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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러시아와 우크라니아 사이에 전쟁이 멈추고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전쟁도 3개월간 지속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죠.
머잖아 중국이 대만을 치면 미국이 한미일 공조해서 세계질서를 다시금 재편하게 되고 한국의 위상이 한껏 올라갈 것으로 대다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미국이 북한을 핀셋으로 뽑듯 북한의 지도자를 제거해서 한반도에 통일의 바람이 불어올 수 있다고 하죠.
물론 그것은 미국이라는 세계패권 국가에 기대는 힘이지만 진정한 세계질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일이죠.
그만큼 그리스도인은 모든 때와 시기를 인간이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 하나가 본국으로 엽서 한 장을 보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물론 그 엽서는 일본군이 먼저 내용을 검열하고 나서 보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미군 포로는 그 엽서를 통해 자기 안부를 전하는 척하면서도 실제로는 군사 정보를 본국에 보내고자 한 것이었죠.
그는 검열하는 일본군이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엽서 내용을 교묘하게 꾸몄습니다.
우선 받는 주소를 ‘미국 어느 시 어느 길 어느 빌딩 사무실 몇 호’라는 식으로 썼습니다.
물론 실제하지 않는 주소였죠.
그 대신 주소 가운데 ‘CIA’라는 약자가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괄호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미국 중앙정보부’를 뜻하는 약자였죠.
그 엽서를 받은 미국 우체국 직원은 그런 유령 주소로 엽서를 발송한 미군 포로의 의도를 알아차렸습니다.
우체국 직원은 엽서를 미국 중앙정보부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CIA 정보부원들이 그 엽서를 봤는데 내용은 간단했죠.
“이곳에 우리 미군들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지만 별일 없이 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물론 미군 포로가 미국 정보부에 그런 의례적인 인사말을 전하려고 어렵게 엽서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했죠.
그런 차원에서 더 세밀하게 편지 내용을 검토해 봤습니다.
그러다가 그 엽서에 씌인 문구 중에서 행이 바뀔 때마다 제일 첫머리에 나오는 단어만 다시 모아 봤습니다.
아주 새로운 문장이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지금 포로로 잡혀 있는 우리 미군의 숫자는 몇 명이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훗날 미군의 작전 우선 순위나 포로 교환 시에 아주 요긴하게 쓰인 정보가 되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만약 그런 내용이 그 엽서에 담겨 있다는 걸 일본군이 눈치챘다면 절대로 보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검열하는 일본군이나 미군 정보부가 똑같은 엽서를 읽었지만 미군 쪽에서만 그 편지 내용의 키포인트를 찾아낸 것이었죠.
하나님의 계시도 그런 차원 아니겠습니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요점을 정확히 깨닫는 사람이 있지만 전혀 알아들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대림절 4주간 동안 나눈 말씀의 씨와 밭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심령에 떨어져도 길가와 같은 밭, 돌짝밭, 가시떨기밭은 말씀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오직 옥토밭과 같은 심령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심을 수 있고 뿌리를 내려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말이죠.
(적용)오늘 본문의 말씀도 구원밖에 있는 불신자가 읽으면 별 것 없어 보이는 내용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프뉴마티코스의 사람들 곧 성령의 감동감화를 받은 사람들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된 키포인트를 깨닫게 하는 암호와 같은 말씀은 오직 성령의 사람들의 심령에 심겨지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역배)오늘 본문은 예수님 탄생과 관련하여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천하를 다 호령하던 시대입니다.
그 사람은 그 유명한 줄리어스 시저의 조카 옥타비아누스(B.C.27년 1월 16일~A.D.14년)입니다.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투리누스(Gaius Octavius Thurinus)였지만 카이사르의 양자로 입적된 후에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로 불린 인물이죠.
그는 시저가 죽은 후에 정권을 잡고 황제가 된 후 스스로를 ‘가이사 아구스도’라고 칭했습니다.
그의 치하에서 몇십 년 동안 로마는 최대 전성기를 누렸고 그래서 로마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팍스 로마나’로 통했죠.
그런 아구스도가 ‘천하에 영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의 한 마디면 온 세계가 절대 복종하더 때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통치시대에 예수님의 탄생이란 것은 세상 역사로 볼 때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기 예수는 요셉이라는 한 시골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죠.
