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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4장 1절 말씀이 이와 같았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이것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지적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에게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는 것이었죠. 그 중에서도 진실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 호세아 11장12절-13장16절까지 밝혀주고, 인애가 없다는 부분에 대해는 호세아6장1절-11장11절까지를 밝혀줍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 어제 읽은 4장4절-5장15절까지, 다시 말해 오늘 읽은 5장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부분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제 읽은 4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바친 번제물에만 관심을 둘 뿐 그들의 삶이 죄악의 길로 걷는데도 그냥 내버려두고 있었죠. 또 하나는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을 빼앗겨 여호와 앞에 바른 분별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것이 당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지적이었다면 일반 백성들은 무엇을 일깨워주고 있었습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우상숭배에 빠진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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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 읽은 5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지적하고 계십니까? 과연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게 무슨 내용입니까? 본문 1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죠.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우리말에는 제사장들에 대해서, 이스라엘 모든 족속에 대해서, 왕족들에 대해서 언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 같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들으라” 곧 ‘쉐마’하는 말씀이 맨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신명기 6장 4-9절에 말씀하시는 것 곧 “쉐마 이스라엘아”하시는 말씀을 상기시켜주는 부분입니다. 바꿔 말해 왜 제사장들이 제사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을 두게 됐는지, 왜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이 빼앗겨버렸는지, 왜 그 백성들조차 음행을 빠지고 영적 간음에 빠져 우상숭배자들로 전락해버렸는지, 그 안타까운 원인에 대해 알려주시는 부분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듣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 나눈 말씀 곧 “내 백성이 지식이 없다”는 부분과 맥락이 같은 내용입니다. 그들이 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적 수준이 떨어지거나 이해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지적한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교육의 부재나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분별력’의 부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분별력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쉐마 이스라엘아’하시는 그 말씀에 귀를 세워서 듣지 않는 까닭에 그렇게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의 연수가 깊다면서 교만해지면 더더욱 그럴 수 있죠. 그때부터는 자기 경험으로, 세상에서 쌓은 인생 경륜과 지식으로 하나님을 압도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들으려고 하지 않게 되죠. 그것은 자신이 흙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에서 내려다보려는 그런 모습처럼 전락해 버리는 것이죠.
이것을 우리가 경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 경륜, 인생 경륜이 많아질수록 더욱더 흙의 자리를 고수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발아래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훈련 말입니다. 그 때에만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이죠. 그들이 그런 흙과 같은 존재임을 상실할 때, 그래서 우상숭배자들로 전락할 때, 제사장들이 분별력을 상실할 때, 그들을 보시고 아파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심판이라는 카드를 꺼내겠다고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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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본문 1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 여기에서 ‘미스바’와 ‘다볼’은 각각 요단의 동쪽과 서쪽에 있던 우상숭배의 중심지를 말합니다. 우상숭배의 성지가 이제는 그들을 잡아먹는 올무요 그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을 향한 심판의 장소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경고보다 더 가슴을 저미게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본문 3절에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은 ‘내가 안다’, 너희들이 그런 상태에 빠져 있으니, 내 마음에 찢어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게 언약관계를 맺은 특별한 백성인데, 그런 너희가 우상의 올무에 빠져 심판을 받게 될 터라, 내 가슴이 찢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좋단 말이냐, 하는 거죠.
그 최후통첩을 6절에서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떠나셨다’고, 7절 하반절에서는 “기업을 함께 삼킬 것이다”고, 10절에서는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같이 부을 것이라”,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하고 각각의 최후통첩을 연이어 선포하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최후통첩에 대해 말씀하실 때, 과연 그들이 어떤 액션을 취하려고 합니까? 그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복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정말로 흙과 같은 존재로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 13-14절은 다릅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그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바로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에브라임이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에브라임이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지파인데, 실은 모든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셔서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할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우러러봐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세상 권력과 힘을 동원해서 그 심판을 막아보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14절 마지막 부분에서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아주 단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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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호세아와 고멜의 관점에 비춰서 이해해도 충분한 말씀이 될 것입니다. 상습적으로 외도하는 남편이 있다고 가정할 때, 아내는 그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고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초등학교과 중학교에 다니는 얘들을 위해 눈을 감아 줍니다. 그런데 남편의 외도는 점점 심해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되죠. 그 지경에 이르자, 아내는 짐을 싸서 친정으로 가버립니다. 친정으로 가면서 남긴 말이 이렇습니다. “우리 이제 헤어져. 아이들은 당신이 책임져. 당신 마음 정리할 때까지 찾지 마.” 그때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만려도, 그 아내는 독하게 결심하고 친정으로 가버립니다. 그렇게 된다면 남편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까지 아내의 손길을 통해 자식들이 학교도 가고 밥도 먹고, 옷도 잘 입고 다녔는데, 아내의 부재로 인해 온통 집안이 쑥대밭이 되고, 아이들의 정서까지도 황폐하게 된 그 상태를 실감했다면, 그래서 일말의 지혜가 남아 있는 그 남편이라면, 그 가정이 완전히 해체되기 전에 그 아내에게 가서 속히 무릎을 꿇고 비는 것이, 그리고 다시는 외도하지 않는 것이, 그 가정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상황 곧 영적인 우상숭배자들로 전락한 자들에게, 더 늦기 전에 하나님을 아는 분별력을 갖추고 돌아서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 분력력으로 다시금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어찌 그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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