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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모세가 죽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면 하면 집과 전답이 준비돼있는 건 아니었죠.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과 맞서 힘겨운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러니 여호수아로서는 얼마나 두렵고 걱정스러울지 우리는 환히 알 수 있죠.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게 여호수아 1장 6-9절에 나와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강하라’는 히브리어가 ‘하자크’(חָזַק)인데 ‘잡다’(hold) ‘붙잡다’ ‘꼭꼭 묵는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 스스로는 강하게 할 수도 없고 스스로 담대할 수도 없다는 것이죠.
그들에게는 군사력도 무기력도 전술과 전법도 따로 없는 상태였으니 말이죠.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께 너희들을 붙들어 매야 가나안 전투에서 힘을 내 싸울 수 있다는 뜻이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게 모세에게 명한 율례와 법도로 너의 심령을 동여매라는 것이었죠.
너희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들어 매야만 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깨달음)그것은 당장의 정복에만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닙니다.
그 후에 땅을 분배하여 정착하여 살 것도 내다보며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키지 않으면 순식간에 가나안의 풍요와 문화에 빠져들기 때문이죠.
그만큼 여호수아가 싸워야 하는 전쟁은 겉으로 드러난 전쟁뿐만 아니라 그 땅의 우상과 죄악된 문화도 싸워야 하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들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여매는 길 뿐이었죠.
(적용)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우상의 문화를 우리 힘이나 능력으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힘으로 이기려고 하는 순간 더더욱 그 늪에 빠져들고 말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이 세상의 죄와 타락한 문화와 온갖 우상들을 이길 힘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는 거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다윗의 인생은 10년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배다른 8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난 다윗은 10대 시절에 집안에 있던 형들과 달리 외톨이로서 양치기하며 살았죠.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주어진 일에 성실을 다하며 자립심을 키워나갔습니다.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자신이 맡은 양떼를 목숨을 다해 지키는 일이 그것이었죠.
그 덕에 물맷돌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다윗의 자립심을 키우는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20대 초반에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 이스라엘에 군사가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는데 아버지는 다윗에게 전쟁터의 형들 안부를 묻고 오게 했죠.
그때 전장터를 둘러본 다윗은 육척장신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업신여기자 물맷돌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그를 죽였죠.
그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면서 백성들이 다윗을 치켜세웠죠.
그러자 시기심과 질투심에 차오른 사울은 자기 신하요 부마(駙馬)인 다윗을 죽이려고 3천명의 특공대를 보냈죠.
그때부터 다윗은 10년간 도망자 삶을 살았죠.
30대의 다윗은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 죽게 된 사울 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왕이 될 뿐이었죠.
그때부터 이스라엘 온 지파의 왕이 되고자 고군분투했는데 7년에 걸쳐 난공불락의 성읍 여부스를 점령했죠.
그 성읍을 점령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명명했고 그곳에서 온 이스라엘 지파의 왕으로 추대받았죠.
그러니 40대의 다윗은 어떤 인생을 살아겠습니까?
더 많은 이방 나라 지역을 점령코자 전쟁을 벌였죠.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케 해 주셨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죠.
50대에 접어든 다윗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한 시기에 한순간에 밀려드는 욕망의 늪에 빠져 죄의 사슬에 걸려들었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고 그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 적의 칼에 죽게 만든 살인죄를 범했죠.
안식일이 되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모든 십계명을 줄줄이 범하며 외식적인 인간이 되었죠.
그러나 다윗이 훌륭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당시 왕은 모든 것을 칼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었죠.
그러니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악을 지적해도 쥐도새도 모르게 그를 죽이면 끝나는 일이었죠.
하지만 다윗은 나단 선지자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며 무릎을 꿇었고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회개했죠.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죄악 중에서도 어여쁘게 보신 것이었죠.
물론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60대의 다윗에게 죄의 후유증을 겪게 했습니다.
그의 아들이 이복여동생을 강간하고 그 여동생의 오빠가 이복형을 죽인 왕자의 난을 벌였죠.
그 일을 저지른 압살롬이 아버지의 낯을 피해 외가에 몸을 피했다가 2년만에 돌아와 4년뒤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왕궁으로 향하죠.
