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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2014년에 개봉한 장이머우 감독의 중국 영화 〈5일의 마중〉이 있습니다.
2015년 1월 20일에 KBS에서 명절특선으로 방영을 해 준 적이 있었죠.
그 영화는 중국의 문화혁명기 시절 남편인 루(진도명)는 당에 대한 반역 혐의로 잡혀갑니다.
아내 펑(공리)은 딸 단단(장혜문)과 함께 살고 있죠.
어느 날 당에서 펑 모녀를 찾아와 루가 탈출을 했으니 혹시라도 남편이 찾아오면 반드시 신고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남편 루는 몰래 집으로 찾아와 펑에게 함께 도망치자고 얘기하고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쪽지를 남기고 사라지죠.
펑은 남편에게 먹일 빵과 짐을 싸들고 기차역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서로 만나기 전에 공안들이 들이닥쳐 남편을 체포해 갑니다.
놀랍게도 이를 신고한 것은 딸 단단이었습니다.
단단은 무용학교에서 촉망받는 인재였습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주연 자리를 뺏길까봐 아버지를 신고한 것이었죠.
물론 그 후로도 그녀는 주연을 차지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죠.
시간은 20년이 흘러 문화혁명 시기에 끌려갔던 이들이 모두 풀려납니다.
루도 5일에 집으로 가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딸 단단만이 마중을 나오죠.
단단은 아버지를 공장의 기숙사로 안내하는데 연극은 하지 않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진작 그만뒀다고 말하죠.
지금은 공장에서 일한다고 얘기를 합니다.
아내가 그리웠던 루는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찾아갑니다.
이윽고 아내와 재회하게 되죠.
하지만 무슨 일인지 펑은 남편인 루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쫓아내려고 합니다.
펑은 남편과 헤어진 일로 스트레스를 받아 ‘심인성 기억장애’를 앓게 된 것이었습니다.
루는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사진을 보여주고 또 아내와 추억이 서린 피아노도 쳐봅니다.
하지만 아내의 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다시 세월이 흐르고 남편과 아내가 모두 백발이 성성해졌습니다.
하지만 펑은 매월 5일이 되면 기차역으로 남편을 마중 나갑니다.
오늘은 꼭 오겠지, 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그 남편은 기억을 잃은 아내 곁에 서서 기약없는 기다림을 함께 합니다.
(깨달음)그렇게 영화는 끝이 납니다.
과연 무엇을 깨닫게 하는 영화이겠습니까?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뚱 곧 모택동이 공산주의를 내세워 ‘자본가와 그 앞잡이 그리고 지식인들을 숙청하는 때’였죠.
10년간의 내란으로 인해 2천만명 이상이 죽었을 것으로 집계하는데 그 일에 마오쩌둥의 홍위병들이 활개를 쳤죠.
그러니 10년 동안 수많은 지식인들이 투옥되고 숙청되었고 부모와 자식 간에도 믿지 못하는 비극을 만들어냈죠.
지금의 시진핑 주석도 문화혁명 시절에 변방으로 내 몰려 시골 어느 땅굴에서 목숨을 부지한 인물로 알려져 있죠.
그 영화에서도 딸 단단이 아버지를 신고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문화혁명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인간관계가 무섭게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친구 사이, 동창, 부부,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관점이 다르다고 반목하고 고발하던 사회였죠.
그로 인해 사회는 갈기갈기 찢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만든 장예모 감독은 그 시대의 또 다른 인간상을 보여주고자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두가 미쳐 날뛰고 가정과 사회가 파탄나는 시대라해도 그 속에서도 믿어주는 이들이 있는한 그 나라가 언제가 새롭게 될 날이 있다는 것을 기다리도록 하는 것 말입니다.
기억을 잃은 아내가 매월 5일이 되면 기차역으로 나가 남편을 기다리는 것도, 그 남편이 아내 곁에 함께 하면 기억을 회복하도록 기다리는 것도 그런 모습이죠.
(적용)그것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사회가 온통 소리없는 경쟁사회로 치닫고 있고 상대방을 짓눌러야 자신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소리치는 사회죠.
