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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겉모습에 치우치는 것을 보면 ‘형식주의’에 치우쳤다고 말들을 합니다. 형식주의에서는 형식 자체가 목적이므로 형식을 미적으로 정당화시키게 되죠. 그 형식주의가 철학 분야에서는 보편타당성이라고 말을 하고, 예술분야에서는 추상화와는 다른 규격성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죠. 그리고 그 형식주의가 관료제에서는 많은 역기능적 병폐를 낳기도 합니다. 관료제의 까다로운 규정과 절차에서 생성되는 과도한 제약이 일처리의 시간을 많이 잡아 먹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형식주의는 신앙의 측면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보시며 이렇게 질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7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하고 말이죠.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이 있음을 보셨던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고발하기 위해 엿보고 있음을 아시고도, 오히려 손 마른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고 공개적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의 틀에 갇혀버린 사람들에게 형식의 틀을 깨주시기 위함이셨죠. 그래서 누가복음 6장 9-10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물론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질타하시며 비판하신 것은 형식 그 자체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지나친 형식에 대한 강조로, 본래의 의미와 뜻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이셨죠. 이른바 신앙의 참 본질이 형식주의에 갇히지 말아야 하다는 것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형식주의라는 틀에 갇혀버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대화나 타협이 가능하지 않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형식주의의 틀로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었고, 자신들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주님이 말씀하시는 본질과 정신을 이해할 수도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형식주의에 갇힌 가장 커다란 과오라고 할 수 있죠.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도 형식주의에 갇힌 이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읽다보면 마치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하고 이어지는 말씀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하고 이어받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와 그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주고받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10절에서는 “유다의 고관들이” 나서서 전하는 말이 등장합니다.
이런 패턴, 다시 말해 이야기체로 된 말씀의 내용이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해 45장 5절까지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체 예언’이란 예언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사건들을 회고하며, 그 사건에 대한 영적인 해석을 첨가한 예언을 말합니다. 이야기체 예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B.C.587년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는 것에서 출발하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전이 파괴될 것을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야기체 예언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6장부터 시작되는 이 이야기체 예언의 핵심은 이스라엘에게 펼쳐질 운명과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사건만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그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 말입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바로 그 형식주의라는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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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읽은 예레미야 26장의 사건 속에도 역시 본질을 파헤치는 예레미야와 그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갈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동조하는 그룹들, 바꿔 말해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군중들처럼, 그런 군중들이 본문 속에도 고스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죠. 그들 역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 곧 생명과 진리의 본질로부터 빗겨나 있는 형식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4-6절입니다. “너는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이르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법을 행하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을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너희는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이 성전을 실로 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는 성전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더욱이 성전의 무너짐이 바로 하나님의 부재를 상징하는 것도 아님을 말합니다. 다만 그 성전 안에 있어야할 순종의 정신이 너희 유다 백성들에게 죽어 있고, 이제라도 늦지 않게 그것을 회복해야 할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형식주의에 갇힌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가 성전 자체를 부정했다고 착각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말씀을 모든 백성에게 전하기를 마치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이르되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예언하여 이르기를 이 성전이 실로 같이 되겠고 이 성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리라 하느냐 하며 그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예레미야를 향하여 모여드니라”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말을 오해하고 있는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성전을 향하여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죠. 본문 1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너희 길과 행위를 고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리라”
과연 이들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형식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전 그 자체였습니다. 형식주의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성전이란 웅장하고 위엄 있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하나님에게는 어떻습니까? 성전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성전보다 더욱 크고 중하신 분, 성전을 성전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전을 성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절실히 순종하고 청종하는 게 더욱 중요한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청종이 없이는 더 이상 성전이 성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것과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라고 말한 것이죠.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순종’과 ‘청종’이 모두 ‘샤마’라는 단어로 표기돼 있습니다. ‘샤마’는 곧 ‘쉐마 이스라엘아’할 때의 그 단어와 똑같습니다.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는 뜻이죠. 그래서 ‘샤마’는 단순히 듣는 차원을 넘어 완전한 인격적 교류를 통해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전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 형식을 뛰어넘어 그 본질이신 하나님과 한 일체를 이루는 것, 그것이 순종이요, 진정한 청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진정한 인격적인 교제가 일어나는 것이죠. 만약 본문의 제사장이나 선지자들, 다시 말해 형식주의에 치우친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그런 순종과 청종을 행해 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 나라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본질은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는 게 아니라, 형식을 존중하지만, 그보다 더 깊이 순종과 청종하는 삶,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하나님과의 친밀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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