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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이사야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사20:1-6)

by 똑똑이채널 2022.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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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6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6:19). 여기에서 ‘닻’(anchor)이라는 것은 배를 항구에 정박시켜 놓을 때, 배가 바다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도록 견고하게 고정시켜 주는 것이죠. 인생은 마치 망망한 바다에서 항해하는 배와 같습니다. 폭풍이 일어날 때에 그 폭풍우로 요동치는 위험에 노출될 때가 많죠. 두려움이 엄습할 때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줄 닻과 같은 안전장치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소망입니다. 소망은 험난한 세상의 파고를 넘을 수 있는 힘입니다. 그 소망을 어디에 두며 사느냐는 중요하죠.

조선말기에 우리나라는 풍전등화에 휩싸였습니다. 대원군을 중심으로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위정척사파’와 고종과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구미제국과 통상관계를 수립하려는 ‘개화파’(開化派)가 대립했죠.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자 수구파의 기대는 무너졌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노골적으로 조선을 강탈하려 하자 개화파의 기대도 빗나가고 말았죠.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위기에 빠진 조선을 도울 나라는 청나라도, 그리고 일본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선 내부에서는 그렇게 두 파벌이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죠.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에 희망을 걸고 의지하려는 것은, 오히려 미래를 위태하게 만드는 위험한 발상임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앗수르의 사르곤(Sargon, B.C.722-705) 대왕의 군대가 블레셋 도시 중의 하나인 아스돗(Ashdod)을 쳐서 점령했을 때입니다. 그때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읍에도 위기의식이 고조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마치 전쟁 포로들처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삼년동안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도록 한 것이죠. 이것은 이집트와 에티오피아가 앗수르에게 패망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어리석게 이집트의 도움을 구하러 쫓아다니지 말라는 것, 또한 블레셋과 합세하여 앗수르를 물리치려는 헛된 희망 속에 살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세상의 외형적인 힘이나 군사력을 맹신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서 무엇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 주시는 것이죠. 그 깨달음은 작고 사소한 징조와 예표를 통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본문 1-3절이 바로 그것을 알려줍니다. 본문 1절에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고 했습니다. 앗수르 군대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정복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블레셋의 해변 도시 아스돗을 점령했습니다. 그때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크게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친앗수르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 있었는가 하면, 남쪽의 이집트에게 손을 내 밀자는, 이른바 친이집트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들로 나뉘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메시지를 주시면서 상징적인 행동도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슨 행동인가? 벗은 몸과 벗은 발로 예루살렘 거리를 삼년 동안 돌아다니게 한 것이 그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유다 사람들이 의지하려는 블레셋이나, 이집트 국가가 결국은 앗수르 왕에게 모두 패해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모습을 그 징조와 예표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이사야 선지자의 그런 기이한 행동 앞에 예루살렘 거민들은 모두 보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3년 동안 유다의 예루살렘 백성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바로 임하는 것이구나. 그러니 우리가 블레셋과 손을 잡을 것도 아니고, 또 애굽에게 손을 내 밀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더욱더 신실하게 붙잡고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본문 3절에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녔다고 했습니다. 바꿔 말해 우리 앞에 나타나는 작은 징조와 예표만 보고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만 듣고도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뉘우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어떤 예표나 상징을 보여주실 때 진정으로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그런 징조와 예표를 보여주셔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일부러 성령님의 음성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시편 49편 20절의 말씀과 같은 자들이죠.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가 칼을 빼들고 길을 막는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벗어나 곁길로 가고, 무서워 떨며 담 벽에 붙어, 발람의 발을 상하게 했죠. 그것이 민수기 22장 21절 이하에 나온 말씀인데, 그때 발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음성을 좇는 자라면, 그런 작은 징조와 예표 앞에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탐욕과 욕망 때문에 그 징조와 예표를 무시해 버렸던 자였죠. 그야말로 깨닫지 못한 자로서 멸망하는 짐승 같은 자였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징조와 예표를 보여주실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때 귀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5절에 나와 있는 ‘그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은 아스돗 사람들, 즉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스와 애굽’은 기원전 716년에 이집트를 정복한 에티오피아 왕조(Ethiopian)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같이 묶어서 취급하고 있는 것이죠.

왜 그런 말씀을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다 백성들이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깨우쳐 주기 위함이십니다. 블레셋이 ‘바라던 구스’나 블레셋이 자랑하던 ‘애굽’, 거기에서 ‘바라다’는 히브리어 ‘마바트’(מבט)가 곧 ‘기대’(expectation)와 ‘소망’(hope)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대하고 소망을 품어야 할 것은 구스 곧 에디오피아나 애굽 곧 이집트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기대를 걸고 소망을 품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거기에 소망의 닻줄을 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146:3)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146:4)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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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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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희망을 걸고 소망을 기대야 할 것은 무엇인지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본문 6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 블레셋의 아스돗 주민들이 앗수르 왕에게 벗어나려고, 주변국들을 믿고 소망을 기대했지만, 그 주변국들조차도 다 패망했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세상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이 왜 절망으로 끝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31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사람은 연약한 흙으로 빚어진 피조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에 애굽의 한계, 곧 사람이 지닌 한계입니다. 그러나 그 유한한 사람과 대조되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애굽의 군사력이나 말이나 함대를 붙잡기보다도, 더욱더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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