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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애굽에 430년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구원내 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주셨고 그들이 마음껏 심고 거둘 수 있는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애굽의 방식 죄악된 방식을 좇지 않도록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주셨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 때 하나님께서 자손 천대까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광야 40년을 거쳐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과연 애굽의 방식을 버렸습니까?
그 땅의 원주민들이 살아가는 그 방식을 모두 버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았습니까?
(원성)이사야 5장 1-3절은 하나님께서 가나아 땅에 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탄식의 말씀입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사5:1-3)
(깨달음)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옮겨심으면서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를 맺기를 바랐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죠.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를 맺기는커녕 오히려 자잘한 들포도만 맺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의 말씀을 주셨는데도 그들의 심령에 말씀을 심으면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 사실을 깨닫도록 앗수르 제국을 쳐서 바벨론 제국을 쳐서 그들이 돌이키도록 했던 것이죠.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에 심기는커녕 애굽과 세상 방식을 좇아 살 뿐이었죠.
결국은 그들은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의해 차례로 패망하고 식민지로 살았죠.
물론 그 속에서도 ‘남은 자’처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씨앗’을 마음에 심고 사는 후손이 있었죠.
그 길을 준비한 이가 세례 요한과 안나 선지자 같은 이들이었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토대 위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었죠.
(적용)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것은 내 육체의 본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새로운 씨 곧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씨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 씨를 내 심령에 심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씨는 썩어질 씨가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씨요,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자, 새 생명을 얻는 자는 말씀의 씨를 심령에 심어야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이삭이 100배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신다는 거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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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 2차 갈릴리 사역을 끝마치고 고향 나사렛으로 가기 직전에 가버나움 강가에서 무리들이 말씀을 전파하셨죠.
그때 1차 갈릴리 사역때처럼 배에 올라 바람을 확성기 삼아 그 무리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배나 어부나 고기에 대한 비유보다 밭에 관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곳 갈릴리 호숫가에 모여든 군중들이 어부보다는 대부분 농사 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만큼 그들이 알아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비유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이치를 깨닫게 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는 천국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씨를 심는 밭 가운데 첫 번째 밭은 ‘길 가’와 같은 밭이었습니다.
두 번째 밭은 ‘흙이 얕은 돌밭’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본 세 번째 밭은 ‘가시떨기’밭이었죠.
‘길가와 같은 밭’은 밭 고랑을 발로 밟고 다니기 때문에 딱딱하고 굳어 있어서 흙이 씨를 품을 수 없는 밭이죠.
새들이 금방 와서 먹어버리는 밭입니다.
일명 굳은 심령, 자신의 자아와 세상 경험과 완곤함으로 똘똘 뭉쳐 있는 심령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심령처럼 예수님께서 새 생명의 씨앗을 심고자 하셔도 거부하는 그들이었죠.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요 신자인 것 같지만 종교인으로 머물러 있는 자들이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입니다.
흙이 얕은 돌밭은 어떤 자들의 심령입니까?
씨를 부리면 발아가 되고 싹이 트지만 뿌리가 없기 때문에 환란이나 핍박이 밀려오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냄비처럼 금방 뜨거워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자들이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도 성령의 임재가 없을 때는 성령님께서 내주하지 않을 때는 흙이 얕은 돌밭과 같은 심령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해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고 고백했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부활할 거야 하실 때 금방 돌변해서 예수님을 꾸짖는 그들의 모습이죠.
주님의 제자들이 3년간 주님과 동행했지만 예수님께서 체포당하고 심문받을 때 다 멀찍이 달아났던 그들의 믿음 상태였죠.
가시떨기밭은 어떤 심령의 밭을 말하는 것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세상 향락에 빠져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자는 자죠.
사도행전에 나오는 벨릭스 총독과 같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하늘 생명의 말씀을 경청했던 자입니다.
그는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 앞에 두려움을 품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세상 재물에 빠져 있어서 말씀을 품지도 뿌리내릴 수도 없어 멸망받은 자였습니다.
(예화)사실 물질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지만 이 세상이 필요한 것이죠.
그러나 재물의 유혹은 가시떨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재물의 유혹에 영적으로 질식당하기 때문이죠.
그 사람이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하죠.
그래서 물성이 그 사람의 영성을 가늠하기도 합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보면 그 사람의 영성의 차원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생활 비유를 37가지나 남겨 주셨는데 그 중 17가지가 물질에 관한 비유입니다.
영국의 찰스 스펄전 목사님도 그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네가 회개했다고 하나 너희 전대 돈주머니가 회개하기 전까지 나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향해 마음 문을 열었다고 하나 네 돈주머니를 열기까지 어찌 네 마음을 믿겠느냐?”
재물의 주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재물의 주권을 정직하게 드리는 자가 재물의 유혹에 질식당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화2)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믿음 좋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앙 연조가 오래 깊어갈수록 직분이 무거워졌고 마침내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으니 담배였습니다.
