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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기다리고 소망하는 자신만의 ‘그 날’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그 날’은 방학식이나 생일날이기도 하죠. 군인들에게 ‘그 날’은 제대 날짜 아니겠습니까? 사랑에 빠진 두 젊은이에게 그 날은 결혼 날짜일 것입니다. 임산부에는 출산 날짜가 ‘그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소망하는 ‘그 날’이 있다는 것은, 주어진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도란 소망하고 기다리는 ‘그 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소망하는 ‘그 날’ 때문에 오늘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햇빛이 쨍쨍 비치는 좋은날이든, 비가 오고 바람 부는 궂은 날이든, 건강한 날이든 병든 날이든, 잘 풀리는 날이든 모든 게 꼬이는 날이든 상관없이, 성도는 행복할 이유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성도에게 ‘그 날’이란 과연 어떤 날이겠습니까? 우리는 어제 이사야 11장을 통해서 ‘그 날’을 슬쩍 엿보고 그려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시는 날,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을 판단하시는 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도 즐겁게 놀이할 수 있는 날,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한 날이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을 기다리고 소망했습니다.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오는 날이 ‘그 날’이었고, 앗수르의 군사로부터 큰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이 큰 길을 지나 온 날이 ‘그 날’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그 날’이란 바로 구원의 날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빠져나오던 날 날, 홍해바다에서 구원받은 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입성하던 날,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정복한 날, 더 나아가 블레셋의 침략을 물리치고 승리한 날, 바로 그런 날들이 구원의 날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을 기다리고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은 단지 미래의 날뿐만 아니라, 과거의 날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우리가 기다리고 소망하기 때문에 ‘그 날’은 분명 미래의 날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대신 담당하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전에는 진노의 자녀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그 날’은 이미 성취된 과거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여전히 고난의 길을 걸을지라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잊을 수도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이죠. 모든 것을 망각할지라도, 결코 이 구원의 사실만큼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매주 십자가 앞에서 이 사실을 되새김질하는 자가 참된 감사도 할 수 있고, 영혼 깊숙이 기뻐할 수도 있는 것이죠. 바로 그런 심령 속에서 마르지 않는 생수의 강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의 우물, 구원의 강물이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 날’을 기억하고, 미래를 내다보면 ‘그 날’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그 날과 미래의 그 날을 소망하는 성도는, 주어진 현재를 구원의 ‘그 날’로 삼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갖고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의 상황도 녹녹치 않지만, 과거에 은혜를 베푸셨던 그 하나님의 역사적인 날을 기억하고 있는 성도, 뿐만 아니라 미래에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혹은 천국에 입성할 그 날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지금의 상황속에서도 현재적인 그 날 안에서 기뻐할 수 있고, 자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오늘 현재를 감사와 기쁨의 구원의 ‘그 날’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무엇인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이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어떤 문제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것이죠.
이사야 2장부터 시작된 거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한 싹, 즉 메시야를 통한 회복의 ‘그 날’이 도래함으로 마감이 됩니다. 바로 ‘그 날’에 이사야는 감사와 찬송을 드리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고 고백을 하죠. 그러나 그 고백은 오늘 우리가 드리는 고백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나의 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때문에 힘이 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 선물을 주시는 분입니다. 복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성공과 평안을 주시고,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나 주어진 물질도 감정도 결코 우리 힘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성도에게 있어서 참된 힘의 원천은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의 노래라고 고백하는 것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저자는 1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고 말하고, 4절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감사란, 선물을 받은 것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감사를 하곤 합니다. 힘 있는 자에게 아부하기 위해 감사 표현을 합니다.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 감사하기도 합니다. 상대를 아랫사람으로 묶어 두기 위해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란, 먼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도 안위해주시기 때문에 그것 역시 감사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참된 감사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지금 여기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니죠.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여기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전하지 않고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하게 되죠. 왜 그렇습니까? 본문 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 만물보다, 만유보다 더 크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계획, 그 하나님의 힘을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미 지난 날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셨고,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고 계시며, 이미 우리가 가야 할 길보다 먼저 앞서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내가 어떤 일을 겪더라도, 어떤 일을 행하더라도, 나보다 앞서가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홍해를 건널 때에도, 그리고 가나안 땅에도 들어갈 때에도 함께 하신 하나님이신 것처럼, 나의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함께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오늘도 굳게 붙잡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오직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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