 깨우자, 예수님께서는 그 광풍을 꾸짖어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자연 만물의 주관자시고, 그래서 바다의 주관자이심을 당대의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알려주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내 인생의 배에 파도와 풍랑이 일어날 때 배 안에 계신 주님을 흔들어 깨우는 믿음, 오직 주님만을 붙잡고 살아갈 때, 그 파도와 풍랑과 같은 근심과 걱정도 사라지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읽은 1절 말씀은 그 파도와 풍랑을 잠잠케 하신 뒤에 건너온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도착한 곳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거라사인은 갈릴리 호수의 남동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본문 20절의 말씀처럼 ‘데가볼리’ 곧 ‘데카메론’처럼 ‘데카’라는 말이 10개를 말하는 것이고 ‘볼리’는 ‘폴리스’를 뜻하는 말로 ‘데가볼리’란 ‘10개 지역의 마을이 뭉쳐 있는 도시’를 뜻합니다. 그래서 거라사인 지방이란 그 데가볼리 곧 10개 마을 중에 위치한 하나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도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평소 무덤 사이에 살던 귀신들린 사람, 곧 동물 무덤에 거주하고 있던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본문 4절에 따르면 그 귀신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그것들을 모두 끊어버리는 괴력을 지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5절에서는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는 사람이었죠. 그 소리가 보통 사람의 소리가 아닌 귀신 들린 자의 목소리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귀신 들린 것과 정신 질환의 차이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본문의 귀신들린 자처럼 괴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사람은 목소리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약물에 반응하지만, 귀신들린 자는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다고 했죠. 정신질환자가 혼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서 반응한다면, 귀신들린 자는 그 육을 지배하고 있는 영적인 세력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께 달려와 절을 하죠. 그러면서 7절에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말하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하고 말이죠. 그 귀신들린 자가, 그 안에 들어 있는 귀신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로 말입니다. 개의 새끼는 개요, 소의 새끼는 소요,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 아닙니까? 곧 성자 하나님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 권능을 지닌 하나님이심을, 그 귀신들린 자 안에 있는 귀신이 알아 본 것이죠.
그 귀신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본문 9절에서는 “군대”라고, 그만큼 많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 들어 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군대 귀신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본문 13절에 보면 돼지 떼 2천 마리임을 밝혀줍니다. 그렇게나 많은 군대 귀신이 2천마리에 해당하는 돼지 떼에게 들어갔음을 밝혀주고 있죠.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교수님에게 이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습니다. 2천 마리떼나 되는 돼지 떼에게 군대 귀신이 들어갔다면, 과연 돼지 떼들이 바다로 들어가 몰사했다면, 귀신들도 다 죽은 것입니까,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그 교수님은 답변을 하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런 질문이라, 한 번도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쉽게 그 답을 유추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귀신은, 심지어 2천 명이나 되는 군대 귀신은, 육적인 동물과 같은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돼지떼들이 몰사당해도 다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빠져 나와서 어디를 배회하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공중 권세 잡은 마귀 곧 사탄의 세력들에 지시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탄 혹은 마귀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언젠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귀나 귀신은 하나의 존재로서, 타락한 천사장이 마귀요 사탄이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창세기와 계시록에 나오는 ‘옛 뱀’, 이사야서와 시편과 욥기서에 나오는 ‘리워야단’, 그리고 마가복음 3장에 나온 것처럼 귀신의 왕 ‘바알세불’ 등으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마귀와 사탄을 ‘루시퍼’로 칭하는데, 그것은 본래 히브리어 성경의 ‘새벽별’이란 단어를 제롬이라는 성경번역자가 ‘루시퍼’란 이름으로 잘못 번역한 이후, 킹제임스번역본에서 그대로 ‘루시퍼’란 이름을 사용하면서부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탄 곧 마귀를 ‘루시퍼’로 생각한다고 했죠. 그러나 사탄 혹은 마귀의 이름이 그 이름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냥 타락한 천사장이 옳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위치에 있는 천사장이 자신이 이끄는 천사들과 함께 타락하여, 그 천사장은 마귀 곧 사탄이 되었고, 그를 따르는 천사들은 귀신 악한 영들, 본문의 군대 귀신들이 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아무리 마귀 곧 사탄이 힘이 쎄고, 그 휘하의 귀신들의 세력이 아무리 괴력을 발휘할지라도,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 곧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맥을 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울이 귀신 곧 악귀에 들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 다윗이 수금을 타서 그 악귀를 쫓아낸 사건이 기록돼 있습니다(삼상16:23). 또한 삼손이 성령님의 능력에 사로잡혔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을 묶은 밧줄을 불에 탄 새끼줄처럼 끊어버린 능력을 발휘한 일이 있었죠(삿15:14).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일이 있고(막1:13), 당신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부여해 주신 일이 있습니다(마10:1).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 성에서 귀신에 붙잡힌 여종의 귀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쫓아낸 적이 있죠.
그렇기에 오늘날도 공중권세 잡은 마귀 곧 사탄의 세력들, 그 영적인 세력들은 믿는 자들을 미혹할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의 심령 속에 역사하여, 할 수 있는 한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목적으로 역사하고 활동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의 세력들이, 때로는 그 귀신이 간질을 일으키고, 불에도 넘어지게 하고 물에도 넘어지게 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그런 악한 영들의 세력을 물리치게 하시는 권세를 부여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오늘 마가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님의 그 능력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2천 명의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주님께서 능히 제압하고 물리치신 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주님 안에서 깨어 있으면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주님의 능력 안에서 그런 귀신들과 악한 세력들을 능히 제압하고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은 우리의 일상이 공중권세 잡은 자들과의 영적인 전투의 현장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더욱더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주님의 능력 속에서 성령님의 내주하심 속에 살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그런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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