그때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왕궁을 빠져나갔는데, 다음날 압살롬은 다윗의 군사와 맞서다 나뭇가지에 머리칼락이 걸려 화살을 맞고 죽었죠.
그때 다윗은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하면서 그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죠.
70이 된 다윗은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자 신하들이 동정녀 수넴 여인 아비삭을 몸종으로 넣어줬죠.
하지만 젊은 날 겪은 죄의 후유증 때문에 다윗은 그녀와 어떤 관계도 갖지 않으면서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70의 어느 날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거둬가신다는 것을 알고 지금 솔로몬을 불러 유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다윗이 지나온 자신의 인생길을 돌아볼 때 파란만장한 삶이지 않았습니까?
그런 삶을 돌아볼 때 다윗이 뭐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 땅에 태어날 수도, 왕이 될 수도,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도, 회개의 기회를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하고 고백을 했겠죠.
(전개)그러면서 오늘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솔로몬에게 무슨 유언을 남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 첫마디는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간다”하는 것이었죠.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거둬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간다’는 히브리어 ‘할라크’는 ‘걷는다’ ‘동행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좇아간다’는 뜻이었죠.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30년간 하나님과 ‘동행한 것’도,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한 것’도 같은 이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비유를 말씀하실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헤롯 대왕이 너를 죽이려고 할 때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좇아간다’고 말했죠.
바울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모두가 말릴 때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간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 것처럼 다윗도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그 첫마디를 통해 강조한 게 그것이었습니다.
‘너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좇아 살 때 너와 네 후손이 은총을 덧입은 삶을 살게 될 거야’하고 말이죠.
(깨달음)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내 욕심대로 내 생각대로만 살면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부족하고 연약함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부르신 사명을 좇아 살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줄 믿습니다.
(전개2)다윗이 두 번째로 강조한 유언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하는 것이었죠.
‘힘써’라는 히브리어 ‘하자크’(חָזַק)는 ‘잡다’(hold) ‘붙잡다’ ‘안전하게 묶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아. 너는 너 자신을 하나님께 동여매야 네가 순탄한 정치를 펼쳐나갈 수 있단다’하는 뜻이죠.
‘19명의 아들들 중에 10번째인 네가 왕이 되었으니 오직 너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매야 한다’고 말이죠.
그것은 모세가 죽었을 때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강조한 것도 같은 뜻이라고 서두에서 말씀했죠.
‘여호수아야. 이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하고 한다면 오직 하나님께 동여매야 가능하단다.’
‘이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나눠준 이후에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으려면 오직 하나님께 동여매야만 가능할 수 있어.’하고 말이죠.
다윗이 솔로몬에게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대장부가 되라’는 히브리어 원문은 ‘이쉬’(אִישׁ)곧 ‘사람’(man)이라고 했습니다.
‘대장부가 되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피조물임을 잊지 말라’ ‘하나님 앞에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라는’는 것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이끄심 속에서 순종하여 살라’는 것이었죠.
(깨달음)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도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 스스로를 맹신하거나 과시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여 사는 걸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니 말이죠.
그것이 형통케 되는 삶이요 복된 인생인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세 번째 내용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원해)여기에서 다윗이 강조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행하라는 것이죠.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호와의 명령’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동의반복어처럼 ‘하나님의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말하는 것이죠.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모든 말씀 모든 계명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고별설교를 할 때도 강조한 바였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장로와 두령들 앞에서 고별설교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사무엘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누누이 강조한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이 형통케 되는 비결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은 ‘지키라’는 말씀이 맨 앞에 나옵니다.
‘지키라’는 말은 히브리어 ‘샤마르’(שָׁמַר)인데 ‘지키다’(to keep) ‘방어하다’(guard) ‘주의를 기울이다’(give heed) ‘간직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을 때 에덴동산 앞에 내쫓아 천사들에게 불칼로 생명나무 길을 ‘지키도록’(창3:24) 할 때 쓰인 단어가 그것이죠.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양떼를 ‘지키다’(창30:31)고 할 때도 그 단어를 썼습니다.
그리고 99세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면 너와 네 후손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켜라’(창17:10) 할 때도 쓰인 단어죠.
