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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창세기 12장이 아브라함의 소명장이고 사도행전 9장이 사도바울의 소명장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이사야의 소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오셔서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가 언제인지를 1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바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웃시야 왕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열왕국 중, 남 왕국 유다의 11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는 16살이 되던 해 곧 주전 790년부터 739년까지 근 52년 간 남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초창기에 하나님을 잘 믿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형통케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삶이 형통하면 형통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 형통함에 도취된 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고 하다가 그만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인생의 나머지를 별실에 지내면서 그 아들 요담으로 하여금 나라를 통치하도록 이끌어주다가, 끝내 문둥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했던 웃시야 왕이 죽던 그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진노 아래서 죽어갈 때, 누군가는 은혜 안에서 부름을 받는 것,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지, 받았다면 언제 받았는지,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은 없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진 분도 계십니다. 어떻게 부르심을 받았던지 간에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겠다고 결심해서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출발점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인함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신비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했고, 그 곁에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고,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그 둘로는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은 곧 천사를 의미합니다. 천사들이 두 날개로는 얼굴을,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면서 외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 취해야 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렇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피조물이 어디에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천사라도, 그 어떤 인간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인간의 자기 모습을 감추는 것 뿐이죠.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이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합니까? 별 것도 아닌 데도 우쭐대는 경우도 많고, 나 자신보다 형편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하나님을 향해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많죠. 그 모습은 마치 누가복음 18장 11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리새인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 같지만, 실은 자기 자랑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천사들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허물을 가리며 유일하게 아뢸 수 있는 단어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는 말 뿐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공적으로 자랑하고, 자기 할 말을 하는 경우가 많죠. 왜 그렇겠습니까? 자기 연약함과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의 실상에 대해 모르기 때문이죠. 오로지 자신이 잘난 존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진정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며 높이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의 자세는 바로 그 모습이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의 모습 말입니다.
이 고백은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과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인 세리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세리는 바리세인과 달리 그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때 주님은 어떤 반응을 보여주셨습니까? 주님은 바리새인을 의롭다고 인정해주거나, 그의 기도를 칭찬하신 게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세리를 의롭다고 하고, 그의 기도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세리의 태도가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나 자신만 봐도, 그리고 이 세상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봐도, 우리는 환히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세리 같은 사람보다는 바리새인 같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롭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과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부족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본문 8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시기보는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고, 또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길도 감수해야 함을 알게 해 줍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런 이사야의 고백 속에서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하나님을 뵈었다고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라며 자기 자신을 낮춘 이사야 선지자가 이제는 정반대로 자신감 넘치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걸 과연 교만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이사야 선지자는 자기 실존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신을 드리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교만은 자기 실존도 깨닫지 못한 체 자신을 드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자신감의 출처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지만, 헌신을 위한 자신감은 그 출처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죠. 결과가 동일한 것 같지만, 그 출처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가 주어지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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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으며, 자신의 실존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자기 삶을 내어드리는 도구로 산다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도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며 겸손히 무릎을 꿇는 사람입니다. 그럴 때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의 진노로 인생을 마감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인정을 받는 이사야 선지자로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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