성을 상품화하고 성을 미끼로 경제적인 부를 구축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성소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동성애자들이 활개치고 동성애결혼을 합법화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우리사회의 모습이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서로 사랑하며 평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도록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변질되고 있으니 어찌 한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어찌 이 세상을 쓸어버리려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노아시대에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듯이 머잖아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신다는 이유가 그것이죠.
그런데 이런 때일수록 크리스천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죠.
세상이 미워하고 시기하고 경쟁하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려고 하는 이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잠잠히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이죠.
그 분의 때에 그 분의 방법으로 그 모든 것을 회복하실 것을 바라며 묵묵히 그 분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시편의 히브리어 성경 이름은 ‘테힐림’(Tehillim)입니다.
그 뜻은 ‘찬양의 노래들’입니다.
그런데 그 테힐림이 영어성경 제목인 Psalm으로 번역된 것은 70인역 성경 때문입니다.
70인역 성경의 번역가가 테힐림을 그리스어 ‘Psalmoi’로 번역했는데, 시편 57편의 제목과도 같은 단어인 ‘찬양의 노래’를 뜻하는 ‘mizmor’를 그렇게 번역한 결과죠.
과연 시편은 누가 썼을까요?
시편 90편 같은 경우에는 모세가 썼다고 밝혀놓고 있습니다.
또 73개의 시편은 다윗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시편 50편과 시편 73~83편까지는 아삽이 썼습니다.
시편 42편, 시편44~49, 시편84, 시편 87~88편은 고라 자손이 쓴 것으로 나와 있죠.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그리고 에즈라 족의 에단이 쓴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89편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편 중에는 B.C.1400년 경의 모세가 쓴 것도 있고습니다.
B.C.1000년 경의 다윗이 쓴 것도 있고, B.C. 950년 경의 솔로몬이 쓴 것도 있죠.
또한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레위인들로 하여금 찬양을 담당케 했는데 그때의 고라 자손의 후손인 찬양지휘자 아삽과 뮤지션을 맡은 에단이 쓴 시편도 있습니다.
그만큼 시편 150편의 시들은 B.C.1000년~B.C.450년 경까지의 시편들을 한데 모아서 엮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이와 같은 시편 150편들은 모세오경의 다섯권처럼 다섯 권의 책으로 시편을 분류합니다.
제1권은 제1편~41편까지로 개인적인 야훼의 경험을 담고 있는 책으로 보죠.
제2권은 시편42~72편까지로 엘로힘 곧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험한 책으로 묶습니다.
제3권은 시편73~89편까지로 어두움에 관한 책 곧 고통과 비탄과 탄식을 담고 있는 책으로 분류하죠.
제4권은 시편90~106편까지로 왕에 관한 책으로 분류합니다.
마지막 제5권은 시편107~150편까지로 찬양에 관한 책으로 묶죠.
(전개)오늘 읽은 시편 40편은 시편의 다섯권의 책 가운데 제 1권에 속한 시편입니다.
제 1권은 보통 다윗이 개인적인 체험을 한 가운데 쓴 시편으로 알려져 있죠.
오늘 본문의 표제를 봐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돼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시를 다윗이 썼고, 찬양대를 따라 함께 부른 노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다윗이 이 시편을 썼을까요?
2절에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셨다는 기록을 봐서 두 가지 상황을 겪은 뒤에 쓴 시로 추정을 하죠.
첫 번째 상황은 사울 왕으로부터 10년간 도망자 신세를 겪은 20대 시절의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 밑에 들어가려고 한 때로 보죠.
다윗은 그 시기에 유다 광야를 전전긍긍하다 그때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보면서 그렇게 말하죠.
‘왕이시여. 저 자는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쓰러트린 다윗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런 자를 왕의 수하에 들이려 하십니까?’
‘만일 저 자를 우리 장수들과 함께 하게 한다면 저 자가 언제 변심을 해서 우리의 적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자 다윗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대문짝에 머리를 쥐어박으며 침을 질질 흘리며 미첸 체를 하죠.
그때 가드 왕 아기스는 ‘어찌 저런 미친 자를 내 집에 들이려 하는 것인가? 당장 내 쫓으라’하고 말하죠.
