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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라’고 나와 있습니다. ‘환상의 골짜기’는 도대체 어디를 두고 하는 말이겠습니까? 70인역(LXX) 본에는 ‘환상의 골짜기’가 ‘시온 골짜기’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환상의 골짜기’는 다름 아닌 예루살렘 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예루살렘은 시온산이기도 하고, 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을 일컬어, 보통 예루살렘이라고 칭하죠. 그만큼 예루살렘 도처에 ‘골짜기’가 형성돼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곳 예루살렘은 선지자들에게 예언의 말씀과 미래의 환상을 보여준 곳으로서 ‘환상의 골짜기’라고 부른 것이죠.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도 1절 말씀처럼 ‘지붕에 올라가’서 그곳 예루살렘 도성을 보다가 통곡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차 그 예루살렘 도성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것을 환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장면들이 너무나도 끔찍하고 비참하게 보이기 때문에, 자기 민족을 향해 울면서 가슴 아파했던 것이죠.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미래에 일어날 비극에 대해 그렇게 탄식하신 것과 같은 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37-39)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사야 선지자도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패망과 멸망을 바라보며 그렇게 탄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이사야는 지붕에 올라가, 경건한 몸짓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분향을 한 것이죠. 이른바 기도하는 모습을 취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경건한 몸짓을 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 골짜기를 기도 가운데 보게 된 것입니다. 그곳 성읍에서 환호성과 축제의 소리가 들려오는 모습 말입니다. 술잔이 부딪히고, 모든 취객들이 무너질 리 없는 성전과 성벽의 단단함을 노래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술에 취한 채 그렇게 지껄이고 법석을 떱니다.
그것이 본문 1-5절까지의 말씀이라면, 6-11절까지는 이제 엘람과 기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애워싼 모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또한 환상 가운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입니다. 그 예루살렘 성읍을 포위한 엘람의 기병과 기르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초강대국 앗수르의 용병 부대들이었습니다. 엘람의 기병들이 지닌 화살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기르인들이 가진 방패는 강력한 산 같이 기세 높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소동이 예루살렘 성읍에 취한 사람들의 흥을 깨트려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의 침입에 놀란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제 무엇을 합니까? 8절 말씀처럼 “수풀 곳간에 두었던 병기”를 허둥지둥 찾아내고, 9절 말씀처럼 “성벽을 보수하며 식수를 확보”하고자 하죠. 그래서 적들의 진입을 방해하기 위해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까지 만듭니다. 그것이 11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너희가 또 옛 못의 물을 위하여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를 만들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이를 행하신 이를 앙망하지 아니하였고 이 일을 옛적부터 경영하신 이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두 성벽 사이에 저수지까지 만들었지만, 과연 그것이 버팀목이 되어 주고, 생명을 건져 올릴 생수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는 그들의 경영은 결국 패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9장 23-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루살렘 성읍의 견고함이나 그들의 지혜와 용맹은 결코 자랑할 만한 게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이 참된 명철이요, 지혜임을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마음조차 없자,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면서 슬피 우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딸 이스라엘 백성들 곧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다 백성들은 도망할 능력이 있는 관원들조차도 모두 잡혀와 죽게 됩니다. 칼을 휘두르고 활을 쏴야 했을 지도자들이 도망을 쳐, 제 목숨 하나 건지고자 했는데, 도리어 그것조차 성사되지 못하고 수치가운데 죽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5절에서 그렇게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환상의 골짜기에 주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이르는 소란과 밟힘과 혼란의 날이여 성벽의 무너뜨림과 산악에 사무쳐 부르짖는 소리로다.”
그처럼 예루살렘 성읍을 향한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과 비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15절부터는 한 사람을 향한 경고로 바뀝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왜 하필 ‘셉나’였겠습니까? 셉나는 사실 국고를 맡은 왕실의 고관대작입니다. 풍전등화인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을 그가 자기 잇속에만 빨랐던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 백성을 바로 세우고 온전하게 하기 위해 애써야 했는데, 자신을 위해 화려한 무덤을 만들고 영광의 수레를 타는 데에만 골몰한 사람이 바로 셉나였던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내쳐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어 세움받은 사람이 엘리아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훌륭하게 자리매김 하지만, 집안사람들의 득세로 인해 그야말로 ‘삭은 못’과 같이 되고 말죠.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지만 나라의 요직에 집안사람들을 채워놓는 꼴입니다 이 모든 일이 자기와 마음에 맞는 사람들, 자기를 챙겨줄 사람들만이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자들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났지만 셉나와 엘리아김의 타락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런 자들로 채워진 나라에도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지도자와 그런 지도자를 닮은 사람들로 인해 주리고 아팠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마23:24) 사람들의 작은 미숙함과 부덕에는 그리 비판하면서 자기에게 있는 큰 불의에는 눈을 감고 살았던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인도자는 인도자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인도자라 칭해 주셨습니다.
사실 그것은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이 모두 지도자들이 바르게 서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다의 지도자는 ‘여호와 신앙의 나라’로 세우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자, 또는 동역자라는 사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므낫세 왕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버리고 우상숭배와 각종 점쟁이, 박수, 신접한 자를 세워 미신이 가득한 나라를 만들었던 것이죠(왕하21:3-7).
이것이 비극적 패망의 원인이었습니다(왕하24:3). 여호야김 왕도 마찬가지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악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왕하23:37)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도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왕하24:19)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리는 말씀을 깊이 새길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을 창조하며 살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살 것인지를 선택해하는 것 말입니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악을 행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길을 살아 진리로 자유로워지는 인생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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