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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토마스 칼라일이 쓴 〈프랑스혁명사〉가 불후의 명작입니다.
그가 처음 쓴 원고를 들고 스튜어트 밀에게 한 번 봐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후에 스튜어트 밀이 칼라일에게 창백한 얼굴로 말을 합니다.
“글세. 우리집 하녀가 불을 때는데 당신 원고를 넣고 다 태워버렸어요”
지금처럼 컴퓨터에 입력하여 저장하는 시대가 아니니, 글로 쓴 원고를 다 태웠다면 학자로서 얼마나 낙담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길을 가는데 어떤 건물에 벽돌을 쌓는 분을 보게 됩니다.
그때 깨달은 게 있었죠.
“저렇게 한 장 한 장 다시 쌓을 수 있겠구나”
그래서 이전에 불탄 원고를 다 잊고서 3년에 걸쳐서 다시 원고를 썼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칼라일이 쓴 불후의 명작 〈프랑스혁명사〉가 된 것입니다.
칼라일의 인생 속에 기가막힐 웅덩이와 수렁이였지만 그 속에서 다시금 시작해 불후의 명작을 쓴 것이죠.
(성화)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랄 지방에서 우물을 파는데 계속 빼앗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축복을 경험한 곳이 브엘세바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데 그를 통해 불화를 경험하게 되죠.
그때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냈는데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장소가 바로 브엘세바입니다.
그녀의 인생에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을 만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었죠.
(깨달음)우리 인생에 하늘이 노랗게 변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올라가고 싶어도 오를 수 없는 미끄러지는 웅덩이에 처한 상황 말입니다.
진흙탕과 같은 웅덩이에 갇혀 있는 듯한 모습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가도 끝이 없는 미로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 말이죠.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겠습니까?
소리치고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이삭도 하갈도 그 사막 광야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더니 살려주신 것이었습니다.
(적용)우리도 이런 상황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노랗고 오를 수 없는 미끄럼틀 진흙탕 끝도 없는 미로를 돌고 도는 상황 말이죠.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분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시편의 히브리어 성경 이름은 ‘테힐림’(Tehillim)으로 ‘찬양의 노래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시편 150편 가운데에는 90편은 모세가 썼고, 73개의 시편은 다윗이, 또 시편 50편과 시편73~83편까지는 아삽이 썼죠.
시편 42편, 시편44~49, 시편84, 시편 87~88편은 고라 자손이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그리고 에즈라 족의 에단이 쓴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89편도 있습니다.
그런 점을 볼 때 시편은 B.C.1400년경의 모세나, B.C.1000년경의 다윗이, B.C. 950년경의 솔로몬이 쓴 것입니다.
더욱이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찬양 지휘자를 맡은 고라 자손의 후손 아삽과 뮤지션을 맡은 에단이 쓴 시편도 있죠.
그만큼 150편의 시들은 B.C.1000년~B.C.450년경까지의 시편들을 한데 모아서 엮은 것입니다.
그와 같은 시편 150편들은 모세오경의 다섯권처럼 다섯 권의 책으로 분류한다고 했습니다.
제1권은 제1편~41편까지로 개인적인 야훼의 경험을 담고 있는 책으로 봅니다.
제2권은 시편42~72편까지로 엘로힘 곧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험한 책으로 묶습니다.
제3권은 시편73~89편까지로 어두움에 관한 책 곧 고통과 비탄과 탄식을 담고 있는 책으로 분류하죠.
제4권은 시편90~106편까지로 왕에 관한 책으로 그리고 마지막 제5권은 시편107~150편까지로 찬양에 관한 책으로 묶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0편은 시편의 다섯권의 책 가운데 제1권에 속한 시편입니다.
제1권은 보통 개인적인 체험을 쓴 시편으로 다윗이 개인적인 체험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고백의 시로 알려져 있죠.
본문의 표제를 봐도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돼 있습니다.
이 시를 다윗이 썼고, 찬양대를 따라 함께 부른 노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이 시편을 썼다고 했습니까?
