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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극작가인 샬롯 키틀리(Charlotte Kitley)가 죽기 직전 남긴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대장암 4기 진단을 받고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두 번의 수술을 받은 그녀였죠.
25차례의 방사선 치료와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을 견뎌냈지만 끝내 죽음을 피할 길이 없는 그녀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주지 않네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소리 지르는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 봤어요.
기본적 의학요법은 물론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 봤습니다.
침도 맞았지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 놓고 나니,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아이들 껴안아 주고, 뽀뽀해 줄 수 있다는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는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 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 아이 머리 땋아 줘야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버린 레고(Lego)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 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더 보너스로 얻은 덕에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주는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분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부 비만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 그거 한번 가져 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이요?
그거 한번 뽑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도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꼭 붙드세요.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36세의 젊은 나이에 대장암 4기로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안타까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커가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죠.
누가 자신처럼 돌봐줄까, 하는 그런 걱정 말입니다.
그것은 자식보다 앞서 죽음을 맞이하는 모든 부모들의 심정이 똑같지 않겠습니까?
그 자식이 60이나 70이 돼도 부모는 자기 죽음 앞에 자식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죽음을 맞이하니 말이죠.
더욱이 그 자식이 아프거나 병치레를 하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적용)성경에도 자식과 후손과 민족을 모아 놓고 유언한 경우가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한 게 그것입니다.
신명기 31장에서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출애굽 2세대를 불러 놓고 유언을 한 일이 있죠.
여호수아 23장에서는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매듭지은 여호수아가 장로와 두령과 재판장과 군사를 불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유언한 일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2장에서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을 불러모아 놓고 여호와 하나님을 진실되게 섬기며 악에서 떠나라고 유언한 일이 있죠.
신약성경에도 유언한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을 통해 제자들에게 고별설교한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별설교를 통해 유언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승천하면 성령님이 오실 터인데 그 성령님이 너희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이죠.
너희들이 참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면 극상품 포도나무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이라고 말이죠.
그 성령님께서 앞으로 이룰 초대교회와 오고 오는 우주적인 교회를 진리와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10527332
(역배)다윗의 인생은 10년 단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배다른 8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난 다윗은 10대 시절에 집안에 있던 형들과 달리 외톨이로서 양치기하면서 살아야 했죠.
그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주어진 일에 성실을 다하며 자립심을 키워나갔습니다.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자신이 맡은 양떼를 목숨을 다해 지키는 일이 그것이었죠.
그 덕에 물맷돌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다윗의 자립심을 키우는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20대 초반에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 무렵에 블레셋과 전쟁을 벌였는데 아버지는 다윗에게 전장터에 나가 있는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오도록 명령했죠.
그때 전장터를 둘러본 다윗은 육척장신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신여긴 모습 앞에 물맷돌을 가지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그를 쓰러트리고 죽였죠.
그때부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라면서 백성들이 다윗을 치켜세워주자 사울은 시기와 질투심이 들끓었죠.
그러자 사울은 자신의 신하요 자신의 부마(駙馬) 곧 자신의 사위인 다윗을 죽이겠다고 3천명의 특공대를 보냈는데 다윗은 그로부터 10년간 도망자 삶을 살았죠.
30대의 다윗은 블레셋과 전투를 벌이다 죽게 된 사울 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의 왕이 될 뿐이었죠.
그때부터 다윗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왕이 되고자 고군분투했는데 그때까지도 점령하지 못한 난공불락의 성읍 여부스를 7년에 걸쳐 점령했습니다.
바로 그 성읍을 점령한 이후에 온 이스라엘 지파의 명실상부한 왕으로 추대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40대의 다윗은 어떤 인생을 살아겠습니까?
더 많은 이방 나라 지역을 점령코자 전쟁을 벌였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셨고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50대에 접어든 다윗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한 그 시기에 다윗은 한순간에 밀려드는 욕망의 늪에 빠져 죄의 사슬에 걸려들고 말았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전쟁터 맨 앞에 보내 적의 칼에 죽게 만들었죠.
그러면서 안식일이 되면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를 드렸지만 그 모든 십계명의 계명들을 모두 범한 외식적인 인간이 되고 말았죠.
그러나 다윗이 훌륭한 것은 그런 자신의 죄악을 지적한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 무릎을 꿇은 점이고 눈물로 침상을 적실정도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모습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임을 만천하에 알게 하기 위해 60대에 접어든 다윗에게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의 아들이 이복여동생을 강간하고 그 여동생의 오빠가 이복 형을 죽인 왕자의 난이 발생하죠.
