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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던져져 있는 이 비극을 결국 희극으로 끝나게 할 힘은 ‘연대’다. 그 연대의 힘으로 우리 아이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숭고한 싸움을 계속해 갈 수 있고,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새로운 세상, 안전한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416생명안전공원 예배팀에서 엮은 〈포기할 수 없는 약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예배팀에서 음향을 맡고 있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부모가 직접 쓴 글이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다가 깨달았다. 악에게 지지 말라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사회적 참사나 억울한 일들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싸워서 바꾸는 것이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게 ‘연대’라고 말한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부모와 연대하고, 악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이들과 연대하는 것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도 실은 ‘연대’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그분의 삶을 기억하면서 현재로 살아내고자 함께 다짐하는 것이니 말이다.
“너는 이 책 읽기를 다한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 속에 던지며 말하기를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피폐하리라 하라 하니라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끝나니라”(렘51:63∼64)
드디어 예레미야의 사명이 끝났다. 이제껏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백성에게 포악하고 애굽의 힘을 우상처럼 떠받들던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패망할 것을 선포했다. 차라리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호야김도 여호야긴도 시드기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다가 결국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갔다. 심지어 미스바에 남은 유다 백성들도 애굽에 숨어 들어갔지만 바벨론의 공격을 피할 길이 없다고 선포했다.
예레미야는 그런 유다를 넘어서서 이방 10개국의 심판(46∼51장)도 선포했다. 유다의 남쪽 애굽, 서쪽 블레셋과 두로와 시돈, 오른쪽 모압과 암몬과 에돔, 북쪽 아람과 다메섹과 게달과 하솔과 엘람, 그리고 바벨론이었다. 그들이 패망한 공통된 이유는 형제국 유다를 돌아보지 않았고, 자국의 요새와 풍부함을 교만함으로 삼았고, 각국의 우상숭배에 있었다. 그 중 바벨론은 하나님께서 사용한 심판의 도구였는데 스스로 하나님 자리를 꿰차다가 멸망한 것이다. 그것이 확실하다는 증표로 두루마리에 기록해 돌을 묶어 유브라데 강에 던져 못 나오게 했다. 일종의 퍼포먼스였다.
그렇게 예레미야서가 끝날 것 같은데 52장에서 끝이 난다. 왜일까? 예레미야 52장은 부록(왕하24:18∼25:30)이다. 18살에 왕이 된 여호야긴이 37년만인 그의 나이 55세에 요셉처럼 옷을 갈아입고 바벨론 감옥에서 풀려났다. 왜 그런 내용을 첨부했을까? 어린 왕이 죄수 신분으로 타국에 끌려가 청춘을 다 보냈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된 것처럼 유다 백성들도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케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살라고 덧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최후는 어떻게 됐을까? 예레미야는 미스바에서 애굽에 들어간 유다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했다. 미드라쉬(Midrash Aggadah)는 그때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에게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나일강의 악어와 독사를 박멸토록 기도한 예레미야의 시체를 파라오의 궁전 근처에 묻을 때 유다의 남은 이들도 동참했다고 한다. 그 후 뱀에 물린 상처를 치료코자 예레미야의 무덤에 묻은 먼지를 사용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걸 목격한 알렉산더 대왕이 예레미야의 유해를 발굴해 알렉산드리아 주변에 묻었다고 한다.1)
어찌 보면 모세와 예레미야는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40년간 선지자로 활동했고, 둘 다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해 예언했고, 둘 다 자기 지파의 반대를 받았다. 모세는 강물에 던져졌고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던져졌다.2) 모세가 선포한 신명기 32장 말씀을 예레미야가 그대로 선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대로 성취하셨다. 그만큼 예레미야도 ‘기억의 연대’를 위해 부름받은 선지자요, 그 사명을 다했어도 지금껏 기억되고 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벌써 9주기가 됐다. 배가 기울어가는 걸 빤히 보면서도 누구 하나 손을 쓰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들의 아픔과 재발 방지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연대’하는 이들이 많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빌어준 ‘평화’(εἰρήνη)도 실은 ‘공감하다’ ‘함께하다’ ‘연합하다’는 어원에서 왔다. 자책감에 사로잡힌 제자들조차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마음을 나누며 공감하면서부터 평화가 자리잡은 것이다.
예레미야는 모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연대하도록 선포했다. 하지만 모두 각기 제 길을 걸을 때 비극을 맞이하고 말았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우리도 함께 그 사실을 기억하여 연대했다면 이태원 참사도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일은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사실을 기억하고 연대해야 한다. 그렇게 공감하는데서부터 평화는 자리잡게 된다.
1)https://929.org.il/lang/en/page/451/post/72793
2)https://929.org.il/lang/en/page/452/post/72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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