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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 모압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혈연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이웃 나라인 이스라엘과 모압은 자국의 여건이나 주변국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관계였습니다. 어제 살펴봤듯이 여호와께서 이사야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모압의 멸망을 예언한 가장 큰 이유가 있었죠. 그것은 바로 모압의 우상숭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모스라는 우상을 섬겼는데,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14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앗수르와 바벨론을 들어 치셨습니다. 모압의 우상숭배는 이처럼 자국을 파멸로 몰아갔을 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인 이스라엘에게도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희고 흰 깃에 검은 때 묻힐세라. 진실로 검은 때 묻히면 씻을 길이 없으리라.” 조선시대의 어지러운 광해군 시절 선우당이, 동생이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말리며 지은 시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치권은 조선시대나 오늘이나 동일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비단 정치계뿐만 아니라 교계도 소위 정치 목사들이 보이는 작태로 인해 기독교의 위상이 많이 추락해 있는 상화입니다. 이처럼 죄의 속성은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도 파국으로 몰아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숭배 외에도 여호와께서 모압을 향해 노하신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5절에 의하면 모압 백성들은 조국의 멸망으로 인해 흩어진 채 이스라엘 땅에 당도해서, 자신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을 하죠. 본문 6절에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교만’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진 것”입니다. 그런데 ‘교만’의 성경적인 의미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 또는 “하나님과 동등해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의 성경적 의미입니다. 이른바 에덴동산에서 뱀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이 이야기를 듣고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자 바로 전까지 관심이 없던 그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6)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따 먹었죠. 그런데 하와는 자신이 먹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열매를 함께 있는 남편에게 주었고 남편 역시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보통 창세기의 이 장면에서 여자가 먼저 먹고, 여자가 남자에게 전해주었기 때문에 여자의 책임이 더 크지 않는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본문의 문장 그대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그녀가 문제의 열매를 먹었을 때, 남편이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바로 그녀의 곁에 있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었다’할 때 그 ‘함께’라는 단어는 ‘같이’(besides, with)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남편의 묵시적인 허락 하에 아내가 그 열매를 따먹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그 행위를 방관하고 인정한 남편의 행동이 더 파렴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어떤 이유로 해서 하나님과 동등해지겠다는 교만이 마음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 부부에게 제공한 보금자리인 에덴동산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최근 교계는 물론 일반 신문 지상에까지 오르내리는 교계의 비리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들이 너무 풍족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 대표적인 예가 사사기에 나와 있죠. 고난에 처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벗어나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되면 서서히 하나님을 멀리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경향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삶속에서 겪게 되는 고난은 우리를 교만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시작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즉 내가 얼마나 교만한지를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인지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들고,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고민하고 있는가? 그때 우리는 나 자신의 내면을 살펴봐야 합니다. 나의 내면 속에 겸손보다 교만이라는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비롯해 많은 예언자들을 통한 하나님께서는 모압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도록 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모압은 기원전 582년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하죠.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 역시 어느 순간 모압과 같은 처지가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모압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원인인 우상숭배와 교만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우상숭배는 교만의 결과입니다. 교만한 사람만이 자기 스스로를 우상화하고, 정욕을 우상화하고, 세상이 주는 기쁨과 물질을 우상화합니다. 그런데 교만은 하루아침에 형성되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고, 현실에 동화되면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교만이 굳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자신을 늘 겸손하게 할 수 있는 요인들을 가까이 하는 게 정말로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모압과 같이 교만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탐욕을 우상숭배로 연결시키지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주님만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유학 중에 프랑스의 한 조그마한 마을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조그마한 공동묘지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한국에 와서 목회할 때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있는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양화진묘원을 가꾸고 다듬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삶을 잘 돌아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그 양화진묘원을 둘러 보는 사람들은 자기 삶을 어떻게 가꾸어가야 할지 잘 알게 되는 것이죠. 그 목사님도 그 교회를 섬기면서 수시로 그 양화진 묘원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모습을 돌아볼 때, 늘 겸손한 종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것을 다짐하게 된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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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새벽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사16:1-14)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과거 우상숭배와 교만의 구렁텅이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모압의 모습을 통해 깨닫게 하시는 음성은 그것이겠죠. 나 자신도 주님과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삶을 살아가도록 당부하시는 것 말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교만치 않고 겸손하게 주님과 이웃을 섬길 때 온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의 주어진 삶속에서 그 겸손함을 실천해가는 복된 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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