그 일을 저지른 압살롬이 아버지의 낯을 피해 외가에 몸을 피해 있다가 2년만에 다시 만났는데 4년뒤에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왕궁으로 향하죠.
그때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왕궁을 빠져나가 도망쳤는데 다음날 압살롬은 다윗의 군사와 맞서 싸울 때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려 그만 화살을 맞아 죽고 말죠.
그때 다윗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아들 압살롬을 향해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하면서 그 아들을 가슴에 묻게 되었죠.
그 뒤 70이 될 무렵 이불을 덮어도 몸이 따뜻하지 않는 다윗을 위해 신하들이 동정녀 수넴 여인 아비삭을 몸종으로 넣어줬죠.
하지만 젊은 날 죄의 후유증을 겪은 다윗은 그녀와 그 어떤 관계도 갖지 않으면서 마지막 하나님의 부르심을 준비했죠.
급기야 70세의 어느날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거둬가신다는 것을 알게 된 다윗이었고, 바로 그 무렵에 아들 솔로몬을 불러 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다윗의 인생도 파란만장한 삶이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은 지난 날의 삶을 돌아볼 때 다윗은 자기 인생을 되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이 땅에 태어날 수도, 왕이 될 수도,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도, 회개의 기회를 얻을 수도 없었습니다’하고 말이죠.
(깨달음)그런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신에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솔로몬에게 무슨 유언을 남겼습니까?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다윗이 맨 먼저 강조한 유언의 첫마디는 그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간다”하는 것이었죠.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나또한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거둬가실 때가 됐다’하는 뜻이었죠.
다만 ‘간다’는 히브리어 ‘할라크’는 ‘걷는다’ ‘동행한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간다’는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 3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단어도,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단어도 야곱이 20년간 이방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었죠.
그 구약의 할라크가 70인역에서 ‘포레오마이’(πορεύομαι)로 번역됐는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좇아 ‘간다’(눅13:13)고 할때도, 바울도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에 ‘간다’(행20:22)고 할때도 그 단어를 썼죠.
그만큼 다윗의 인생은 다윗 스스로 선택하여 산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살아온 인생이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이제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솔로몬에게 유언하는 첫마디의 강조점이 무엇입니까?
‘너도 무작정 태어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태어난 것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이죠.
‘너도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하나님과 동행하여 살면 네 인생의 길이 순탄할 거야’하는 것이죠.
‘너도 나처럼 한 순간 욕망의 늪에 빠지면 내가 밟은 전철을 밟을 수 있으니 항상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놓치지 말고 살라’는 뜻이죠.
(적용)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이 땅의 인생이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좇아 사는 길임을 잊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순탄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의 길을 놓쳐 버릴 때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늘 경계하고 늘 붙들어야 할 삶은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좇아 사는 길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을 때 언제 어느때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거둬가시더라도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는 것이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두 번째 유언의 내용으로 본문 2절 하반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원해) 여기에 ‘힘써’하는 히브리어 원어 ‘하자크’(חָזַק)는 ‘잡다’(hold) ‘단단히 붙잡다’ ‘안전하게 묶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힘써’하는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을 단단히 붙잡으라’하는 말입니다.
‘그 분께 너 자신을 동여매야 네가 힘을 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19명의 아들들 가운데 10번째인 너를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워주셨으니 오직 하나님을 붙들어매야 힘을 낼 수 있다’하는 뜻이죠.
이것은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강하고 담대하라’ 그 단어가 ‘하자크’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야 할 여호수아에게 오직 ‘너 자신을 하나님께 동여매야 담대할 수 있다’하는 뜻으로 말씀한 것이죠.
(원해2)그리고 “대장부가 되라” 이 말씀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쉬’(אִישׁ)로 ‘사람’(man)이란 뜻입니다.
‘대장부가 되라’는 말의 원뜻은 ‘사람다운 사람임을 하나님 앞에 보여줘라’하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되라’하는 뜻이죠.
다윗이 그렇게 유언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사람임을 망각하는 경우, 하나님 앞에 피조물임을 잊고 산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죠.
창세기 4장에 나오는 족보를 보면 야발도 유발도 두발가인도 자기 이름값을 떨치며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 사람다운 피조물로 살지 못했죠.
그러니 그 족보는 죽음을 위한 족보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에노스 이후의 에녹 므두셀라 노아의 족보는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갖춘 피조물이었죠.
그 족보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실은 영생의 족보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말씀은 ‘너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매야 하나님 앞에 바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이죠.
그래야만 여러 형제 앞에서도, 여러 백성 앞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신 사명을 잃지 않고 참된 피조물로 살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야만 너와 네 후손이 죽음과 심판의 족보가 아니라 영생과 상급의 족보를 써 내려갈 수 있다는 말씀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붙들어매여 하나님앞에 사람다운 사람으로 사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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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음성)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36살의 젊은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알 수 있지 않느냐?”