그때 비로소 다윗은 목숨을 부지한 채 또 다른 유다 광야로 도망을 쳐 목숨을 부지하게 되죠.
어쩌면 그때가 절체절명의 웅덩이와 깊은 수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위기의 웅덩이와 수렁에거 건져주신 분이란 사실입니다.
물론 또 다른 시기도 있습니다.
다윗이 30대 시절에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왕이 되었다가 7년만에 여부스 성읍을 점령하고 40대에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죠.
그 후 50대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고 어느 거도 꺼릴 게 없는 유아독존의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평안하고 안전한 전성기였죠.
하지만 그때 욕망의 늪에 빠져 한 아내를 탐하고 그 아내의 남편을 죽게 하는 살인죄를 저질렀고 안식일이면 제를 드리는 뻔뻔한 외식주의자로 살았죠.
그때 나단 선지자가 그 죄를 지적하자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무릎을 꿇었고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회개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죄는 용서하셨지만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셔서 그것이 심은 데로 거두는 성경의 이치임을 보여주셨죠.
이복 형이 이복 여동생을 범하고 그 일로 이복 여동생의 오빠가 그 이복형을 죽이고, 2년간 외가로 숨어살다가 다시 다윗을 보죠.
하지만 다윗은 그 2년 동안 아들의 얼굴을 외면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4년만에 그 아들 압살롬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다위을 죽이겠다고 창을 들고 왕궁으로 쳐들어오죠.
어쩌면 바로 그때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처한 다윗의 모습이지 않나 싶은 것이죠.
그때 신발로 신지 못한 채 왕궁으로 빠져나간 다윗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긍휼히 여기사 다시금 왕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본문)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다윗이 본문의 시편 40편을 쓰지 않았나 하고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가 막힐 웅덩이와 인생의 수렁에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 쓴 시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1절을 통해 다윗이 깊이 읊조리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원해)‘기다리다’는 히브리어 ‘카바’(קָוָה)는 ‘기다리다’(to wait) ‘갈망하다’(look for) ‘소망하다’(hope)는 뜻입니다.
바로 이 ‘카바’라는 단어에서 ‘소망’을 뜻하는 ‘티크바’(תִּקְוָה)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읍을 점령할 때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죠.
나중에 그 성읍을 점령할 때 기생 라합의 집 식구들은 모두 구원해주겠다는 표식으로 ‘붉은줄’을 내려좋죠.
바로 기생 라합의 '붉은 줄'이 티크바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기다리다’는 것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라합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고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하실 그 역사를 믿고 소망하며 바라고 기다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도망자로 살던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 밑에 들어가려 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하며 미친 체를 한 것도 그런 경우죠.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고 창칼을 들고 쳐들어올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맨발로 도망칠 때도 그렇죠.
자신의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며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뿐이죠.
(원성)그것은 아이를 낳지 못해 설움을 받았던 한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지만 나중에는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했죠.
그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태의 문을 열어주셔야 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며 간절히 기다렸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무엘을 낳게 하시자 감사의 제사를 드렸죠.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체포당한 예수님은 밤부터 새벽까지 다섯 번의 법정에서 수모를 당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는 로마 병정들에게 온갖 조롱을 당하셨죠.
그리고 그 십자가 위에 남긴 7마디 중에 “엘리 엘리 라마사박 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외치신 주님이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자 하나님으로서 천군천사를 동원해 그 모든 죽음을 무산시킬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죽음을 받아들이며 기다렸습니다.
그 고통의 죽음에 처했을 때 모두가 끝난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흘째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죠.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리신 주님의 모습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뭔가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실 주님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은혜를 베푼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중국의 문화혁명 시절에 모두가 숙청을 당하고 모든 사회와 가족관계가 뒤틀리던 그때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다윗이 아기스 밑에 들어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아들 압살롬이 창칼을 들고 쳐들어올 때 무얼 할 수 있었겠느냐?”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 설움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다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하던 그때도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외칠 때 아무런 응답이 없는 하나님을 향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라며 기도하는 것밖에 있지 않았더냐?”
“그때 하나님께서는 문화혁명도 다윗의 죽을 고비도 한나의 자식 문제도 예수님의 죽음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해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무언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지 않더냐?”
