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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리뷰BookReview

고난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가?

by 똑똑이채널 2021.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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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목사의  〈 소하르의 소나타 〉

이 책은 신구약에 나오는 고난을 비교연구하여 은혜로운 말씀으로 나누고 있는 책이다.

그는 장로교신학대학과 콜롬비아신학대학원에서 신학과 목회학을 공부했다.

19877월부터 휴스턴 한인중앙장로교회 설교목사로 시작해 이듬해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그때부터 200912월까지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1.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유혹을 받습니다.

고난 중에 유혹을 당할 때 자기를 변호하고 자기를 변명하고 자기를 방어합니다.

조금만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텐데, 그런데도 자기 방어를 하기에 급급합니다.

C.S.루이스는 고난에 대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잠자는 세상을 향하여, 죄에 무감각해진 사람들을 향하여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하고 말입니다.

 

2. 메튜 헨리는 욥기 전체를 웅장한 대서사시의 오라토리오로 비유합니다.

아주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위대한 합창이 끝나자마자 소프라노 솔리스트의 아름다운 아리아가 등장하는 순간이 욥기 23장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나는 나의 길을 알 수 없지만 오직 그가 나의 길을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듯 고난이 덮쳐오고 친구조차 무섭게 책망하고 저주를 퍼붓는 그 자리에서,

폭풍우 한 가운데서 찾아도 만날 수 없는 그 자리에서,

욥은 하나님을 향해 위대한 진리를 깨닫고 고백하며 선언을 합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길을 아신다고.

 

3. 미국 여성 목회자 중 한 사람이며 영향력 있는 여성신학자 다섯 명 중 한 사람이 있습니다.

조이스 마이어라는 목사님이 그분입니다.

미주리 주에 있는 세인트루이스 교회를 섬기고 있고 방송사역으로 전미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입니다.

행복한 날마다의 삶을 위해 사역하는 그 분은 어렸을 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생부에게 성추행과 성폭행까지 당한 일이었습니다.

악몽이고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자기 실수나 잘못으로 저질러진 환란이나 아픔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의 의지와는 무고나하게, 피눈물 나는 괴로움과 끔찍한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만 뜨면 악몽 같은 시간을 집에서 겪어야 했습니다.

지옥같은 현실 앞에서 비참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한 아픔이었습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 , ? 왜 내게 이런 아픔과 고난과 고통을 주셔야 합니까?”

내 인생은 어쩌란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누구의 잘못입니까? 누구의 죄악입니까?”

물으면 물을수록 불쌍해지고, 하나님을 향해 항의할수록, 자기 인생이 점점 더 불행해졌습니다.

그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멈추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문의 대답에 대해 하나님께서 역사상 한 번도 대답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에 욥기서의 말씀을 읽을 때 깨달았습니다.

욥이 그런 질문과 그런 고통을 갖고 있을 때, 하나님은 한 순간도 대답조차 하지 않으셨다는 걸 말입니다.

다만 욥은 그런 고통의 과정 속에서 깨달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그가 아시나니.’

욥은 그때 하나님의 전폭적인 주권을 받아들이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조이스 마이러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4. ‘새빛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손원석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25세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27살 때 갑자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망막 박리였습니다.

망막과 시신경이 분리가 되면서 점점 실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수술하기 위해 2년간 전국의 유명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는 기도원도 다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병은 더 악화되었고 결국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친구 몇 사람에 의해 경기도에 있는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는 억울하고 원통했습니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청년 시절에 남들은 별짓 다했지만 자기는 똑바로 걸어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별짓 다 한 사람들은 멀쩡한데 왜 자기는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너무나 분통이 터졌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일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몸부림치면서 고쳐달라고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어느날부터는 안 고쳐 주셔도 되니까, 이유만 가르쳐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여서 눈여겨봤습니다.

환상 속에 기도원 산 위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짱에 찍히는 장면을 본 것이었습니다.

이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전의 통곡과는 전혀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하여 흘린 눈물이었다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눈물이었다면,

이때 흘린 눈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난 후의 기쁨과 감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괜찮습니다.”

 

5. 유명한 C.S.루이스는 총각으로 오랫동안 살다가 어느날 한 여자를 만납니다.

한 눈에 반해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이미 암투병 환자였습니다.

루이스는 기독교에서는 성자라고 여기는 영문학 교수였습니다.

그는 암투병을 하고 있는 조이와 결혼하고, 마음 속으로 아내를 고쳐주실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조이가 고통 속에서,

그것도 정말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조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갈 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던 그가 그 순간을 기록한 일기 같은 책이 있습니다.

헤아려 본 슬픔이란 책인데, 그 책에 그의 아픔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 지금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다른 모든 도움이 다 헛되기에 하나님 곁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

내 심정이 얼마나 절박하여 하나님께 찾아왔는데,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다가가면 하나님은 그 손을 외면하지 않고 거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께 다가왔는데,

하나님. 내 사랑하는 아내를 저렇게 내버려 두신 그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의 면전에서 꽝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리고 나서는 끝까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차라리 그 앞에서 돌아서는 게 낫겠습니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내 가슴을 찌르는 칼처럼 느껴질 뿐,

창문 곁에서 불 한 점 없는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 집은 빈 집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왜 숨어 계십니까?”

루이스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항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의심과 질문이 필요합니다.

문제를 삼지 않는 것이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쯤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지성으로 해석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반은 의심이며 반은 그 의심의 해답으로 채워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6. 2000년에 〈리더스가이드〉에 나온 짧은 토막글입니다.

