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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중시조는 노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물 중에 사람의 행위가 가장 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물로 홍수로 쓸어버렸습니다. 그런 그 이유에 대해 창세기 6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6: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시면서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오게 됐지만,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에 힘입어 땅에서 번성하고 충만하게 됐죠.
하지만 사람이 땅에 충만한 그때, 이 땅에는 포악함이 가득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냉혹하신 분이고, 실은 무자비하신 분으로 볼 수 있죠. 사람을 창조해 놓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실 때는 언제고, 남녀노소는 물론 지상의 동물들까지 홍수를 통해 멸하시는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얼음같이 냉혹하고 차갑고 싸늘한 분이십니다. 그것이 그 당시의 보편적인 인간의 관점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인간의 보편적인 평가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런 무자비한 하나님, 냉혹한 하나님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인간의 관점에서 평가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없애버린다 해서 피조물들이 창조주를 비난할 수는 없는 법이죠. 이를테면 도공이 흙으로 도자기를 열심히 만들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형상이 나와서 그 도자기를 깨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그 도자기들이 자신들을 빚어 만든 도공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또 인간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고 기뻐하셨던 하나님이셨는데, 그런 인간의 죄가 관영하고 온통 들끓어 오를 때, 그런 인간을 쓸어버리시겠다고 결심하신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끼? 하나님께서 그렇게 물로 쓸어버릴 작정을 하실 때까지 얼마나 그 인간들을 참고 또 참아오셨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런 하나님의 긍휼어린 인내와 오래 참으심을, 죄악으로 가득찬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뜻을 헤아릴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포악함은 수그러들지 않고 날로 더 잔혹해지고 더 포악해질 뿐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사인을 주시지 않았겠습니까?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망치소리,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소리, 그 모든 현장의 소리가 소문에 소문을 거듭해 나갔을 것인데, 바로 그것이 그들을 향한 카운트다운의 신호요, 인내의 한계를 알리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끝내 하나님께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그 망치질을 하고 대패질을 하고 톱질을 하는 노아를 비난하고 조롱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노아를 조롱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카운트다운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들이 없는 그 현장 속에 홍수로 쓸어버리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냉혹한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은 무자비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짓밟은 인간의 악함과 죄악이 불러들인 최후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읽은 예레미야 15장의 초반부 말씀이 바로 그런 흐름을 되짚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멸당하는 유대백성을 위해 예레미야가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는데, 그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본문 1절에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보내라” 모세와 사무엘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 유다 백성들의 죄에 대해 탄원한다고 해도, 나는 듣지 않을 것이란 답변입니다.
사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내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진노하셨죠. 그러자 모세가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탄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의 탄원을 듣고 그들을 용서해 주셨죠. 그것이 출애굽기 32장 11-14절과 민수기 14장 13-20절에 나오는 모습이죠.
그런가 하면 사무엘 선지자 역시 그런 죄악을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사무엘상7장 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그런데 설령 그때의 모세와 사무엘이 지금에 와서 하나님께 탄식하면서 간구하고 매달린다 한들, 하나님께서는 지금의 유다 백성들의 죄악에 대해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두 가지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 4절과 6절이 그것입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들을 세계 여러 민족 가운데서 흩으리라.” 므낫세는 히스기야 왕의 아들로서, 히스기야는 철저하게 우상숭배를 척결했고, 뿐만 아니라 조상 대에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도 정비했고, 그때까지 지키지 않던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들도 다 복원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스스로 교만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온갖 이방 신상과 각종 우상들을 예루살렘에 세우게 했고, 각종 산당들도 세워서 온 백성들로 하여금 타락의 늪에 깊숙이 빠져들게 했던 장본인이었죠. 바로 그런 므낫세의 죄악 때문에 유다 백성들을 흩어버린다,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이유가 6절에 나와 있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내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지쳤음이로다.” 므낫세의 배교로 인해 온 공동체가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더 이상 참고 인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유다 백성들을 향한 진노의 이 모습은 흡사 노아 시대의 하나님의 진노와 똑같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더 이상 유다의 죄악을 간과하지 않고 그에 응하는 심판을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끝장 심판인가 보다,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은 로마서에서 배웠듯이 무관심, 다시 말해 방치하심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회초리를 들어 자녀를 때리지도 않게 되죠. 그냥 방치해버립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시대에 심판하시고, 또 예레미야를 통해 그들을 끝내 심판하시겠다고 선포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지막까지도 애증을 갖고 있고,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전혀 관심이 없다면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를 그대로 방치해두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지만, 유다를 벌하시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 곧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 소수의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다 해도,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나라와 민족을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는 이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깨어 있는 자의 증표로 오늘 20절의 말씀을 우리에게 똑같이 주실 것입니다.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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