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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열왕기상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왕상13:1-34)

by 똑똑이채널 2021.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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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왕정 후반기에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 떠났습니다. 수많은 병거와 마병을 거느렸고, 1000명에 달하는 처첩들을 통해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타락했고, 그녀들이 모신 이방 신들에게 영향을 받은 솔로몬도 영적으로도 타락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서 그 길에서 돌아서길 바랐지만 그 말씀에 끝내 순종치 않았죠.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내우외환에 휩쌓이게 했는데, 나라 안쪽에서는 그의 충성스런 신하이자 부자 장수인 여로보암이 반기를 들었고, 나라 밖에서는 동쪽의 암몬 왕 하닷이 그리고 북쪽에서는 다메섹 왕 르손이 솔로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실 것을 천명하셨는데, 그 사실을 여로보암 장구에게 알려줬죠. 그러자 솔로몬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하는데, 그는 그 자리를 피해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애굽 왕 시삭 밑에 숨어 있었죠. 그래서 솔로몬이 60세 즘에 죽자,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잇습니다. 하지만 그는 북쪽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자들에게 승인을 받고자 세겜에 올라갔는데, 그 때는 이미 애굽 왕 시삭 밑에 있던 여로보암도 와 있는 상태였고, 여로보암을 위시한 북쪽 10지파의 대표자들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원하는 바를 표출했습니다. 이른바 솔로몬과는 달리 개혁하길 바라는 열망을 내비친 게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솔로몬 치세 때엔 온 백성들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고통스러워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초반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전도 짓고, 또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사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나마 백성들이 솔로몬 왕을 따르고 무거운 세금까지도 납부했지만, 솔로몬이 국정 후반기에 보여준 모습을 볼때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수많은 병거와 마병을 거느렸고, 1000명에 달하는 이방 여인들의 치마폭 속에 놀아나면서 영적으로 타락해가는 솔로몬 앞에 그 무거운 세금을 내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것을 지금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개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현명하고 지혜로웠다면 그와 같은 북쪽 대표자들의 말을 듣고 받아들였을텐데, 그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서 더 무거운 세금을 징수할 것을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통일왕국은 솔로몬 사후에 분열왕국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남쪽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통치하게 되었고, 북쪽은 10개 지파를 대표한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새로운 나라를 펼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개혁적인 열망을 모아 왕이 된 여로보암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백성들이 원하는 정책을 펼쳤는가?

어제 살펴 본 것처럼, 결코 그는 개혁의 중심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북 이스라엘 왕국의 남단인 벧엘과 최북단 단에 금송아지 신상과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이라며 숭배하게 만들었고, 레위인이 아닌 일반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 섬기게 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절기가 아닌 또 다른 절기들을 고안해 내서 색다른 절기를 지키게 했습니다.