2주 전에 살펴본 것처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킨 때라고 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50대 시절로 나라가 평안하고 안전하던 때였는데 탐욕에 눈이 멀어 밧세바를 범했고 남편을 적의 칼에 죽게했죠.
그렇게 하고서도 안식일이 되면 제사를 드리는 뻔뻔한 외식주의자로 살았죠.
그때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하자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무릎을 꿇었고 눈물로 침상을 적실 정도로 회개했죠.
물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죄의 후유증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복형이 이복 여동생을 강간했는데 그 일로 이복 여동생 오빠 압살롬이 그 형을 죽이고 2년간 외가로 숨어살았죠.
그로부터 2년 만에 다시 왕궁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 다윗은 그런 압살롬을 보지 않았죠.
그로부터 4년간 압살롬의 온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은 뒤에 드디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다윗을 죽이겠다고 창칼을 겨누고 쳐들어오죠.
바로 그때가 죽음의 그늘이 깔린 때였는데 그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생명을 부지하고 왕궁으로 복귀하게 되죠.
그런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습니까?
아기스와 그 신하들이 다윗의 목전에서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 아들 압살롬이 군데를 일으켜 왕궁으로 쳐들어올 때,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 뿐이었죠.
그래서 다윗은 1절을 통해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하고 고백한 거죠.
(깨달음)우리말 ‘기다리다’는 히브리어 ‘카바’(קָוָה)는 ‘기다리다’(to wait) ‘갈망하다’(look for)는 뜻이라고 했죠.
이 ‘카바’라는 단어에서 ‘소망’을 뜻하는 ‘티크바’(תִּקְוָה)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읍을 점령할 때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주죠.
나중에 그 성읍을 점령할 때 기생 라합의 집 식구들은 모두 구원해주겠다는 표식으로 ‘붉은줄’을 내려좋죠.
바로 기생 라합의 ‘붉은 줄’이 티크바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기다리다’는 것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라합으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하고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고 기다린 것이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실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후처 브닌나에게 괴로움과 설움을 받던 한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태의 문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잠잠히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 뿐이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울면서 탄식하며 간절히 기도했는데 나중에는 울지도 탄식하지도 못할 지경에 처해 입술만 움직이며 기도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녀에게 태의 문을 열어주셨고 사무엘을 낳게 하시는 은총을 부어주셨죠.
그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라고 했습니다.
그 전날 밤부터 새벽녘까지 대제사장과 빌라도와 헤롯의 5번의 법정에 끌려다니며 모욕을 당한 예수님이셨죠.
그리고 그날 오전 9시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6시간 동안 고통에 처하셨죠.
그때 십자가 위에서 7마디를 남기셨는데 그중에 가장 괴로울 때 그 말씀을 외쳤죠.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지만 성부 하나님 당신의 아들이 외치는 그 비명같은 소리에도 끝내 침묵하셨고 예수님은 숨을 거두며 끝까지 기다렸죠.
마침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사흘째 되는 새벽 미명에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케 하셔서 만 왕의 왕으로 승천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이셨죠.
(적용)우리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기다리는 대상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신뢰가 있어야 기다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내가 신뢰가 있어도 기다리려는 의지가 없으면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내가 기다릴 수 있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온 의지를 다해 기다릴 수 있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시는 역사를 보게 하실 줄 믿습니다.
(본문)오늘 읽은 2절은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 의지를 갖고 기다렸는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원해)여기에서 ‘기가 막히다’는 히브리어 ‘샤온’(שָׁאוֹן)은 ‘백성들이 요란하게 소동하다’(사66:6, 호10:14, 암2:2) 뜻입니다.
‘웅덩이’란 히브리어로 ‘보오르’(בּוֹר)인데 ‘우물’(well) ‘구덩이’ ‘함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창37:30) 던졌을 때, 요셉이 ‘감옥’(창40:15)에 갇혔을 때, 예레미야가 ‘웅덩이’(렘37:16)에 처박했을 때입니다.
‘수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벤’(יָוֵן)은 ‘수렁’ ‘극심한 늪지대’를 뜻하는 말입니다.
(깨달음)과연 기가 막힐 웅덩이나 수렁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과 웅덩이 같은 상황 아니겠습니까?
