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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던 시대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그 마지막 시기였습니다. 여로보암2세는 41년간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그때 북이스라엘은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고, 군사적으로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그 모든 국경들을 회복할 만큼 강성했습니다.
그런 외적인 면에서 볼 때, 여로보암2세는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월등한 왕으로, 능력있는 지도자로 평가받았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평가도 사람들의 눈에 비친 모습과 똑같았을까요? 열왕기하 14장 24절에서는 여로보암2세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로보암 2세는 그 당대의 지도자나 백성들의 평가는 지대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을 행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오늘 본문 1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그 시대에 북왕국 이스라엘의 사회는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군사적으로 풍요롭고 광활한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감히 그 어떤 이방 세력들도 침범치 못할 정도로 크나큰 위세를 갖추고 있었죠.
그런데 그렇게 풍요롭고 넘쳐나는 그 상황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탐욕이라는 우상을 위한 제단과 주상들을 세워갔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백성들이 그러는 동안 여로보암2세는 그런 모습들을 막아서려고 하거나,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더 부추기고 조장한 것이었죠.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보상 차원으로 물질적인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고, 그 반대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가 다 있는 것은 아니죠. 경제적으로 풍요한 만큼 영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면 좋은 것이죠. 그런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죠.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하던 그 시기가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 시대였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호세아가 하나님의 책망하시는 음성을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백성들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지금 우리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설레발치는 것이냐고? 다른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당신이 나서서 괜히 들쑤시고 다니는 것이냐?’하면서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이미 4장 8절 이하를 읽어봤을 때, 그 당시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에만 관심을 둘 뿐, 그들의 죄악된 삶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죠. 또한 영적 지도자들이 무당이나 신접한 자들과 교제하고 있었고, 포도주에 취해서 영적 분별력까지 상실했었죠. 그러니 어찌 그들이 바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백성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자랑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호세아야. 우리도 너처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각종 절기를 지키고 있지 않느냐?’하고 말이죠. 하지만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한 마음이 아닌 두마음을 품었다는 것이죠. 한 남편만을 바라보는 신실한 자세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나안 땅을 분배받고 살던 그 초창기의 마음이 결여됐습니다. 하나님만을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 ‘인애하는 마음’이 안라 바알과 아세라라는 풍요와 번영의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 그들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본문 2절에서 말씀하는 ‘두 마음’입니다. “그들이 두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숭배하면서 양다리를 걸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런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1차 대상이 그 시대에 사는 자들이고, 2차 대상은 언제나 오늘의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한 모습이 우리의 심령 안에도 내포돼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것은 잠언서 30장 7-9절의 아굴이 하는 기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입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너무 가난하여 또는 너무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까 두렵다는 것이죠. 그래도 가난하면, 가난한 심령이 되면 하나님을 찾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부하게 되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도, 하나님을 찾는 것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게 사람의 속성이죠. 그것을 경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도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하고 말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난하던 그 초창기 시절에는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좇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풍성한 수확이 주어졌을 때, 점차 가나안의 토착신에게 빠져들거나 페니키아에서 들여 온 바알과 아세라 신에게 빠져들었죠. 그것이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주민이 벧아웬의 송아지로 말미암아 두려워 할 것이라 그 백성이 슬퍼하며 그것을 기뻐하던 제사장들도 슬퍼하리니 이는 그의 영광이 떠나감이며.” 여기에서 말하는 ‘벧아웬’이란 실은 벧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벧엘’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 야곱이 도망자의 처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곳을 ‘베이트엘’ 곧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했죠. 문제는 그 벧엘에다 북왕국 이스라엘 초대 왕인 여로보암1세가 금송아지를 세워서 우상숭배의 터전으로 삼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벧엘’의 이름이 ‘범죄의 집’이란 뜻의 ‘벧아웬’으로 불리게 된 것이죠.
그래서 8절 말씀을 보면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위에 날 것이라”하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전 안의 장사치들을 보시면서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고 책망하시고 상을 엎으신 모습과 똑같은 격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했는데, 그 책망 이후에 37년이 지나,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벧엘’이라는 장소나 ‘예루살렘 성전’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과연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느냐가 중요하죠. ‘벧엘’이란 이름한 그곳에서 금송아지을 숭배한다던지, 성전이라는 그곳을 통해 장사치들이 이익을 대변한다든지 하면, 결국 벧아웬이나 성전도 강도의 굴혈처럼 파멸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된 몸’이라고 칭하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지게 해야 하는데, 자칫 탐욕과 정욕과 욕망이라는 것들을 채운다면, 그 역시 두 마음을 품은 자의 모습인 셈이죠. 물론 세상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기에, 매일 같이 우리의 심령을 말씀과 기도로 기경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것이 본문 12절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하루만 자고 나도 옷에 먼지가 쌓이듯이, 세상 속에서 하루 아니 한 시간만 보내고 나면 온갖 탐욕으로 가득차 오르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하루의 그 묵은 땅을 매일매일 갈아엎는 시간, 그것이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는 시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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