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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예레미야애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애가3:40-66절)

by 권또또 2023.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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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은 39절 말씀이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하고 기록돼 있었습니다.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는다, 바꿔 말해 인간이 벌을 받는 것은 그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란 유다 백성들에게 비춰 봤을 때, 죄악 때문이죠. 물론 죄의 대가로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벌을 받는 것 자체는 죄인들에게 고통이죠. 벌로 인해 고통을 받는 자는 벌을 면하고자 하겠지만 벌을 면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단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구해야 하는 것이죠.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문 40절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자”라고 유다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데 40절 상반절에 “행위를 조사하고”라고 말합니다. 행위를 조사한다는 것은 범죄사실을 인정하기 위한 전 단계 과정이죠. 범죄사실을 인정한 후 죄인임을 고백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나아가자는 것이죠.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예레미야는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비를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손만 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자고 합니다. 그만큼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비를 구하자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리고 ‘마음과 손을 하나님께 들자’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39절과 같은 맥락으로 42절 이후에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하는 현재의 고난이 너무 커서, 그들이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는 절대로 현재 당하는 엄청난 고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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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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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본문을 인칭대명사의 변화로 나누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0-47절까지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라고 표현했기에 여기에는 당연히 예레미야 선지자도 포함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과연 하나님께 범죄 했는가? 그렇지는 않죠. 하지만 예레미야는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민족공동체의 일원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자신이 끊어질지라도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다면, 그것으로 족하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지금 하나님 앞에 죄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죄악을 자신의 죄악으로, 우리의 죄악으로 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의 아픔을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여긴 것입니다.

아울러 민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된다면 그것이 곧 자신의 기쁨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그뿐만이 아니죠.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의 패망이후 패망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같이 겪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바르게 살았지만 그 역시 민족의 범죄로 인한 징벌의 고통을 함께 받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길목에 놓여 있는 직선 위에 길을 회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48-51절까지는 1인칭 단수 곧 ‘나’ 또는 ‘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라의 멸망과 민족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괴로워하는 예레미야 자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입니다. 48절에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딸 내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51절까지 이스라엘 패망에 대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픈 감정을 밝히는 것과는 달리, 52절부터는 선지자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한 괴로움을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습니다.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고”(52절),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53절)하는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나의 원수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 원수가 누구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패망시킨 바벨론을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될 것이라는 예언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오래전부터 해 왔었습니다. 바벨론을 따르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계속해서 남 유다 왕들과 백성들에게 선포했었죠(렘27:12, 렘38:17,18). 물론 예루살렘의 함락과 백성들의 모습을 막상 보고 비통하여 바벨론을 원수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원수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부에 있었습니다. 바로 같은 민족인 왕족과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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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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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선지자들은 좋은 말로 나라의 미래가 밝을 것이며,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예레미야는 지속적으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던 까닭이었습니다. 아무리 나라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할지라도 ‘이러다가는 망한다’고 계속 말한다면 지배계층을 포함해 누가 그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망하기 전에도 미움을 받아 구덩이 속에 갇혀 죽을 뻔했던 예레미야였는데, 막상 나라가 망하니까 지배계층을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더더욱 미움을 받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레미야의 탄원을 보면 자신이 원수들에 의해 구덩이에 들어갔던 것(53절)과 구덩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55절)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이 멸망(B.C.586년)하기 약 10년 전부터 시드기야 왕이 집권(B.C.597년부터 집권)할 때에 이미 ‘뚜껑을 씌운 웅덩이에 들어갔다’고 예레미야 37장 16절에 나와 있었습니다. 왜죠? 여호야김 왕 때부터, 여호야긴, 그리고 시드기야 왕이 통치할때까지 계속 나라가 멸망당한다고 말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물 없는 웅덩이에 예레미야를 감금시켜 버린 것이었죠.

그런데 ‘웅덩이’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보르’는 우물, 저수지의 의미도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늘 본문 53절과 55절에 나오는 ‘구덩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53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55절) 그런데 이 구덩이는 단순히 경사가 완만하고 깊이가 작은 곳이 아니라 우물처럼 경사가 가파르고 깊은 곳입니다. 더욱이 그 구덩이, 곧 ‘보르’는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갇혔던 곳이기도 합니다.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죠.

 

그런데 그렇게 혼자 올라 올 수 없는 그 구덩이에서 예레미야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곳에서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55절)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빛도 없는 축축한 바닥과 같은 나락으로 떨어져 있는 상황에 직면에 처했을 때, 해야 할 일이 바로 예레미야처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설령 유다 백성들처럼 죄로 인해 징계를 받는 자리일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포도원의 농부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탄식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내 손과 마음을 들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 본문 56-57절의 말씀처럼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소망의 하나님께 기도할 때, 주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응답하시고 위로하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친히 응답하시고 위로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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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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