과연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그 같은 엉뚱한 짓들을 버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도 그곳에서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더욱이 그 유다 왕국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하나님의 절기를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여로보암은 그래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약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차츰차츰 남유다 왕국에 마음이 빼앗겨 흡수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엉뚱한 신상과 절기들을 만들어 숭배케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북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개혁의 염원을 그 스스로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여로보암이 곧 하나님의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여로보암이 그렇게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서 어긋난 길을 걷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남쪽의 하나님의 사람, 곧 남 유다의 선지자 한 사람을 보내 여로보암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설 것을 깨닫게 한 내용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사람도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면 어떤 화를 당하는지도 일깨워줍니다. 본문 1절에 보라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여로보암이 남쪽 벧엘의 금송아지 신전 앞에서 분향하고 있는 상황을 말씀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의 선지자를 이미 그곳에 보내셨죠. 그래서 제단 앞에서 분향하던 여로보암 왕을 향해 그 선지자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제단아, 제단아.”하고 말입니다. 그때 제단의 어느 쪽에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자, 여로보암 왕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보면, 여로보암이 손을 뻗어 저 놈 잡아라하고 숨 가쁘게 고함을 치는데, 그 순간 당황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여로보암 왕이었습니다. 제단이 갈라지고 있고, 여로보암 왕 자신의 손이 그 순간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자기 손을 예전처럼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회개하기는커녕 당장 자기 문제만 해결받고자 한 모습이죠. 그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가 원상회복이 됩니다. 그러자 여로보암은 그 선지자를 자기 집에 모셔 후한 대접을 하고자 하죠. 하지만 그 선지자는 왕과 함께 가지 않겠고, 어떠한 것도 먹지 않겠다고 단언하죠. 이른바 왕의 길이 아닌 마이 웨이’(My way)를 걷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본문 1-10절까지 내용이라면, 11-32절까지는 무슨 내용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 앞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개혁의 대상입니다, 하는 내용을 전반부에서 일깨워줬다면, 후반부에서는 비록 하나님의 선지자라 할지라도 영적 분별력을 상실하면 얼마든지 세상 유혹에 넘어갈 수 있다는 점, 바꿔 말하면 그도 실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로보암 왕에게는 그 어떤 것도 먹지 않겠다던 그 젊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제 자기 길을 가는데, 그 소식을 전해들은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그 젊은 선지자를 꼬드기지 않습니까? 이른바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면서 자기 집에 가서 함께 음식을 먹도록 하자는 것이었죠. 그때 그 젊은 선지자는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채 온갖 것들을 먹고 배부르게 되었죠. 왜 그 늙은 선지자가 그 젊은 선지자를 그렇게 유혹했는지 그 이유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얼마든지 추측할수 있죠. 그 젊은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을 만난 것은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바른 개혁의 길을 걷도록 촉구하기 위함이었다는 점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늙은 선지자가 굳이 그 젊은 선지자를 데리고 먹을 것을 제공한 이유는 뻔합니다. 그의 개혁의 열망을 꺾고자 하는 것이죠.

안타까운 것은 여로보암 왕 앞에서는 먹지 않겠다던 그래서 자기 길을 가던 그 젊은 선지자가 그 늙은 선지자의 유혹에 넘어가 먹을 것을 먹고 자기 집으로 갈 때 어떤 화를 당하게 됩니까? 본문 24절처럼 사자가 길에 나타나 그를 물어 죽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의 시체나 그가 타고 온 나귀는 사자가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30절에 그 늙은 선지자도, 개혁을 막고자 했던 그 늙은 선지자 뒤늦게 회개하면서 내 형제여하고 슬피 울며, 그의 시신을 장사해줍니다. 젊은 선지자는 젊은 선지자대로 영적 분별력을 상실할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 늙은 선지자는 젊은 선지자의 개혁을 막고자 할 때 정말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모두 지켜본 여로보암 왕은 과연 어떻게 합니까? 본문 33-34절에서 증언하듯이, 여로보암 왕은 그 젊은 선지자를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기 손이 마비되는 사건을 겪었음에도, 그리고 그 늙은 선지자가 그 젊은 선지자의 길을 그릇되게 인도하는 게 얼마나 큰 화근인지를 지켜봤음에도, 그는 개혁자의 길을 가지 않고, 자기 마이 웨이’(My way), 욕망의 길을 걷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마이 웨이를 걷는 자들이지만, 여로보암이 가던 마이 웨이와는 달리, 그 여로보암 앞에 선 젊은 선지자의 마이웨이를 걷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여로보암이 왕이 된 후 엉뚱한 일들을 벌였고, 그것이 그 스스로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젊은 선지자를 보내서 그의 어긋난 길을 책망하셨는데,

그리고 늙은 선지자가 그 젊은 선지자의 길을 막을 때 얼마나 큰 화근이 되는지를 분명히 목격한 여로보암이었는데도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고 자기 욕망의 길을 걷습니다.

오늘도 성령님의 음성을 세밀하게 듣게 하시고,

저희들이 개혁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스스로 깨닫고 하나님의 길을 걷게 하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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