요셉이 베들레헴에 호적하러 가게 된 것도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아구스도의 명령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성령의 감동감화를 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관점은 오직 아구스도에게 집중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어디에 그 눈과 심령이 쏠리겠습니까?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라는 말씀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그 당시 베들레헴은 온 세계의 중심인 로마나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촌동네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은 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는 구약성경의 예언에 따르면 장차 메시아가 탄생하실 곳입니다.
미가서 5장 2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곧 베들레헴에서 왕이 태어날 것을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윗왕도 베들레헴 출신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미가 선지자의 예언이 있기 훨씬 전의 일이었죠.
그 이후에 새로운 왕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미가서에는 그 주권자의 “근본이 상고에, 태초에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왕의 본적 곧 원적을 따라올라가면 그것은 베들레헴이 아닌 영원전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성육신하신 메시아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깨달음)그러니 하나님의 섭리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본래 아기 예수님의 육신적 부모가 된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 사람들이 아니었죠.
거기서 꽤나 거리가 먼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잉태한 후에 별일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태어나실 게 뻔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오차가 생기지 않도록, 구약의 예언된 말씀이 철저하게 성취도록 하신 것이었죠.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기 직전에 세계 천하를 호령하는 가이사 아구스도의 영을 내려 호적하도록 한 게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아구스도도 그리고 아구스도의 권세와 능력에만 집중하는 구원 밖의 세상 사람들은 온통 호적령에만 관심이 쏠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심령이 옥토와 같은 자들,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자들, 성령의 소욕을 쫓는 자들의 눈은 베들레헴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적용)그렇기에 누가 이 세상이 전정한 주권자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탄생 당시의 역사를 주도하고 있는 인물은 결코 가이사 아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온 천하를 한 손에 쥐고 젖먹는 어린아이까지 벌벌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말 한다면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주권자는 온 우주와 온 세상의 절대 권위자이신 성부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그분의 섭리와 주권 속에서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님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베들레헴에 태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명령서 하나에 사인(sign)만 하면 수십만 명의 미군들은 지구 어느 곳이라도 다 동원되어 출동합니다.
국제통화기금의 IMF 총재도 웬만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보다도 훨씬 더 큰 경제적 실세로서 세계 모든 나라의 경제권을 발휘하기도 하죠.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열왕들과 군왕’들에 불과할 뿐 결코 ‘왕 중의 왕’은 아니라는 사실이죠.
이 세상과 오고 오는 온 세상의 절대주권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통치자의 역사 위에서 당신의 구원의 섭리와 심판의 섭리를 친히 베풀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베들레헴이라는 암호해독의 원천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일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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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그렇다면 베들레헴이라는 암호해독과 함께 더 중요한 증거의 표적이 본문 8-14절 말씀에 있습니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깨달음)예수님 탄생 직후 제일 먼저 찾아왔던 사람들은 그 지경에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그 당시 품삯을 받고 양을 치던 사람들로서 당시 사회의 하류로 취급받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소유한 주인이 아니었습니다.
소작농처럼 양 주인의 양을 삯을 받고 양을 치던 비참한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무시를 당했는지 그 당시 목자들의 증언은 법정에서 증인으로 채택될 자격조차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사람 같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목자들을 예수님 탄생에 있어서 유일한 현장 증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온 천하를 주름잡는 가이사 아구스도를 증인으로 삼은 게 아닙니다.
더욱이 유대사회를 주름잡던 72명의 산헤드린 의원들도 많았고 율법에 능통한 자와 성전관계자들도 많았지만 그들을 증인으로 채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세상 법정에서조차 증인될 수 없었던 사람들, 그 무식하고 천한 목자들을 예수 탄생의 첫 목격자요 증인으로 삼게 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들에게 어떤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까?
그 목자들은 그 밤에도 자신들이 맡은 양떼를 돌보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있을 때 하늘의 밝은 빛의 영광 곧 천군 천사의 찬송과 같은 신비한 장면들을 하나님께서 동원한 것이었죠.
그러면서 그들에게 보여준 결정적인 증거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였습니다.
그 ‘구유’란 말과 소가 먹는 여물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막 태어난 갓난 아이라면 유아용 침대 같은 곳에 누여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곳이 없었습니다.
