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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적인 간음을 범하듯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사는 모습을 책망하고 그로 인해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천명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과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들을 벌하고 책망하고 심판하지만 그것은 사랑을 위한 책망과 심판임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읽은 1장 2-9절까지도 음탕한 고멜을 맞이해 아내를 삼고 자식들 셋을 낳아 기르게 하시는데, 그러나 그 자식들이 ‘이스르엘’ 곧 학살의 자식들이 될 것이고, ‘로루하마’ 곧 하나님의 긍휼을 받지 못할 것이요, ‘로암미’ 곧 내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을 천명하셨습니다. 그러나 10-11절까지의 말씀 정확히 말해 오늘 읽은 2장 1절까지는 긍휼의 은총을 부여하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학살을 당하고 긍휼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 긍휼어린 백성으로 살도록 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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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2장의 전반부와 후반부 말씀도 그런 맥락을 갖추고 있습니다. 2-13절까지는 법정의 재판 형식을 빌어 하나님께서 피고소인인 이스라엘을 정죄하시는 장면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먼저 2절에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여기에서 ‘어머니’는 북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내 아내’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는 그의 남편이라”할 때 그 남편이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는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그 자녀’란 곧 북이스라엘에 속한 백성들 개개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무엇을 고발하는 것인지 알 수 있죠. 이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신랑이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영적인 신부인데, 그들이 신랑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이방 신들을 좇아 음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제 읽은 1장의 호세아의 아내인 음탕한 고멜의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실 북왕국 이스라엘은 호세아 선지자가 그의 아내로 선택한 ‘고멜’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던 것처럼 여호와를 배반했습니다. 본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상과 우상들을 음란하게 섬겼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법정에서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지적하시는 것이고, 그 죄에 대한 형벌의 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심판의 법정은 세상 법정처럼 이혼을 목적으로 하는 법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재결합을 위한 목적으로 열리는 법정이라는 사실입니다.
호세아서의 시대적인 배경은 이미 1장의 서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왕국 이스라엘의 13대 왕인 ‘여로보암 2세’의 통치 때입니다. 당시는 북이스라엘의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움과 번영의 삶을 살 때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과 윤리적인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도 타락하고 부패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그 평안과 풍요를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는 데에 전용했다고 8절에서 고발할 정도입니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쓰는 모든 곡식과 새 도포주와 기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도,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바알이라는 이방 신과 우상을 위해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주신 이가 따로 있는데, 그 분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보다 이방 신에게 그 감사를 드리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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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까닭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본문 2절 마지막 부분에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게 하라”고, 3절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발가벗겨서 광야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어떤 길을 좇는다고 말씀합니까? 5절에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그들이 사랑하는 우상을 좇아 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길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고자 하는 길, 그 우상에게 행복을 찾으려는 길을 만나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서야 첫 번째 남편 곧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당시에 바알이라는 우상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또 의지적으로 좇겠다고 표방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당시 왕인 ‘여로보암 2세’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왕과 관료들이 온통 우상숭배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백성들도 뒤따라 행하는 꼴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후반부인 14절23절까지는 법정의 고발 분위기가 전환되는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어제 읽은 말씀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운 징계와 심판의 말씀 이후에, 하나님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환이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벌은 영원한 형벌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 형벌이라는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4절에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셔서 ‘거친 들’로 데리고 가셔서 말로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친 들’로 번역된 단어의 뜻은 ‘광야’입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결혼 관계에 들어간 이후, 하나님을 의존하고 충심을 언약한 장소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곳으로 데려가신다는 표현은 과거 그들이 그토록 온전히 하나님을 따랐던 그 상황으로 돌이키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광야’는 하나님과 첫 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뜻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생활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습니다. 비록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오히려 풍성하고 넉넉한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했었죠. 빈 들의 광야, 아무런 것도 없는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광야는 은혜와 사랑의 장소, 첫 사랑을 회복케 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이끄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그들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을 제거하겠다고 하시고, 20절에서는 그들에게 진실함으로 장가 들겠다고 하시고, 22절에서는 그 학살의 땅 이스르엘에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넘치게 하겠다고 하시고, 2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들을 이 땅에 심고 긍휼을 얻게 하시겠다고, 내 백성이 아닌 그들을 내 백성으로 다시금 삼아 회복케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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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일깨워주십니까? 어렵고 힘든 광야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더 큰 은총을 부어주시는데, 그 광야의 시기를 통과한 이후에 세상의 풍요와 번영에 빠져드는 우상숭배자의 길로 들어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언약백성들조차도 때론 세상의 유혹과 우상에 넘어져 살 수 있지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관계를 위해 때로는 징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어떤 경우에도 탐욕과 번영의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는 하나님의 참된 은총의 자녀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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