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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열왕기상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왕상11:1-13)

by 똑똑이채널 202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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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5장에서 솔로몬은 성전건축에 필요한 재료들과 인부들을 준비한 모습을 보여줬고, 6장에서 7년 동안 건축한 과정들을, 7장에서 13년에 걸친 자기 왕궁의 건축과 더불어 성전 안팎에 필요한 기구들과 두 기둥을 세운 모습, 8장에서는 법궤를 안치함과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했고, 그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의 기도를 드린 내용과 더불어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 것을 촉구하는 축복기도 그리고 2주일간에 걸친 봉헌식 내용을 살펴봤고, 9장에서는 솔로몬이 성전과 자기 궁궐 이외에 여러 성들과 홍해 앞 바닷가에서 배를 축조한 모습까지 기록하고 있고, 10장에서는 그와 같은 솔로몬의 부귀와 영화의 그 명성들을 확인코자 세계 곳곳에서 사신들을 보냈는데, 그 중에 아라비아 남서쪽에 위치한 스바 여왕조차 솔로몬을 찾아 서로간의 동맹국 협정을 체결하고 돌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솔로몬이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서 비롯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푼 은혜 때문에 그가 누리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10장 말미에 솔로몬이 아주 자연스럽게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그 스스로 은금을 많이 쌓고, 수없이 많은 말과 병거를 거느리게 된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수준과 규모에 맞게 사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서 솔로몬이 자기 제국의 규모에 맞게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사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례와 법도에 분명하게 밝힌 게 왕이 될 자는 말과 병거를 많이 두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었죠. 그런데 솔로몬은 그의 부귀에 영화에 걸맞게 말과 병거를 많이 두게 되었는데, 그것이 스스로를 타락하게 만든 단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11장 말씀은 10장 후반부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으로서, 그가 타락하게 된 그 과정들을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이른바 솔로몬이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되면서부터 말과 병거를 많이 두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그친 게 아니라, 세속적인 가치관, 곧 그 시대에 이방 왕들이 행하는 풍습, 곧 수많은 아내와 첩을 거느리는 그 모양새를 그 스스로도 취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살기보다는 세상적인 방식,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왕국을 유지하고자 했던 솔로몬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본문 1절에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이른바 솔로몬이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모압과 암몬 등의 이방 여인들을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1717절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들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라고 단단히 경고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3416절에서도 이방인들과의 통혼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과 결혼하게 되면 그 이방인이 섬기는 이방 신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엄격하게 금하신 것이죠.

그런데도 솔로몬은 그런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2절 후반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금하신 이방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물론 솔로몬의 그런 행태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죠. 그는 왕 위에 오른 그 초반부에 애굽 왕 바로의 딸을 부인으로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것부터가 실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떠난 시작선이죠. 물론 사람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잘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왕권 초기라 나라의 대외적인 안정을 꾀하기 위해, 당시 세계 최강국 이집트와 자연스럽게 동맹관계를 맺기 위해, 그 애굽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국제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솔로몬이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처사에서 행한 정략결혼쯤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그 나라를 하나님께서 안정되게 해 주셨고, 또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해 주셨다면, 그래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고, 대외적으로 평안을 누리게 해 주셨다면, 적어도 세상의 흐름을 좇기보다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좇아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화장실에서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고 하듯이, 솔로몬도 그 초심을 잃어버린 채, 1절의 말씀처럼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했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을 사랑하였고, 그녀들이 모신 신을 다 허용한 추세로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솔로몬도 단단히 마음을 먹었을지 모릅니다. 설령 그녀들을 자기 아내로 삼는다 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만큼은 내가 굳게 지킬 것이다,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 스스로 과신하고 믿음을 맹신한 게 화근이 되었는지, 3절에서는 후궁이 700, 그리고 첩이 300명이라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바꿔 말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중심을 빼앗기게 되면, 세상에 좋아하는 것들을 더 많이 두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리를 대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대형사고는 초보운전자보다는 경력운전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정도 속도면 괜찮겠지! 이 정도 차선 변경은 괜찮겠지! 이 정도 졸음운전은 괜찮겠지하면서 운전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자기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죠. 영적인 부분의 사고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초보운전자처럼, 처음 영적인 단계의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한눈을 팔 새가 없습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고, 임직을 받고, 뭔가 한 소리쯤 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그 때부터 자기 영적 우월감에 도취돼 영적인 죄악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한 데살로니가 전서 521절의 말씀은 초신자에게 해당되는 말씀보다는 오랜 세월을 신앙생활하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으로 삼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솔로몬이 그렇게 타락해가는 길목을 보고만 계신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9-10절을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중징계를 내리시기 전에 이미 두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긍휼하심의 손길을 뿌리쳤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중차대한 죄를 범한 죄인일지라도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인간들 곧 우리 자신들이죠.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솔로몬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연약해서 넘어지는 우리 자신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은총이 무엇입니까? 솔로몬을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차례나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쳤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그 나라를 빼앗아 신하에게 줄 것인데, 다만 다 빼앗지는 않고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줄 것이라고 13절에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 네 왕위를 영원토록 견고케 해 줄 것이라는,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 곧 말씀의 언약을 굳게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게 다윗처럼 우리의 가정도, 자녀들도, 계획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께 굳게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려운 시절을 지나 세상 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시절을 맞이할 때, 그것이 자연스런 세상 흐름인 것 같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진 것이라면 기꺼이 그것들을 경계하고, 하나님을 향한 초심을 회복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말씀하시거나 간접적으로 경고하실때, 우리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는 자라면, 그때 곧바로 주님께 다시 돌이키는 것, 그것을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런 상승관계 속에 살아갈때 주님께서 큰 빛의 세계로 이끌어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그런 하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도 저희의 마음을 지켜 주사 세상 욕심이 아닌 주님께만 향하는 마음을 견지하게 하시옵소서.

혹여 세상과 욕심에 마음을 빼앗겨 주님께 등을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할지라도

저희를 긍휼히 여기사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주시옵소서.

그를 통해 저희의 마음과 영혼이, 다시금 재정비되게 하시고,

주님께 향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때 큰 빛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영적 세계로 저희들을 더욱 끌어올려주실 줄 믿사옵나이다.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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