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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서는 총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이사야서의 세 번째 부분을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사야에 대한 소개와 함께 이스라엘의 문제점을 알려주고 있는 1-5장까지가 첫 번째 부분이고, 하나님의 비전을 담고 있는 6장은 그 두 번째 부분, 그리고 이스라엘의 빗나간 믿음을 지적하는 7장-39장까지가 그 세 번째 부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의 빗나간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읽은 9장 말씀도 그 모습을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죠. 남왕국 유다의 10번째 왕인 웃시야가 죽고, 그 아들이자 11번째 왕인 요담도 죽고, 그리고 웃시야의 손자이자 남왕국 유다의 12번째 왕인 아하스가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그때 북이스라엘의 18번째 왕 곧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 왕(B.C740년)이 아람나라 곧 시리아와 손을 잡고 연합군을 이끌고 남왕국 유다를 처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긍휼이 여기셔서, 그 연합군이 모두 물러가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응당, 남왕국 유다의 왕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만을 경외하겠다며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세상의 눈에 보이는 기준에 따라, 차후에 또 다시 처들어올지도 모를 일에 대비한다면서, 더 강력한 신흥강대국 앗수르 제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조공을 바치고, 그 나라의 신전까지 유다 땅에 가져와 하나님의 성전 주변에 버젓이 세우게 하고, 성전의 문은 폐쇄시켜버리고, 심지어 그 앗수르 제국의 신에게 유다 백성을 인신제물로 바치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행하는 장본인이었습니다.
과연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소와 나귀도 그 주인을 알건만 유다 백성들은 그 주인을 알지 못하는 그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과연 그들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무너져 내리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빗나간 믿음의 모습, 다시 말해 남유다의 어처구니 없는 모습 앞에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심을,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유다 백성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이방 나라를 들어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시며, 그래도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엔 그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죽이고 멸망시키시는 게 본심이 아니시죠. 오히려 그렇게 강력하게 선포하시는 것은 그들이 그때라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과 같은 격입니다. 집나간 둘째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집으로 돌아올까, 동구 밖으로 나가, 기다리는 그 심정과 똑같은 격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도 그런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길 바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말씀만 뚝 떼어 놓고 보면 심판이나 멸망에 관한 내용은 전혀 찾아 볼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9장 전체는 이사야서의 세 번째 부분에 해당된다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씀에 포함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1-7절은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으로 가득 차 있지만 8-21절은 그래도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 앞에 회개하지 않을 경우, 끝내는 그들을 징계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4장 15절을 통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의 그 상황을 묘사한 말씀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바로 본문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죠.
과연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전까지는 스불론이나 납달리 지경을 비롯하여 갈릴리 땅에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그들에게 빛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생명과 진리의 빛이 임했으니, 어찌 그것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찌 그것이 흑암이 걷히고 영원한 빛이 임하는 은총이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것을 지금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깨우칠 수 있도록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긍휼과 은총을 구원해 내셨고, 광야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여, 완전한 자유와 땅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해 줬는데, 이제는 그 은총을 잊어버리고, 마치 너희들이 잘 나고 잘 돼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 같지만, 너희들의 힘만 믿고 날뛰고 있지만, 그러나 본래 너희들은 주님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 아니었더냐, 너희들에게 주님의 생명이 임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너희들에게 어둠이 걷히고 광명의 빛 속에서 살 수 있었더냐, 바로 그런 차원으로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죠.
그래서 4절 말씀처럼 예전에 너희들이 광야를 지나고, 그 가나안 땅에서 죄악 가운데 하나님을 등지고 살 때, 이방 세력들을 붙여서 너희들을 압제할 때, 너희들이 내게 부르짖고 내게 돌아오면 내가 그들의 채찍과 막대기를 꺽어 주지 않았더냐, 그런데 그것을 너희들이 지금 잊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질책입니다. 실로 그랬습니다. 사사시대의 모습을 지금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12명의 사사들이 나섰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할 때 이방 세력들, 특별히 가나안의 미디안 족속들을 붙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하게 했는데, 그럴 때 12명의 사사들을 동원해서 그들을 물리치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사기의 지도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이 본문 6-7절입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시대적인 어려운 난관의 때에, 이방 세력의 압제에 때, 하나님께서 여러 사사를 세우셔서 그들을 물리치고 평강을 더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정의와 공의로 그 나라를 보존케’ 한다는 말씀이죠. 곧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사상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본문 1-7절 말씀을 통해 예전에 애굽땅에서, 또 가나안 땅에서 베푸셨던 그 하나님의 은혜를 떠올려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권면입니다. 그런데 과연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패역부도한 짓들을 벌입니다. 그래서 본문 8-21절을 통해, 먼저는 북이스라엘의 베가, 곧 19대 호세아 왕때 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완전히 몰락하고 마는데, 바로 그 앞의 왕인 베가 왕이 아람 나라의 연합군을 대동해 처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곧 심판을 당해 멸망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 같은 상황의 말씀을 본문의 후반부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만큼 아직 살아 있다고 떵떵거리고 있는 너희 유다 백성들만큼이라도 북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내 앞에 나아와 바른 길, 생명과 진리의 길을 걷도록 하라는 촉구와 같은 것이죠.
그래서 본문 10절 말씀처럼 북이스라엘 땅의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 자기 힘과 능력을 의지한다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11절 말씀처럼 아람의 르신이 치도록 할 것이고, 12절 말씀처럼 블레셋이 또 뒤에서 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더 강력한 이방 나라들을 보내 압제하고 끝내는 심판의 모습을 볼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강력한 심판을 선포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나님 앞에 돌아오라는 권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신 그 하나님만을 우리의 의지할 대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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