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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감정이 있습니다. 기쁘고 슬프며, 재미있고 짜증나며, 사랑하고 싫어하는 감정들이 누구에게나 있죠. 그처럼 다양한 감정의 반응들이 나타나는 배경은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경험들에 대한 반응이 우리 자신의 감정이 드러나게 됩니다. 때로는 같은 경험을 해도 각자의 감정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 이유는 경험에 대한 해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경험된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감정도 다르게 결정됩니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경험을 막연한 슬픔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무기력에 빠져들지만, 그 시절의 가난을 소중한 인생의 자산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 토대로 삶에 대해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일구어 나갑니다. 이것이 모두 경험에 대한 해석의 반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정은 잠깐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삶에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그 감정들은 모두 에너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감정이 복받쳐 오면 눈물과 콧물이 베어나오는 것도 바론 그런 에너지 때문입니다. 만약 에너지가 넘치는 감정을 왜곡하거나 억누르게 되면 반드시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잠재된 위험요소를 표출하게 됩니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면 표출하는 것이 당연한데, 감정에만 매여 있기 보다 그 속에서 자신이 취해야 할 뜻을 새겨보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야만 보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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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예레미야애가도 자신의 삶에 찾아온 경험을 토대로 반응하는 감정을 노래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애가의 책 제목은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본문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우리말로는 ‘슬프다’로 번역돼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에카’로 기록돼 있다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Alas How’ 번역하면 ‘아! 어찌하여’라는 뜻이죠. 어떻게 이렇게 슬픈 일을 당했는가? 어떻게 예루살렘 성읍이 황폐하게 무너졌는가? 이 슬픔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뜻이 담긴 감정의 탄식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이 예레미야애가서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예루살렘의 파괴의 날, 그리고 장막절과 부림절에 읽어나가는 ‘메길롯’(Megilloth)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룻기서와 전도서 그 사이에 예레미야애가서를 끼어 놓고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죠. 그래서 아빕월 9일, 곧 예루살렘 성읍이 바벨론에게 함락되던 그 날을 기념하여 예레미야 애가서를 낭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예루살렘의 파괴와 참상을 슬픔 가운데 노래하고 있는 애가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읍이 함락되었다는 슬픔의 경험을 토대로 한 내용이기에, 우리가 예레미야애가서를 접할 때, 우리도 동일한 감정으로 읽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애가에 나타난 억제하는 슬픔, 그 슬픔의 표현은 슬픔을 더욱 애절하게 표현하는데 큰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애가의 독특한 구조가 그것을 설명해주죠. 1장부터 4장까지 각 장마다 히브리 글자의 알파벳 순서대로 각 절의 첫 글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애가의 모든 장마다 절의 수는 모두 22절로 돼 있고, 특별하게 66절로 기록된 3장 역시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르며 3절씩 기록하였기 때문에 66절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으로 시를 쓰는 기법을 아크로스틱 시형이라고 하는데, 단 마지막 5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가나다순을 따르지는 않지만 그 역시 22절로 돼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1장에 나타난 슬픔의 상황이 어떤지 우리는 이미 예레미야서를 쭉 읽어왔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습니다. 멸망당하기 전 예루살렘은 항상 제사 드리는 사람들로 붐비는 매우 활동적인 성읍이었죠. 하지만 바벨론의 침략과 약탈과, 1차와 2차와 3차에 걸친 포로기를 맞이하면서부터 누구도 이제는 그 성읍을 찾지 않는 외로운 성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을 본문 1절과 4절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또한 예루살렘 주변에는 사랑하는 자도 친구도 없어졌고, 오히려 배반과 조롱을 당하게 되었다고, 본문 2절과 8절에서 읊조리고 있습니다.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슬픈 상황이어도 조금만 견디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보인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유대 민족들에게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게 돼 버렸습니다.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유능하고 미래가 밝은 젊은이들이 모두 사로 잡혀갔고, 위로하거나 도와줄 이방 나라들, 그토록 의지하던 애굽도 다 망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소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 5절 하반절과 17절이 그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방에 있는 자들에게 명령하여 야곱의 대적들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그들 가운데에 있는 불결한 자가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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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이 자연적인 현상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이고,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죠. 그 인생에는 또한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이 찾아옵니다. 기쁘고 즐거울 때에는 당연히 그 감정이 기쁘지만, 슬픔이 찾아오면 슬퍼지는 것, 그 역시 당연한 모습입니다. 눈물을 흘리고 싶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싶을 때에도 역시 그리해야 하죠.
하지만 슬픔과 애도의 기간을 보내고 난 후에 모든 것을 끝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슬픔과 환난을 허락하셨는지를 생각해야 하죠. 그것이 예레미야애가를 기록한 예레미야의 목적이기도 하죠. 그 이유를 본문 1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고통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들과 나의 청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우리의 성읍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처절한데, 그 슬픔과 애도를 맞이하면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그 원인을 돌이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거역한 까닭이라고 규정하죠. 그리고서는 그 슬픔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고통과 슬픔의 때에, 그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들의 탓으로 돌리면서, 이제라도 자신들의 실상을 잘 알았으니, 그 크신 하나님 앞에 비천한 인생의 슬픔을 토해내며, 그 분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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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애가1:2-22)이란 사실입니다. 예레미야는 사람들로 붐비던 번영과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던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그 현실 앞에 극한 슬픔을 표현했지만 그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빚어진 일임을 깨달았죠.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그렇게 어떤 현상과 감정의 일이 교차될 때, 그 속에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게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욱 성숙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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