특수아동들이 있는 학교에서 5학년 학부모들을 모셔놓고 연극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보통 아이들보다 지능이 낮은 아이들이 연극을 하는 순간입니다.

그 중에서도 한 명이 하나님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아이가 관중을 향해 던져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나에게 질문할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한 학생이 부모님들에게 또는 학교 선생님들에게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연극을 연습시켰던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긴장합니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아이가 대답할만한 지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아저씨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서 사람들에게 왜 고난을 주십니까?”

왜 슬픔을 주셔서 울게 하고, 괴로움을 주셔서 고통을 느끼게 하고, 아픔을 주셔서 마음 속에 상처를 갖고 살아가도록 만드십니까?”

그곳에 있는 모든 학부모들이 그런 자식들을 키우고 있기에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으로 연극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대답을 도저히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적 수준이 5학년에도 못 미치는 이 아이가 무슨 대답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이 아이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털썩 주저앉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하늘을 파랗게 만들었지. 나는 이 세상을 푸르게 만들었지.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어. 온 우주를...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의 몫만 하면 돼. 너는 너의 일만 하면 돼(You do your part.) 당신은 당신의 일만 하면 돼.”

그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 대답을 했는지는 나무도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픔을 갖고 살아가던 그 부모님들은 모두 전율을 느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기들 앞에서 천둥처럼 던지시는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가는 그들에게,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낙심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너의 일만 하면 돼. 하나님의 몫까지, 다른 사람의 몫까지 간섭하며 살지 말고.”

 

 

7. 베드로전서 1장에서 여러 가지 환란을 당했을 때 크게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이때의 환란을 트리블라치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하나님만이 가지는 그 거룩한 품성으로 우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환란이라는 것입니다.

펜싱을 할 때 아무데나 찌른다고 점수가 나오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급소를 찔러 환란 가운데 영광으로 빚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주는 것입니다.

환란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험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시험하는 환란인 트리블라치오, 때로는 탄타치오라고 하는 이 시험에도 옳다고 인정받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광과 존귀의 자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은 다른 종류의 고난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인쳐 주신 다음에 의도적으로 우리를 시험하시고,

우리를 영광스러운 자리로 이끄시기 위하여 고통을 주는 게 아닙니다.

애매한 고난도 있을 수 있다는 게 그것입니다.

애매한 고난, 부당한 고난, 아무래도 이유가 없이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디코스라고 부르는 고난입니다.

애매한, 이해하기 힘든, 받아들이기 어려운, 더 나아가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을 베드로는 애매한 고난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애매한 고난을 당했을 때, 첫째는 생각하라. 둘째는 참으라, 셋째는 아름답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애매한 고난, 부당한 고난을 당할 때, 생각하라 곧 의미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평안도 환란도 짓고, 빛도 어둠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내가 의미를 붙잡고 의미를 찾았을 때, 고난은 더 이상 저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부당하게 느끼기만 하고 아무런 의미조차 생각지 못한다면, 그 고난은 결국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애매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을 당했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신뢰하면서, 내가 가진 욕심을 내려놓고, 실수나 연약함과 부족함까지도 받아들이며 나갈 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신 게 베드로전서 2장의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은 또 다른 고난을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의를 위해 받는 고나입니다.

이것은 자발적이고 선택적이고 자원하여 받는 고난입니다.

영광의 자리와 고난의 자리가 있다면, 빤히 알면서 누가 고난을 택하겠습니까?

손해의 자리가 있는데 누가 손해 보는 자리로 나서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받는 고난에는 복이 있다고, 자발적이며 자원하여 선택하는 고난에 복이 있다고, 그 고난 자체가 복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가 선을 행할 때 이 세상 사람들이 비방한다 할지라도 누가 너희를 해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벧전3:13)

결국은 선을 행하는 사람, 의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살아가면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 있다면 더 이상 탄식하거나 세상과 다른 사람을 원망하여 살지 마십시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미 결정되고 이미 끝난 문제라면 받아들이십시오.

내 눈 내 스스로가 찍어서 이렇게 불행하게 되었다고 한숨 쉬며 눈물 흘리며 살지 마십시오.

받아들이시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선택적이고 자발적인 고난을 훨씬 뛰어넘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당하는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져야 할 십자가, 어차피 누군가 책임져야 하는 문제,

그래서 할 수 없어서 자기가 책임져 나가는 선택적인 고난이 아닙니다.

이미 처음부터 자기 스스로의 몫으로 생각하며 시작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이것은 적정한 고난이 아닙니다.

그냥 이 고난을 견디어 나가면 이길 것이다,

참고 나면 새로운 복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 시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푸시오라는 단어는 불 시험’ ‘불 시련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내 방법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말합니다.

불에 타서 깨끗이 재만 남는 것, 큰 바위가 떨어져 완전히 가루가 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4장에서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 시험을 당하는 것을 이상한 일 당한 것처럼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네로 황제의 잔인한 핍박과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그런 불시험과 핍박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어렵고 힘든데 앞으로 더 큰 불시험이 닥칠 터요,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 놓았다고,

너희 저주와 너희 모든 죄와 심판을 친히 담당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믿으면 이렇게 고난과 불시험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29절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큰 즐거움이자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래서 현재의 고난과 앞으로 다가올 더 큰 환란을 겪을지라도, 그런 불 시험을 당할지라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바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는 고난의 책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고난 속에서 적당히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성도의 시련과 불 시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아라, 인내하라는 말씀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영광을 말씀합니다.

산 소망을 말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기업을 말씀합니다.

고난 속에서, 불 시련을 당하는 성도들의 아픔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영광을 이야기하고 소망을 말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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