다윗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늪지대 미로 같은 상황입니다.
왕의 자리에 있지만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절박한 수렁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죠.
(원성)실은 요셉도 그런 상황에 처했죠.
해와 달 열 한 별들이 자신에게 절한다고 자랑할 때 그를 시기한 형들이 웅덩이에 던졌다가 미디안 상단에 팔아넘겼죠.
그 후에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종살이를 하다가 누명을 쓴 채 감옥에 갇히게 되었죠.
그때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는 보르요 야벤과 같은 깊은 늪지대에서 허우적거리던 때였죠.
오직 하나님께서 요셉의 술맡은 관원장을 기억하게 하셔서 그를 추천하게 하실 때 요셉이 그 보르 야벤에서 다시금 회생하게 되죠.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좇아 애굽과 손을 잡으려고 할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하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선포했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자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살 길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 일을 매국노로 여긴 왕과 신하와 거짓 선지자들이 합세해서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 안의 우물속으로 던져버리죠.
그때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런 것도 없는 보르요 야벤 곧 진흙 구덩이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낸 에디오피아 궁중내시 에벳멜렉을 통해 예레미야는 그 밤에 건짐받게 되죠.
본문의 다윗도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창칼을 겨누고 왕궁으로 쳐들어올 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를 지키던 군사들도 압살롬 편에 넘어갔고 온 백성들조차도 압살롬을 떠받들었으니 어떤 전략과 계략을 짤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비록 맨발로 왕궁을 빠져나갈지 모르지만 그의 심령은 그야말로 진흙구덩이에 갇힌 신세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 심령이 얼마나 괴롭고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요셉이 갇힌 보오르이자 야벤이요 예레미야가 쳐박힌 웅덩이자 시궁창과 같은 다윗의 처지였습니다.
(원해2)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다고 고백합니까?
“끌어올려주셨다”고, 자신의 발을 ‘반석 위에 두셨다’고 자기 발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끌어올려주셨다’는 히브리어 ‘쿰’(קוּם)은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다쿰’할 때의 그 ‘쿰’입니다.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막5:41)하신 것 말이죠.
그리고 ‘견고하게 하셨다’는 히브리어 ‘쿤’(כּוּן)은 ‘세우다’ ‘확고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깨달음)하나님께서는 수렁에 빠지고 감옥에 갇히고 진흙구덩이에 갇힌 다윗을 그렇게 건져주시고 두 발로 확고하게 서게 하셨다는 것이죠.
요셉을 건져주듯이 예레미야를 꺼내주듯이 다윗의 인생을 건져주시고 확고하게 세워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도 인생의 수렁과 진흙구덩이에 빠져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한 지경에 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건져주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렇기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다윗이 자기 힘과 능력으로는 어떻게 할수 없는 인생의 수렁에 빠졌을 때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져주시고 세워주셨는지 알수 있지 않느냐?”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지고 감옥에 갇힌 신세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건져주셨고 굳건한 반석에 세워주셨는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느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 에디오피아 사람 내시 에벳멜렉을 통해 건져내 세워주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낙심되고 절망감이 몰려들 때, 네 힘과 능력이 바닥이 났다는 것을 알 때, 누구를 붙잡고 의지해야 할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네 인생의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너의 하나님 아버지를 붙잡고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때에도 예수님의 손으로 그 딸의 달리다쿰 하셔서 다시 살아나게 하셨듯이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너의 능력과 힘을 모두 빼내게 하셔서 그 수렁에서 다시금 건져올리사 견고케 하시는 분이시니 말이다.”
“네 인생의 수렁에서 진흙탕 속에서 오직 네가 바라봐야 할 분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시지 않더냐?”
“저마다 다 다른 웅덩이와 수렁에 놓여 있을지라도 당신의 자녀들을 건져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니 말이다.”
(찬양)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 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예화1)조명환 교수의 〈꼴지박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나라에서 흔치 않는 에이즈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분은 책을 통해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도 아니고 그런 대학에서 명문대학에서 교수가 될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꿈을 갖고 있었는데 실력이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는 미국에 가서도 실력이 되지 않아 학업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과목을 선택할 수도 교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천5백불의 병원비를 갚지 못해 5년동안 갚으며 먹을 것이 없이 지나갈 때 그가 다닌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학교 담당교수가 다른 학교에 추천서를 써 줬습니다.