담배 한 대 핀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에 장로구실을 하기가 여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몰래, 교인들 몰래, 자식 몰래, 아내 몰래, 담배를 피는데 주로 시골 화장실이었죠.
더운 여름날이면 부인은 구더기가 하도 많으니까 거기다 석유를 한 번씩 뿌려줬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석유가 없어서 휘발유 한 통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 장로님이 몰래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밑으로 떨어뜨렸는데 순간 불길이 솟아올랐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해괴망측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습니다.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우리가 끊을게 어디 담배뿐이겠습니까?
잘못된 것 끊지 못하면 신앙적으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성령님께서는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끊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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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중요한 것은 그 세가지 심령의 밭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과 무관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죠.
길가와 같은 밭도 흙이 얕은 돌밭도 그리고 가시떨기로 가득찬 밭도 실은 말씀을 듣고 경청하는 자들이죠.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들이고 예수님 곁에 있는 자들이요 복음을 멀리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의 씨앗을 품지 못하고 뿌리내리지 못해서 열매맺지 못하는 심령의 밭입니다.
이것은 수요일 밤에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는 세 부류의 사람을 예를 들 수 있죠.
이른바 육에 속한 사람 육신을 따르는 사람 그리고 성령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동물적인 사람으로 헬라어로 ‘프쉬키코스’(Ψυχικὸς)의 사람입니다.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만을 좇는 구원밖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의 씨앗을 품지 못한 자요 하나님의 자녀와는 무관한 마귀의 자녀요 지옥에 떨어질 자들이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나옵니다.
육신을 따르는 사람인데 헬라어로 ‘사르키코스’(σαρκικός)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로서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기 본성과 자기 자아와 자기 경험의 지배를 더 받는 종교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해도 혼적인 지배만 받을 뿐 성령의 통치하심을 받지 않는 종교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두려워할지라도 이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세상 향락에 휩쓸려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마지막 한 사람은 성령의 지배와 성령의 통치하심을 따르는 영적인 사람입니다.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πνευματικός)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썩지 아니할 씨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를 품은 사람이요 사라지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는 사람입니다.
프뉴마티코스의 사람들은 길가의 밭도 아니고 흙이 얕은 돌밭도 아니고 가시떨기 밭도 아닙니다.
그 심령의 밭이 부드러운 흙으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마음에 품고 삶으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뽑아서 가나안 땅에 심고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를 맺기를 바라셨는데 바로 그런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번째 밭도 그와 같은 심령의 밭인데 본문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원해)‘좋은 땅’이라고 할 때 ‘좋은’이란 말은 헬라어 ‘칼로스’(καλός)입니다.
그 단어는 ‘선한’ ‘착한’ ‘귀한’ ‘아름다운’ ‘고상한’ 등의 뜻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마3:10, 마12:33) ‘아름다운 열매’(마7:17) ‘착한 행실’(마5:16) ‘선한 목자’(요10:11) ‘선한 일’(딛2:14) 등으로 쓰인 단어죠.
그런데 ‘선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가도스’(ἀγαθός)이고 다른 하나가 본문의 ‘칼로스’입니다.
‘아가도스’는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은 관념의 선입니다.
‘칼로스’는 인간관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착한 행실이 아가도스라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행실이 칼로스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좋은 땅’은 구체적으로 어떤 밭의 심령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품는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심령에 품고 뿌리를 내리 열매 맺는 심령이 좋은 땅의 심령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의 씨앗으로 품고 그 씨앗이 내 심령에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심령 말입니다.
(적용)그래서 야고보서 1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심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의 마음에 심되 온유함으로 받아 심으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은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말씀이 곧 구원은 받았지만 이 세상의 육신과 정욕과 자랑거리에 휩쓸려 살아가는 자를 말하죠.
그런 자들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임재 가운데 성령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심는 자는 성령께서 원하시는 영생의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5장 19-24절은 어떤 심령이 좋은 밭의 심령인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의 일 곧 구원밖에 있는 자들, 사탄의 세력이 통치하는 애굽의 방식을 좇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들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파와 분열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과 같은 것들을 심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가와 같은 밭의 심령도, 흙이 얕은 돌밭의 심령도, 가시떨기 밭의 심령도 그런 것들에 더 끌릴 수 있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우리의 육신적인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아야만 그런 것들을 이겨내며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심령이 바로 성령의 열매를 더 맺고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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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좋은 심령의 밭이 되는 은혜를 베푸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애굽에서 빼내 가나안 땅에 심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면서 무엇을 깨닫고 있느냐?”
“죄와 사망의 백성으로 살던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새 생명의 씨앗처럼 그들을 빼내 가나안 땅에 심어 극상품포도열매를 맺도록 하신 것 아니었더냐?”
