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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언서들도 그렇듯이 이사야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두 가지 큰 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1-39장까지가 하나님의 심판을 40-66장까지가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7장 1-11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용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웃시야 왕이 죽고, 그 아들 요담도 죽고, 그 요담의 아들, 다시 말해 웃시야 왕의 손자인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그때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연합군이 남왕국 유다를 침략하려고 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로 인해 아하스 왕과 유다 백성들은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죠. 본문 3절 말씀처럼 “너는 네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서 아하스를 만나라. 당신은 삼가 흔들리지 말고 조용히 하시고,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처들어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부지깽이 곧 불에 타다가 만 막대기에 불과할 것이오. 그러니 두려워하거나 겁을 먹지 마시오. 설령 그들이 유다를 쳐서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운다 할지라도 그 계략은 절대 성공치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곧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4-9절의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10-11절을 통해 그런 말씀도 전하게 하시죠. “네가 정녕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믿을 수 있도록 네게 징조를 보여주겠다. 네가 어떤 징조든지 구하라”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은 본문 12절을 통해 그렇게 고백합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어떻습니까? 어찌 보면 믿음이 있는 고백 같지 않습니까? 마치 신명기 6장 16절 말씀처럼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에 입각한 신앙고백 말이죠. 하지만 13절 말씀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이사야는 아하스의 말을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하스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는 것이 신앙적인 고백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고백임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징조를 보여주실 것이라고 선포하죠. 본문 14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더 나아가 본문 16-25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유다 나라가 앗수르 제국에게 압제당할 걸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집니다. 그것은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 순종하길 원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징조를 보여줄 터이니 어떤 징조든지 구하면 내가 응답해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이죠. 그런데 아하스 왕은 구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고 했죠. 그것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불신의 고백입니다. 진짜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 때문에 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하스 왕이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런 현실적인 일이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에게는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이 당장 먹고 사는 현실과 직결된 일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해라. 하나님이 너의 생존을 책임지고 있음을 믿어라’ 하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아하스 왕은 경건의 능력은 없고 모양만 있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포장하죠. ‘암요. 제가 기도하고 있고, 말씀보고 있고,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교적인 모습은 보여드리고 있으니, 이제 내 생존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만히 좀 계셔 주십시오. 내가 당면한 문제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해주지 않을 거면서, 왜 그렇게 간섭하려 하십니까? 지금은 비록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내게는 해결할 묘책이 있으니, 자꾸 하나님께 굴복하라고, 의지하라고, 강요하지 마십시오.’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아하스 왕을 보시는 하나님,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 과연 약속한 징조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죠. 놀랍게도 그 말씀은 아하스 왕의 믿음이나 순종과 관련해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고, 순종의 사람이라, 우리와 함께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불순종과 죄악과 허물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그 임마누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문의 말씀 속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14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하고 말씀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처녀의 아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 있겠지만, 본문의 맥락 속에서 살펴본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에게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 이사야를 도와서 무슨 일을 하거나, 아하스 왕에게 충고를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딱히 그 아들이 하는 일이 없는데, 왜 굳이 그 아들을 데리고 가라 하신 걸까요? 그것은 이사야의 아들이 가진 이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아들의 이름은 ‘스알야숩’입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은 자가 무엇인지는 앞장에서 읽은 6장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남은 그루터기에 관한 말씀은 이사야의 소명 가운데 나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누구에게 가서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하고 물어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죠. “너는 가서 내가 이 백성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심판할 것임을 알려라. 그러나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가 남지 않느냐. 그와 같이 내 심판을 이겨낸 거룩한 씨로 말미암아 이 땅에 새로운 나의 백성들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하고 말이죠.
바로 그런 맥락 가운데서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 왕에게 간 것입니다. 그 아들 스알야숩 곧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가르쳐주도록 말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 징조 중의 징조, 곧 임마누엘의 메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 임마누엘은 ‘처녀의 아들’을 통해서 완성되는 실체이기 때문에, 처녀는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존재요, 그것은 사람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로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징조의 말씀이 마태복음 1장 21절로 연결되는 것이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그리고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말이죠. 그렇기에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일이자,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성취되는 일임을 미리서 약속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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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순종을 잘 하고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나님’을 약속하신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죄를 안 지을 줄 알고 약속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우리 자신의 모든 연약함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약함과 악함 중에 있는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로 삼아주신 것이죠. 그것보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하나님의 명확한 징조가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는다면 로마서 8장 32절 말씀도 굳게 붙잡을 수 있기 바랍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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