“이 땅의 모든 부모는 자기 죽음을 앞두고 그 무엇보다도 자식의 앞날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아니겠느냐?”
“지금 다윗도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거두어가신다는 것을 알고 솔로몬에게 신신당부하며 유언하는 게 무엇이더냐?”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부르심을 좇아 살라는 것 아니더냐?”
“오직 하나님을 붙들어서 하나님 앞에 사람다운 사람의 삶을 살라는 것 아니더냐?”
“모든 사람이 자기 이름값을 내세우기며 살려고 하지만 너는 오직 하나님 앞에 참된 피조물임을 잊지 말고 살라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지금의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인생을 하나님께 동여매고 살고 있는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임을 잊지 않고 살고 있는지 말이다.”
“네가 네 힘으로만 살면 그 끝은 가인의 족보로 끝날 것이지만 하나님앞에 참된 인간으로 살면 에녹과 노아처럼 영원한 인생을 사는 것 아니겠느냐?”
“앞으로 남은 너의 인생을 오직 하나님께 동여매고 하나님의 피조물답게 참된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 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 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예화)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인 ‘심수관’ 씨가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자신이 어렸을 때 겪은 일을 들려줬다고 합니다.
그가 초등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그때 그의 아버지는 자신을 작업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물레 위에 고령토 진흙 한 덩어리를 놓고는 진흙 한가운데 바늘을 꽂았습니다.
그리고 물레를 돌리면서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하죠.
“이것을 보고 무얼 느끼느냐?”
“돌아가는 물레의 중심 속에 움직이지 않는 바늘이 보입니다.”
“잘 보았다. 돌아가는 물레의 움직이지 않는 중심, 앞으로 네가 추구해야 할 인생임을 기억해라.”
‘심수관’ 씨는 그 때 아버지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죠.
하지만 자신이 백발의 노인이 되고 나서 아버지가 하신 그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비록 일본 땅에 와서 일본말을 하고 살지만 조선 도공의 얼을 이어받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는 것 말이죠.
(깨달음)어떻습니까?
지금도 이 세상의 물레는 현란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신앙인의 정체성은 움직이지 않는 바늘처럼 흔들리지 않고 지켜나가길 주님은 원하시는 것이죠.
(적용)그것은 노아가 홍수심판을 맞이할때 방주를 짓는 은혜를 덧입은 것도 마찬가지죠.
실은 노아가 할아버지의 죽음을 염두에 두며 자신에게 부여한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살았던 거죠.
그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란 ‘사람’을 뜻하는 ‘마트’와 ‘창’ 또는 ‘무기’를 뜻하는 ‘쉘라흐’의 합성어로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뜻이죠.
고대근동에서 각동네마다 창을 들고 수호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죽으면 그 동네는 끝이 나죠.
무드셀라도 그런 시대적인 사명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에녹이 하나님의 계시를 좇아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죠.
그러니 노아도 할아버지 무드셀라가 죽는 날이 곧 홍수로 심판받는 때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참된 인간으로 살고자 한 것이죠.
그만큼 당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의 물레에 현란하게 춤추며 돌아간다 할지라도 노아는 움직이지 않는 바늘처럼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어매여 산 것이었습니다.
(주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저의 남은 인생 동안 흔들리지 않고 살게 해 주세요.”
“이 세상의 물레가 아무리 현란하게 춤을 추며 돌고 돈다 할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바늘처럼 하나님 중심을 붙잡고 살게 해 주세요.”
“에녹이 하나님의 계시속에 아들을 ‘창을 던지는 자’ 무드셀라로 지었고 노아도 할아지의 죽음이 곧 홍수심판임을 알고 오직하나님께 매여 살았습니다.”
“주님. 저도 이 세상의 현란한 물레소리에 휘둘리지 않게 하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바늘처럼 하나님께 매여 참된 피조물로 살게 해 주세요.”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한 바가 그것이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저에게 하신 주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찬양)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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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모든 부모는 자기 죽음을 앞두고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며 유언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요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유언한 바가 그것이었습니다.
본문의 다윗도 솔로몬의 남은 인생을 바라보며 부르심의 사명을 좇아 살라는 것도, 하나님께 동여매고 참된 사람으로 살라고 유언한 것도 마찬가지죠.
이 세상의 물레방아가 아무리 현란한 소리를 내고 멋지게 돈다 할지라도 움직이지 않는 바늘처럼 주님께 동여매며 참된 피조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와 후손에게 하늘의 평강과 은혜의 복을 허락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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