“그를 위해 율례와 법도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했는데 그들의 심령이 말씀을 품지 못한 채 열매 맺지 못한 것 아니더냐?”
“그 후에 예수님을 보내 새 생명의 씨앗을 주고자 했는데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기 자아과 고집으로 똘똘뭉쳐 새 생명의 씨앗을 거부한 것 아니더냐?”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진 제자들조차도 환란과 시험이 닥쳐올 때 주님을 버리고 도망친 그들의 심령이지 않았더냐?”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 같고 심판의 날을 두려워하는 것 같아도 이생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쾌락이 더 깊이 뿌리내려 있으면 새 생명의 씨앗을 품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정말로 하나님나라의 좋은 밭의 심령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새 생명의 심령이라면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말씀의 씨앗을 네 심령에 온전히 품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사르키고스의 육신적인 것에 치우쳐 산다면 이제부터는 프뉴마티코스의 사람으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면 좋지 않겠느냐?”
“육신의 소육을 좇는 것은 정욕과 쾌락과 다툼과 분열을 일으키며 사람에게 상처주지만 성령을 좇는 자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절제를 좇는 것이니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겠느냐?”
“새 생명의 자녀인 네가 하나님나라의 밭이 되고자 할 때 어찌 너의 심령과 삶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지 않겠느냐?”
“이삭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에 심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셨듯이 네가 말씀을 심령에 심을 때 그와 동일한 복을 주시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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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미군 부대가 있는 경상도의 어느 마을에 있었던 일이랍니다.
새벽기도를 마친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옆에 미군들이 있었는데 자주 보는 얼굴이니 “Hello.”하고 서로 인사를 했답니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니 할머니가 기뻐서 “왔대이.” 하며 버스를 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미군은 할머니가 “What day(오늘이 무슨 요일인가)?”라고 묻는 줄 알고 “Monday(월요일).”라고 대답했다죠.
할머니는 그에게 “무언데?”라고 묻는 줄 알고 “버스대이.” 라고 대답했습니다.
미군은 할머니가 “Birthday(생일).”라고 하는 줄 알고 ”Happy birthday(생일 축하합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미군과 할머니의 대화는 진정한 대화가 아닌 것이죠.
마찬가지입니다.
새 생명의 씨를 받지 못한 자, 성령을 받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저게 무슨 소리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말인데. 내 경험상 상식적이지가 않아.” 하면서 속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죠.
설령 말씀을 경청하고 심판의 말씀 재림의 말씀 앞에 두려움을 갖는다 해도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이 깊이 뿌리내려 있어서 예배당을 떠나면 육신적인 것에 더 끌려다니는 것이죠.
그런 종교인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겠냐는 것입니다.
미군과 할머니 사이에 대화가 통해야 하듯 저와 여러분도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을 품고 말씀을 좇아 사는 좋은 심령이 되시길 바랍니다.
물론 내가 구원받았어도 성령의 소욕보다 육체의 소욕에 끌려다닐 수 있기 때문에 성령님께 도와 달라고 간구해야 하는 것이죠.
로마서 8장 26절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도우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일을 하고 사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성공할지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성령님을 의지하며 간구하며 살아갈 때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를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미군과 할머니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야 하듯이 제 심령과 성령님 사이에도 소통이 일어나게 해 주세요.”
“제 심령의 밭이 좋은 옥토가 되어야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 생명을 받았다면 하나님의 새 생명의 씨인 말씀을 온전히 품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말씀을 받을 때 내 자아와 경험으로 판단치 않시고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도 차단하게 하시고 온전히 품게 하시옵소서.”
“내 심령에 육체의 소욕이 솟아날 때 성령의 소욕으로 죽이고 성령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게 해 주세요.”
“그때 내 심령과 육체와 인생의 밭에 치유와 회복이 급속하게 일어나게 하시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해 주세요.”
(찬양)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믿음 뿌리 내리고
주의 뜻대로 주의 뜻대로 항상 살리라
주의 시절을 좇아 구원 열매 맺으면
주의 영화로운 빛 너를 보호하리니
주의 뜻대로 주의 뜻대로 항상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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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새 생명의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새 생명을 받은 자답게 우리 심령에 새 생명의 씨앗인 주님의 말씀을 품고 싹이 나고 뿌리를 내릴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새 생명을 받은 자인데도 말씀을 품지 못한채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면 이 시간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길가와 같은 밭을 갈아엎고 돌밭의 돌을 빼내고 가시떨기도 다 뽑아내 좋은 옥토의 심령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령에 임할 때 내 자아와 경험으로 판단치 말고 이생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차단한 채 오직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여 순종의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때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삶에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시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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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에 떨어지매(마13:1-8)_2023년 12월 3일 대림절첫번째주일설교 (0) | 2023.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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