“너의 힘과 능력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지 않더냐?”
“부부지간에도 부모자식 사이에도, 직장의 동료관계에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부분들이 있지 않더냐?”
“교회의 성도가 주님의 성품을 좇아 신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라는 그 부분들도 있지 않더냐?”
“속을 썩이는 자식이 한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고비 앞에 무척이나 힘들어 하는 그런 부분도 있지 않더냐?”
“너의 힘으로 도울 수도 없고 너의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풀 수 없는 그 문제 앞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다윗처럼 한나처럼 예수님처럼 묵묵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바라고 기도하는 것 아니겠느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님이라면 그 분이 정하신 날에 분명코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기다렸으면 좋겠구나.”
(찬양)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젼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예화)가자지구에 거주하는 하마스 무장 단체가 이스라엘의 안식일날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2년간 준비했다는 사실 앞에 미국의 CIA도 이스라엘 정부도 전혀 예측을 못했죠.
완전 허를 찌른 이스라엘은 곧바로 반격을 시도했는데 엄청난 폭격을 가자지구에 퍼부었습니다.
그 사태와 관련해 미국은 핵추진 항공모함 전단 제럴드 포드를 급파했습니다.
이에 대해 푸틴과 중국이 비난을 퍼붓고 있고, 미국과 영국등 이스라엘 우호 국가들은 연일 하마스에 맹비난하죠.
만약 이번 전쟁이 이스라엘 이스람 세력간의 진영전쟁으로 번지면 1973년 발발한 ‘욤키푸르 전쟁’ 곧 ‘제4차 중동 전쟁’에 이어 제5차 중동전쟁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고 말을 하죠.
이런 틈을 타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더 공격한다면, 만약 중국이 대만을 공격한다면,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3차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겠죠.
실은 이것이 성경에 예언된 세계종말의 때요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게 하는 일들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이 영원할 것 같고 나도 영원히 이 세상의 존재할 것 같지만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은 분명이 다가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열처녀의 비유를 생각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다들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는데 신랑이 더디 오니까 졸며 자는 것이었죠.
그런데 밤 중에 신랑이 왔다고 소리치는데 다섯 처녀는 등불을 밝히며 맞이하지만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이 없어서 등불을 밝히지 못하죠.
(깨달음)그 비유를 들려주신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25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그 등불이 어떤 등불이냐, 그 등불의 기름이 성령이나 말씀이나 인간의 행위냐, 하는 것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는 것’ 바로 그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모습이라는 것이죠.
내가 어떤 일을 하든, 내가 어떤 위치에 있든,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거죠.
그렇게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주님께서 천국에 입성케 하시는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적용)물론 주님의 재림을 잊어버리게 하는 요인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사명을 잊으면 게으르고 나태해질 수밖에 없죠.
이 세상의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신랑되신 주님을 기다리는 일과 무관하게 살게 됩니다.
그만큼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자들만 주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이죠.
그 기다림의 끝에는 그 어떤 눈물도 고통도 괴로움도 탄식도 없는 영원한 기쁨의 나라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이 세상이 아무리 좋은 것 같아도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앞으로도 더 큰 전쟁이 벌이질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그 속에는 경쟁과 괴로움과 탄식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모두가 죄로 어룩져 있기에 이런 세상을 우리가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저는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주님께서 언제 어떤 환경 속에 오실지라도 깨어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이 세상의 것에 제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고, 저를 이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잊지 않고 살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제5차 중동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해도, 제 개인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 모든 일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인 줄 믿습니다.”
(찬양)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인생의 수렁에 빠졌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뿐이었습니다.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 설움에 복받쳐 말도 나오지 않는 상태속에서 기도할때도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까,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외칠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 기다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기다림의 끝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두 역사하시고 응답해주시고 부활케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온갖 죄와 탐욕으로 죽고 죽이는 이 세상이 전쟁으로 가득차 있어도 이 죽음의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주님의 재림이 임하도록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잊지 않고 깨어 기다리는 자에게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바라며 믿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기름을 준비하는 사명자들에게 주님께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오시더라도 우리를 기쁨으로 맞아주실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런 은총이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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