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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예레미야 12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1-4절까지로 악한 자가 왜 형통한지 예레미야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묻는 모습이 담겨 있고, 둘째는 5-13절까지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한 예레미야의 탄식과 슬픔이 담겨 있고, 셋째는 14-17절까지로 이스라엘 곧 유다의 이웃나라의 죽음과 삶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악한 자가 형통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하나님은 그런 악한 자의 형통을 내버려두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신정론’이라고 말합니다. 신은 과연 정의로우신 분인가? 과연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인가? 하나님께서 정의롭다면 왜 악한 자가 형통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물음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그런 질문을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드렸겠습니까? 그래도 유다 나라 백성들은 과거 다윗시대로부터 솔로몬, 그리고 분열 왕국 이후에 20명의 왕들 가운데 그래도 4명의 선한 왕들도 있었고, 그 중에는 히스기야나 요시야 왕과 같은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훌륭한 왕들도 있었고, 그 밑에서 그래도 선하게 살아가는 백성들도 있었는데, 그런 유대 백성들과는 달리, 완전히 하나님을 부인하고 이방신을 숭배하는 저 바벨론 제국은 왜 그렇게 승승장구하고 호시탐탐 우리나라를 넘보고 있는데, 왜 저 악한 바벨론 제국은 망하게 하지 않는 것인지, 왜 그 악한 자들이 잘 되는지, 하나님 알고 싶습니다, 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질문을 던진 것이죠.
물론 이런 질문은 욥기서 21:7절에서도, 시편 37편과 73편 3-5절에서도, 그리고 하박국서 1장 13-17에서도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 바가 있습니다. 욥기서 21장 7-8절 말씀이 이렇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악한 자가 왜 잘 살고 장수하고 세력이 강하고 흥한지, 심지어 그 후손들까지도 잘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죠. 시편 73편 3-5절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역시 악인이 형통하고 오만하다는 것, 심지어 그런 악한 자들이 죽을 때에는 고통도 없는 것 같고, 재앙도 없이 넘어가는 것 같다는 것 때문에 불평을 합니다. 그리고 하박국서 1장 13-17절은 이렇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박국 선지자 역시 예레미야와 같은 똑같은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왜 악한 자들이,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바벨론 제국이 우리 유다 백성들을 압제하고 포로로 끌고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게 하고서도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분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는 신정론의 질문을 제기하는 하박국 선지자요, 본문 1절을 통해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하고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 똑같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는 이렇게 예레미야가 질문의 기도를 드립니다.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이에 대한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이 땅에 사는 사람의 죄악 때문에, 짐승과 새도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시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들이 판을 치고, 온갖 악을 자행해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까지 하나님께서는 저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포악하게 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계실 것입니까, 하고 예레미야가 기도를 드린 것이죠.
이와 같은 신정론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본문 5-13절까지 답을 해 주십니다. 이 답은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내용이지만, 그 진노하심에 대해 예레미야가 탄식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5절을 통해 너 예레미야야 네가 보행자가 달려도 피곤할진데 말과 함께 경주하면 더욱더 피곤하지 않겠느냐? 네가 땅에서는 무사할지 모르지만 요단 강물이 넘칠 때에는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너의 작은 이치로 나의 큰 뜻을 헤아릴 수 있겠느냐,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악한 자들이 활개 치기 때문에 선한 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더 깊으신 뜻 속에서는 다를 관점을 갖고 섭리하시는 일일 수 있다는 말씀이죠.
그리고 10절에서는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헐며 내 몫을 짓밟아서 내가 기뻐하는 땅을 황무지로 만들었도다.” 목자들이 하나님의 포도원을 헐어버렸다, 또 하나님의 몫까지 짓밟아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고 하십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책과 직분으로 선을 행하고 의롭게 행하기보다 겉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속으로는 온갖 탐욕의 화신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 선량한 것 같고 착한 사람 같지만 나 여호와가 보이게는 그렇지 않는 사람도 훨씬 더 많다는 뜻입니다. 눈에 보이는 악이 다 악이 아니요, 눈에 보이는 선이 다 선이 아니요, 그 이면 속에 있는 진면목을 인간은 그만큼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이 바라보는 선과 악의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한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의 시력, 우리 귀의 청력, 그런 오관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이 실은 불완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했죠. 그런데 눈에 보이는 인식의 대상이 없이는 절대로 믿음이 생겨날 수 없다고 했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고 믿음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가?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발자취와 어록과 흔적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인식하고 그 너머의 부분까지도 완전히 믿을 수 있다고 했죠. 바로 그런 이치와 같습니다. 악한 자에 대한 인식도, 선한 자에 대한 선함의 평가도, 지극히 불완전한 우리의 인식의 틀로 평가할 뿐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렇기에 완전하신 하나님의 평가 앞에 감히 인간이 나설 수 있겠느냐는, 그런 뜻으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예레미야의 판단 대한 어리석음,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을 일깨워주신 다음에 뭐라고 대답을 주십니까? 본문 14-15절에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준 소유에 손을 대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 버리겠고 유다 집을 그들 가운데서 뽑아 내리라 내가 그들을 뽑아 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들의 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과 소유에 손을 댄 악한 이웃들, 곧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과 같은 이방인들을 다 뽑아버리겠다고, 바꿔 말해 끝날에는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악한 자가 성공한 것 같고, 승승장구한 것 같아도, 그 심판의 끝날에는 완연한 심판의 처소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답변해 주신 것과 같은 대답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3-4) 아무리 악한 자가 활개를 치고 승승장구할지라도 악인에게는 끝이 있듯이, 의인도 그 끝 날에 믿음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점이죠. 그러니 악한 자의 고난 앞에서도 당당하게 인내하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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