“조명환 학생은 성적이 안 좋아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계속 학업을 할수 없지만 이 학생에게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귀 대학에서 주기를 희망한다.”
“조명환 학생은 후에 틀림 없이 세상을 위해 큰 역할을 할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기는 안 받으면서 다른 대학에게 부탁한 것이죠.
그런데 이 편지는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처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메일이 왔나, 편지가 왔나 살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할머니 한 분이 이분에게 조그마한 돈이지만 매번 보내줬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 할머니가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글귀가 있었다고 합니다.
“God loves. Thrust him. I pray for you.”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를 신뢰하십시오.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절망의 웅덩이 가운데서 아무 것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합격 통보를 보냈던 에리조나 대학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귀하에게는 이미 본 대학 박사과정에 불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미생물 면역학과 찰스 스털링 교수가 귀하를 지도하겠다는 의지를 존중해 귀하에게 본 대학 미생물 박사과정에 합격했을 통보합니다.”
“그러나 귀하는 본 대학원에서 다른 교수를 지도교수로 선정할 수 없으면 스털링 교수를 지도교수로 수학할 경우 본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할 수 있음을 통보합니다.”
그의 책에서 밝힙니다.
그 사람은 에이즈 최고의 전문가인데, 그 당시에는 에이즈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지도교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그런 대학과 지도교수를 선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그 대학과 지도교수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분이 그 하나님 아버지였다는 것입니다.
(깨달음)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가장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막혀버렸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 길목에서 건져주시고 세워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예화)어떤 집에 불이 났습니다.
아빠가 딸을 데리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불길 때문에 그 딸이 아빠 손을 뿌리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윗층에 불길에 거세지고 딸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울죠.
그때 아버지가 말합니다.
“딸. 밑으로 뛰어내려. 아빠가 붙잡아 줄게.”
그때 딸이 말합니다.
“아빠, 아빠가 안 보이는데.”
그러자 아빠가 말하죠.
“우리딸. 아빠는 딸이 보여. 그러니까 무조건 뛰어내려.”
(깨달음)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빠져 있을 때 그 아빠처럼 내어맡기길 원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리하고 전적으로 내어맡기며 하나님 품에 안기길 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건져 세워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내 인생에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조명환 박사처럼 뭔가를 해 보려고 해도 길이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어요.”
“그 아빠와 딸처럼 집에 불이 나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요.”
“내 부주의와 실수 때문에 수렁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연단의 과정 속에서 웅덩이에 빠지게 하실 줄 믿어요.”
“주님. 제 인생에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 빠져 이해할 수 없을 때 주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기다리길 원합니다.”
“오직 하나님밖에는 인생에 길이 없음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뛰어들며 맡기게 해 주세요.”
“그때 그 깊은 수렁과 웅덩이에서 건져내 주시고 견고하게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어요.”
(찬양)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면 귀를 기울이시고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네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위에 세우시사 나를 튼튼히 하셨네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주를 의지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거짓에 치우치지 아니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호와 나의 주는 크신 권능의 구주라 주의 크신 권능으로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네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새 노래로 부르자 라라라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새 노래로 부르자 하나님 사랑을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구덩이와 감옥에 갇힌 요셉을 건져 올려주신 구원자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뺨을 맞고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에벳멜렉을 통해 견져 세워주신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창칼을 겨누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진흙구덩이에 빠졌을 때도 다윗을 건져주시고 세워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나라 최초 에이즈 전문가 조명환 박사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때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셔서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 세워주신 분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인생의 깊은 웅덩이와 수렁에 빠졌을 때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건져세워주시는 은총을 덧입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여 온 의지를 다해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요셉과 같은 은혜, 예레미야와 같은 은혜, 다윗과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주님 앞에 기도하겠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내 삶에 아무 기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내 삶에 모든 것이 기적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처한 모든 환경과 상황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기적이 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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