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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유다와 예루살렘, 곧 남 유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징벌을 당한 이유와 그에 따른 과정과 결과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가지 상징물을 들어 설명해주십니다.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적시지 말라 하시기로”
첫 번째 상징물은 ‘베 띠’ 곧 ‘베로 만들어진 허리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베 띠를 구입하게 하셨고, 그것을 유브라데 바다에 가서 바위 틈에 그것을 감추게 하십니다. 그것이 5절 말씀에 나와 있죠.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 가에 감추니라.” 그리고는 그 띠를 다시 가지고 오게 하시는데, 7절에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가져오니 띠가 썩어서 쓸 수 없게 되었더라.” 그 띠가 썩어서 쓸 수가 없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보통 ‘허리 띠’라는 것은 주인에게 속해 있는 물건이죠. 주인의 의지와 손길에 의해 그 용도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기도 하고, 주인의 결정에 의해 용도 폐기되는 것이 바로 ‘허리 띠’입니다. 남유다의 ‘허리 띠’도 바로 그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께 속하게 된 유다 백성들을 허리 띠로 칭한 것입니다. 그만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 쓰임 받고 있었고, 하나님에 의해 부여된 가치 아래에 존재하고 있던 백성들이었죠.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허리띠’ 남유다가 쓸모없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입니까? 9절에 그렇게 밝혀주고 있죠.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그들이 쓸모없게 된 이유는 그들의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교만함은 그들을 부패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소유라는 정체성과 하나님을 위한 목적의 존재 이유마저도 상실케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교만함의 실체가 본문 10절에 자세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완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따라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가 쓸 수 없음 같이 되리라” 그들의 교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마음대로 행하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 곧 우상과 이방 신을 섬긴 것이죠.
사실 그들은 선택받을 조건이 없을 때에 선택 받았고, 삶의 목적을 상실한 때에 하나님께로부터 삶의 목적과 존재 가치를 부여받은 그들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체성을 망각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다른 우상을 섬기는 배역함을 저질렀습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대신 그 자리에 자신들이 원하는 것, 곧 자기 자신들을 올려놓은 것이었죠. 교만(驕慢)이란 ‘잘난 척 하고 뽐내는 건방짐’으로 그 근저에는 자신의 힘, 곧 자신만을 믿는 오만(傲慢)함이 깔려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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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베 띠’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철저히 의존적인 존재인 ‘허리띠’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움직일 수 없고, 하나님의 뜻 없이는 결코 쓰일 데가 없는 존재들임을 뜻합니다. 그런 ‘허리띠’와도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의 완악함, 곧 고집스럽고 악독한 본성을 따라 하나님을 거부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좇는 패역한 삶을 이어갑니다.
그런 그들의 삶의 모습을 또 하나의 다른 상징물에 비유해 설명해주십니다. 본문 12-14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가죽부대가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두 번째 상징물은 바로 ‘포도주’죠. ‘포도주’란 육체적 쾌락과 부패 그리고 우상숭배를 의미합니다. 교만함 속에 야기된 죄악들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은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삶의 방향성과 목적, 그리고 가치를 부여해주시는 하나님을 삶 속에서 상실한 결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영적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죠. 백성들끼리 충돌하며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자신들을 택해주시고 당신의 소유로, 백성으로 삼아주신 하나님께 대한 남 유다의 배역은 그들 삶에 혼란과 상처를 불러왔을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포로의 삶, 철저한 구속의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배려나 관용, 자비와 긍휼은 기대할 수도, 기대해서도 안 되는 상황으로의 회귀되는 것이죠. 굴욕적이지만 그래서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 속에 하나님의 소유된 특별한 백성이었던 남 유다는 자신들을 선택해주셨던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자신들의 힘과 자신들을 믿는 교만함 속에 부패해갔고, 육체적 쾌락과 우상숭배라는 ‘포도주’에 취해 흔들거리며 자신과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는 죄악을 범하며, 결국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종이 되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마음대로 행하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섬기는 배역을 범할 때,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도구요 통로로서 사용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선택된 사람들입니다(벧전 2:9). 하나님의 목적과 가치에 부응하며 하나님의 뜻에 쓰임받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해드리지 않고 내 마음대로 행하며 나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기 우상에 빠진다면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택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우상화하며 살아갈 때, 우리 삶에는 갈등과 충돌이 혼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은 방향성을 잃고 흔들거리게 되고, 삶의 목적은 상실되어 그때 그 때 내 욕망을 좇아나가게 됩니다. 그에 따라 주변인들과 좌충우돌 부딪치며, 나 뿐 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상하게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명목상은 그리스도인이지만 개념 없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마음의 완악함, 곧 고집스럽고 악독한 본성을 따라 하나님을 거부하며 욕망을 좇는 교만한 삶은 다시금 우리를 죄의 종으로 회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의 대속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주님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노예가 아닌 진정한 자유와 영원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욕망과 결탁된 악한 본성을 좇을 때 우리는 다시금 죄의 노예로 억눌린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선택하고 불러주신 주님의 목적에 우리의 삶의 방향을 맞추어 나가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늘 백성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의 은총입니다. 죄의 멍에를 벗고 사망의 사슬을 끊어주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며 주님의 통로요 도구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이죠. 그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서 살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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