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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이사야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사17:1-14)

by 똑똑이채널 202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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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13장으로부터 시작된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바벨론(13장)과 모압(15장)에 이어 본문의 17장에서는 다메섹에 대한 경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메섹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수리아의 수도입니다. 바벨론과 모압처럼 한 나라를 일컫는 것이죠. 3절에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라는 부분에서 ‘다메섹’은 ‘나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만 보더라도 다메섹은 단순한 성읍이 아니라 수리아 나라 전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서울로 언급하는 것과 똑같은 경우죠. 그래서 이방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는 다메섹으로 그치지 않고 17장 이후에 애굽(19장), 해변광야(21장), 두마(21장), 아라비아(21장), 환상의 골짜기(22장), 그리고 두로(23장)까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나라를 감찰하시며 세계의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17장에는 다메섹의 경고라고 시작되지만 다메섹 나라만 경고하신 예언이 아닙니다. 다메섹과 더불어 북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의 말씀도 포함돼 있습니다. 특별히 ‘경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마싸’는 ‘짐’(burden), ‘발언’, ‘신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싸’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엄중한 말씀’, ‘엄중한 경고’로 번역되기도 하죠. ‘마싸’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은 부담감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엄중한 말씀’으로 번역된 게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경고는 무거운 짐처럼 ‘엄중한 말씀’이 되고 ‘중한 경고’가 되는 것은 그 대상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용어로서 ‘경고’는 호감이 가는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경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상황은 갑작스럽게 한 순간에 주어지기 보다는 상태가 악화되기까지 어떤 대상이 개선되지 않았을 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게 ‘엄중한 말씀’ 또는 ‘중한 경고’를 의미하는 ‘마싸’를 하시기 이전에 다메섹과 북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메섹에 대해 미래의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의 1절 말씀인데,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하는 말씀이 그것이죠. 실제로 이 예언 후 다메섹은 B.C.732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 패망하죠.

그런데 오늘 읽은 이사야 17장은 다메섹에 대한 경고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메섹과 더불어 북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도 나와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기에 2절의 ‘아로엘 성읍들’은 북이스라엘의 영토로 요단강 동편지역을 일컫습니다. 3절에 있는 ‘에브라임의 요새’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에브라임 지파의 영역을 일컫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방 나라의 다메섹을 경고하게 하셨겠습니까? 북이스라엘이 범죄했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경고를 받는 것은 당연해보입니다. 하지만 다메섹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나라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면, 굳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경고할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세계를 다스리시는 절대주권자이시고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시기에 적절한 조치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다메섹에 대한 경고는 궁극적으로 북이스라엘에 대한 책망과 경고에 달려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북이스라엘과 연합한 이방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을 전함으로서, 북이스라엘이 세상의 권력을 의지하는 게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다메섹과 더불어 이스라엘이 황폐해지게 될 원인을 10절 상반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북이스라엘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능력의 반석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 어느 민족, 어느 나라, 어느 사람도 온전치 못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과거 나를 도우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는 뜻입니다. 죄의 권세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셨고 세상의 험한 풍파로부터 보호해 주신 그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꼴입니다. 우리는 과거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생명을 보호받고, 홍해를 건너고, 또 출애굽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에 부딪힐 때 구원의 하나님,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 바로 그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그런 권세와 능력의 하나님을 등지고, 오히려 북쪽의 권세 있는 나라와 연합하여 의지하려는 속셈, 그것을 하나님께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가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인지, 아니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하나님인지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8절의 언급에서 알 수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아세라나 태양상과 같은 것, 인간의 손으로 만든 우상을 일컫는 것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사물과 현상을 두려워한 채 그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세라는 달 월 ‘월신’(月神)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해와 달을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낮과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해를 신비스러워하며 그런 것들을 신으로 섬겨왔죠. 그렇다면 오늘날의 아세라와 태양상은 우리에게 무엇이겠습니까? 밤낮으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입니다. 텔레비전과 영화와 광고 등에 수없이 나타나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오늘날의 태양신과 달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을 신처럼, 우상처럼 떠받들 때에, 하나님께서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그 모습은 마치 북이스라엘이 반석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메섹과 연합하는 것과 똑같은 꼴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0절 하반절에 이렇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가지도 이종하도다.” 구원의 하나님,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기쁨과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아숭배자일 뿐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좋은 생활환경에서 살지라도 자기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향해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 아무리 좋은 집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해도 감사와 자족이 없이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채우려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심령은 궁극적으로 기존에 있던 것까지 다 빼앗기는 상태에 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만큼 북이스라엘이 이방의 힘있는 나라와 연합하여 그것을 우상숭배로 삼는다면 너희들이 그렇게 망할 것이다, 하는 경고죠.

그렇다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17장에서 받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의 경고를 깊이 새기고 돌이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나라의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다메섹은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의 예언을 들었지만 돌이키지 않아 B.C.732년에 패망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엄중한 예언이 실현되어 다메섹이 패망하는 걸 눈으로 봤다면 분명코 돌이켰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다메섹이 패망한지 10년 뒤인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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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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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만을 나의 구원의 능력으로, 나의 반석의 능력을 삼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다메섹을 통해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타산지석 삼도록 해 주셨다면, 우리들도 주변에 교만한 인생이 패망하는 모습을 통해 늘 타산지석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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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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