요셉이 해와 달 열한 별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형들에게 이야기할 때 형들은 시기했지만 아버지는 마음에 ‘간직하다’(창37:11) 할 때 쓰인 단어죠.
그만큼 ‘지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심령을 방어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실천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역본)현대인의 성경은 히브리어 원문에 가깝게 잘 번역을 해 주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의 모든 법과 규정을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다.”
(깨달음)그렇기에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면서 강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들아. 네가 왕위에 올라 앞으로 나라를 이끌 때 네 네 심령을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동여매야 한다.’
‘지금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평강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부강한 나라지 않느냐?’
‘그러나 풍요와 번영 속에서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한순간 타락하여 무너지는 게 내 삶이지 않았더냐?’
‘그러니 네가 새로 이끌 나라는 오직 말씀을 간직해 지키는 삶을 살아야 네가 형통케 될 거야.’하는 뜻이었죠.
(원성)훗날 솔로몬도 아버지의 유언이 옳았다는 것을 알고서 잠언 4장 23절에 고백을 하죠.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16장 32절에서는 또 그렇게 밝혀주고 있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가 평안하고 안전한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켜 실천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면서 명령한 게 무엇이더냐?”
“다윗이 하나님의 부름 앞에 솔로몬을 앉혀놓고 유언하면서 강조한 게 무엇이더냐?”
“너와 네 후손이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며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 형통하는 길이라고 강조하지 않더냐?”
“그것만이 세상의 풍요로움 속에서도 타락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는 길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의 네 형편과 처지 속에서 네가 무엇을 굳게 간직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의 타락한 문화를 네가 간직하려고 하는지 아니면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말씀을 굳게 간직하며 순종하고 하는지 말이다.”
“오직 너와 네 후손이 형통할 수 있는 길은 네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동여매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길이지 않겠느냐?”
(찬양)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 없네
(예화)엊그제 목요일날 동유럽성지순례 가는 분들 앞에서 얀 후스에 대해 준비한 강의를 했습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1571년의 마르틴 루터입니다.
그 전까지 잠잠했던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어올린 때가 그때였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 루터보다 100년 앞서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이가 체코 프라하의 얀 후스라는 인물이죠.
가난한 시골 농부의 아버지 밑에 태어난 얀 후스는 프라하대학에 진학해 교수에다 총장까지 되죠.
그때 영국의 위클리프의 신학사상 책을 제롬에게 받아 그가 직접 체코어로 자필 번역을 하면서 배우게 되죠.
그 후 가톨릭의 사제서품을 받은 얀후스는 베들레헴채플에서 체코어로 설교를 했고 체코어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때부터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의 부당함을 알렸고 성찬식 때 떡만 주던 관행에서 벗어나 포도주도 나누는 이종성찬을 시행했죠.
그러면서 교황의 절대권위와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죄로 46살에 독일의 콘스탄츠공의회에 불려가 끔찍한 화형을 당했죠.
그때 그가 죽으면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태워 죽인다. 그러나 100년 후에는 태울 수도 없고 삶을 수도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평소에 스스로를 거위로 말한 얀 후는 그날 죽음을 당했지만 100년 후에 백조로 부활했습니다.
그바 바로 루터를 말하는 것이고,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을 예언한 말이었죠.
그런데 그 화형의 불길 속에서 타들어간 얀 후스의 소망이 모두 사라져버렸을까요?
그가 화형을 당하자 그 후예들이 후스파를 만들어 가톨릭세력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 전투를 치르면서 타보르란 곳에 지하땅굴을 팠는데 일명 카타콤을 만들어 믿음을 지킨 것이죠.
하지만 후스파 사이에 균열이 생겨 결국 급진 후스파가 패망했습니다.
그때 살아남은 이들이 모라비아인들과 체코의 북쪽이자 독일의 서쪽 끝인 헤른후트로 숨어들어갔죠.
그 헤른후트 땅은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땅인데 그가 그들을 품고 함께 경건훈련을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라비안교도의 출발점이었는데 왜 모라비안 교도가 중요한 것일까요?
그 모라비안교도로부터 개신교 최초의 말씀묵상집 ‘로중’이 발간됐는데 지금도 전 세계 50여곳에 150만부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그 모라비안교도로부터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가 파송되었는데 그때 파송된 젊은 청년들은 노예가 될지라도 주님의 부르신 사명에 순종할 것을 맹세하며 떠났습니다.
