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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내가 따라가야 할 주님이 내 기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실 때가 있고, 내가 믿고 의지해야 할 주님이 무기력하게 보일 때도 있기 때문이죠.
오늘 읽은 이사야 11장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이새의 뿌리에서 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아울러 그 메시아는 다윗의 언약의 성취자로 오실 것과 함께, 연약하고 미천한 모습으로 오실 것도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의 영이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 곧 성령으로 감동되어, 하나님을 경외함은 물론이요, 공의와 정직으로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것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완전한 평화의 왕국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죠.. 그리고 그 때에 온 세계 사람들이 그분에게 나아올 것이고, 이스라엘의 흩어졌던 백성들도 돌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예언은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가 세우실 교회와 하나님 나라에 의해 성취될 것을 암시하고 있죠.
그런데 오늘 본문 1절에서 ‘그 싹’이 ‘그 뿌리’에서 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란 다윗의 아버지이죠. 곧 유다의 후손 곧 다윗의 후손이라는 줄기에서 그 메시아가 나올 것을 선언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뿌리’에서 한 가지가 날 것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뿌리’를 영어성경으로는 stump로 곧 ‘그루터기’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루터기란 옛 시골말로 하면 끌텅을 말하는 것이죠. 그 끌텅은 실은 땔감으로 쓰일 뿐입니다.
여기에서 질문이 제기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가 그렇게 끌텅, 곧 그루터기를 통해 태어나시는지 말입니다. 보다 멋지고 화려한 레바논의 백향목을 통해 나오실 것을 예언하면 안 되는지 말입니다. 왜 하필 그 보잘 것 없는 그루터기에서 태어나고, 나실 것을 선포하는지 말이죠.
사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베들레헴 사람이 아니라 나사렛 사람 예수라고 불려졌습니다. 베들레헴은 수도 예루살렘 근처의 소읍으로 생활여건이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는 베들레헴과는 달리 깡촌 중의 깡촌이요, 빈민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 사는 것만으로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와서 친구 나다니엘에게 나사렛 예수라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다나엘이 대뜸 뭐라고 말합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 하고 대꾸했죠. 그만큼 나사렛 그 촌동네는 모두가 멸시하고 조롱하던 그런 동네였던 것이죠.
그런데 마태는 마태복음 2장 23절에서 그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하고 인용하고 있죠. 마태는 분명히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만 구약에는 메시아가 ‘나사렛’에서 자란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구약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마태는 선지자가 그렇게 말했다고 인용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우리말 번역에는 단수인 ‘선지자’로 되어있지만 원문에는 ‘선지자들’ 곧 복수의 선지자들이 한 말로 인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마태는 그렇게 기록했던 것일까요? 과연 나사렛이란 지명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선지자들이 나사렛에서 메시아가 태어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한 말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초라한 지위와 보잘 것 없는 신분 때문에 거절당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예언한 게 그것이죠.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메시아가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것은 이사야 53장에도 있고, 스가랴11:4-14절에도 있고, 시편22편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 다수의 선지자들이 메시아가 고난받는 메시아임을 예언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태가 바로 그런 선지자들의 예언을 인용한 것이죠. 바꿔 말해 나사렛이란 특정 지명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메시아는 그런 고난의 현장 속에서 오실 것을 마태가 내다봤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은 나사렛이란 지명과 그 의미가 가장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예언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메시아가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처럼 온다는 것입니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그 후손 중에 새로운 싹, 새로운 줄기가 나와서 죄인들을 구원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한다는 것이죠.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메시아가 어떻게 옵니까? 이새의 줄기에서 나온 싹이요, 그 뿌리 곧 끌텅, 다시 말해 그루터기에서 난 가지입니다. 이 말은 큰 나무의 밑둥을 자른 그루터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루터기에서 나온 싹은 절대로 큰 나무로 자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줄기에서 나온 싹도 마찬가지죠. 나무의 기둥줄기를 잘라버리면 그 나무는 잔가지만 무성하기 때문이죠. 다시는 굵은 기둥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모습으로 올 것, 바로 그런 비천한 나사렛과 같은 상황에서 자랄 것을 암시한 말씀입니다. 더 이상 클 수 없고 대성할 수 없는 조건에서 메시아가 나온다는 것 말입니다.
여기서 ‘연한 새싹’이 히브리어로 ‘네체르’입니다. 오실 메시아를 ‘연약한 싹’으로 묘사한 이 예언은 나중에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으로 불리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마2:23)는 점입니다. 왜 하나님은 메시아를 레바논 백향목 같이 세우지 아니하시고 ‘네체르’ 곧 여린 새싹으로 보내셨겠습니까? 왜 예수님을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 사람이 아닌 깡촌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게 하셨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만한 자를 가장 싫어합니다. 교만한 자는 예수님 앞에 나오고자 하지만 나사렛이란 상황 앞에 좀체 나오려고 하지 않죠.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일부러 가장 낮아지게 하셨고,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동시에 교만한 인생을 달아보기 위한 하나님의 시험이기도 하죠. 겸손한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모습이 레바논 백향목이든 여린 새싹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부요한 상화이든 가난한 상황이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이 잘 되었을 때도 겸손히 주님을 신실하게 쫓고, 자신의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도 더욱더 주님을 쫓는 자죠. 하지만 교만한 자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그렇게 주님을 좇고 의지하다가도 일이 잘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주님께 무릎을 꿇지 않는 법이죠. 바로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환히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부하든 가난하든, 잘 낫든 못 낫든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만을 바라보도록, 메시아 되신 주님을 예루살렘이 아닌 나사렛 출신으로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6절 이후에서는 메시아 왕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묘사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서 그 옛날 에덴동산의 모습을 회복케 하는 그림이죠. 그곳에서는 야생의 맹수들이 약한 동물을 해치거나 사람을 위협하지 않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소를 함께 돌보며 독사도 물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이요, 그것이 궁극적인 샬롬의 나라입니다. 누가 과연 그 나라에 입성하여 평화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이 세상의 약육강식의 가치관으로는 누릴 수 없죠. 이 세상에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그런 평강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그루터기에 돋아난 새싹을 존중하는 자들, 다시 말해 연약하고 볼품없는 자들을 품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자들만 그런 샬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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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새벽시간에 우리의 가치관이 백향목에만 메어달려 있지는 않는지, 점검해 보시고, 오히려 끌텅, 곧 그루터기의 연한 새싹에도 더욱더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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