아구스도의 호적령 때문에 빈방이 있을 수가 없었고 결국 마굿간의 여물통에 아기 예수를 뉘여야 했던 것이죠.
그러나 그 모습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구약성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 53장 2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구유에 누인 아기”란 말씀이 바로 그 비천한 메시아 탄생의 예언과 정확히 들어맞는 말씀입니다.
미가서를 통해 베들레헴 땅에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다면 그분의 탄생은 마른 땅에서 줄기 하나 간신히 솟아난 모습처럼 비참한 상태가운데 태어나신 것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구유에 누인 아기’라는 증거가 없었다면 목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정확히 찾아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신분이 비천한 그 목자들이 감히 어느 여관방을 기웃거리며 아기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누가봐도 알 수 있고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그 손쉬운 마굿간의 말 구유통에 누인 이기가 온 세상의 구원의 주님이심을 표적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목자들은 여관마다 돌아다닐 여유도 없었고 그 방마다 아기 예수를 찾아낼 이유조차 없었습니다.
그 목자들은 혹여라도 여관방에서 태어난 아기의 관상조차 따져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목자들에게는 무슨 신학적인 지식이나 메시아 족보조차 따져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구유에 누인 아기가 바로 너희에게 표적이 되리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 자체가 그들에게 명백한 사인(sign)이 된 것입니다.
(적용)그렇다면 어떻습니까?
그 말구유의 ‘구유에 누인 아기’의 울음소리에 대해 대부분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그냥 무심히 지나쳤을지 모릅니다.
아구스도의 호적령에만 신경 쓴 채 그 누구 하나 아기의 예수의 탄생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 와중에 말구유통에 누인 아기를 보거나 울음소리를 들었다면 그냥 비천한 눈길로 눈살을 찌푸렸을 모릅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이사야서의 말씀그대로 그 아기에게는 흠모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 밤의 목자들에게는 말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모습 자체가 정확한 표적이요 암호였던 것입니다.
그 모습 역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의 씨를 품은 자들만 깨달을 수 있는 신비로운 암호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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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원 밖에 있는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는 성탄의 암호를 깨닫는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성탄절이 되면 이 세상 사람들은 화려한 성탄 츄리와 금박이 박힌 성탄 엽서와 황금을 선물하려고 하지 않더냐?”
“그것이 실은 그 당대에 천하를 호령한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모든 초점을 맞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는 것 아니더냐?”
“지금도 구원밖에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권세와 정사에 모든 이목이 쏠려 있지 않더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약속을 통해 베들레헴 말구유통에 아기 예수를 누이게 하지 않았더냐?”
“그 밤의 목자들도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던 하층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 왕의 왕을 볼 수 있는 암호를 열어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고 있는지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너 자신을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의 씨앗을 품은 자로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의 싸인에 집중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그 목자들에게 ‘구유에 누인 아기’를 표적으로 삼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인으로 삼게 하지 않았더냐?”
“오늘 너의 심령에 아기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의 주님으로 너의 심령에도 그런 싸인을 심어주신 것 아니더냐?”
“그러니 프뉴마티코스의 성령의 사람으로서 너도 이 세상에 크고 높고 화려한 것에 네 마음을 쏟기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분의 섭리를 좇아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때 그 목자들에게 아기 예수 탄생의 첫 영광을 보여준 것처럼 너에게 재림의 첫 영광을 안겨줄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
(찬양)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하늘 아버지 우릴 새롭게 하사 열방 중에서 주를 섬기게 하소서
모든 나라 일어나 찬송 부르며 영광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같은 한 통의 엽서를 봐도 그 요점을 깨달을 줄 아는 사람이 있었고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하는 일본군이라 해도 찾을 수 없는 암호를 미군은 알아보고 해독했습니다.
2천년 전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현장이 베들레헴에 있을 것이고, 마른 나무가치처럼 볼품도 없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구약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대로 성취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들만 깨달을 수 있는 암호해독이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좇는 자들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말구유통을 바라보는 자들을 통해 그 암호해독을 베풀어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좇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신구약성경에 약속된 언약의 말씀을 그 심령에 심는 자들에게 그와 같은 놀라운 은혜의 복을 베풀어주실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것이 너에게 표적이니라’하신 진정한 표적이요 이 땅에 다시오실 재림의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는 표적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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