놀라운 것은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성결교의 신학의 모체가 된 존 웨슬리도 모라비안교도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죠.
대서양 한복판에서 배가 풍랑에 휩싸일 때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이들이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죠.
후에 영국에 돌아간 웨슬리는 모라비안교도들을 초청해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때 올더스케이트란 곳에서 모임을 가질 때 그곳에서 모라비안 교도 한 사람이 로마서 서문을 읽을 때 웨슬리는 성령충만함을 받는 제2의 회심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사건은 후에 영국의 대부흥운동으로 그리고 영국의 대부흥운동은 미국의 대각성운동으로 번졌습니다.
그리고 그 대각성운동은 훗날 태평양을 건너 ‘숨은 은자의 나라, 조선 땅’에 선교사를 보내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들이 실은 얀 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비록 화형장에서 불에 타 죽었지만 그의 신앙과 믿음은 지금까지도 로중과 세계선교를 통해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당시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의 청교도들도 존재감은 1도 없는 모라비안교도을 통해 신앙의 불을 지핀 것이었습니다.
(원성)이사야 40장 8절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깨달음)이 세상의 타락한 우상과 문화는 언젠가 풀처럼 꽃처럼 마르고 시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변함없는 말씀만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도 영원히 시들지 않고 살아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도 타락한 이 세상의 문화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를 동여매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지킨 얀후스를 통해 100년 뒤 루터는 물론이고 300년 후의 존 웨슬리까지 그리고 은자의 나라 조선땅에까지 믿음의 열매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그 시대의 타락한 교황과 가톨릭 세력 앞에 말씀을 지키는 일로 얀 후스가 화형을 당했네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길래 그가 그토록 불길 속에 타들어가면서 그 말씀을 지키고자 했을까요?”
“그가 말씀을 굳게 지킨 일로 불길에 죽었지만 100년 후 루터에게 300년 뒤 웨슬리에게 그리고 조선땅에까지 복음이 살아있게 되었어요.”
“주님. 제가 말씀을 동여매고 굳게 지킨다고 해서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가 있을까요?”
“하지만 주님의 살아계신 말씀을 굳게 지킬 때 주님께서는 누군가의 심령에 불을 지필 줄 믿어요.”
“지금은 열매맺는 게 없을지라도 100년 뒤 300년 뒤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하실 줄 믿어요.”
“주님. 이 세상의 우상과 타락한 문화에 흔들리지 말고 말씀을 굳게 지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그것이 저와 제 후대가 주님 앞에서 형통케 되는 은혜를 덧입고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찬양)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은 능치 못하실 일 전혀없네
우리의 모든 간구도 우리의 모든 생각도 우리의 모든 꿈과 모든 소망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괴로움 바꿀 수 있네
불가능한 일 행하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니 그를 이길 자 아무도 없네
주의 말씀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 던져 오늘 그가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것 보라
주의 말씀 의지하여 믿음으로 그물 던져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 없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은 뒤 여호수에게 강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키며 살라고 명령했습니다.
모세의 죽음 이후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서 형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말씀을 지키는 길밖에 없기 때문이죠.
다윗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솔로몬에게 오직 하나님께 동여매여 피조물다운 삶을 살되 말씀을 굳게 지키라고 유언했습니다.
부요하고 안정될수록 타락하기 쉬운 법인데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라를 이끌 길은 말씀을 굳게 지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패한 가톨릭 세력과 맞서 나가다 화형당한 얀 후스도 역사에 묻혀버리는 것 같았지만 지금도 말씀과 함께 살아역사하고 있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굳게 지키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 알의 밀알로 역사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해가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청교들에 비해 존재감은 1도 없는 얀후스의 후예들인 모라비안교도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역사하셨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변한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지킬 때 주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후대를 형통케 하시는 복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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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왕상2:2b)_2023년10월1일주일핵심말씀 (0) | 2023.09.30 |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왕상2:1-4) (1) | 2023.09.30 |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왕상2:1-4)_2023년9월29일 주일설교문 (1) | 2023.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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