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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우리는 솔로몬의 잠언 그 두 번째 책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 17장 말씀은 어제 읽은 16장의 말씀처럼 대조 병행구와 동의어 병행구가 반복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나오는 28절, 곧 28개의 잠언들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두 가지 부류의 사람에 대해 밝혀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Peace Maker 곧 평화를 만드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Trouble Maker 불화를 만드는 사람이 그것입니다. 그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었죠.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5:9)이란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수요일 밤에도 나눈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오늘날에도 구약의 율법에 금한 고기 곧 굽이 갈라지거나 되새김질 하지 않는 고기 곧 돼지고기와 같은 고기를 비롯해,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물고기 곧 홍합과 해삼과 멍게과 전복과 같은 바다 해산물 같은 것을 구약의 율법에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씀을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 채 그것을 먹지 않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을 통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약의 형식보다는 이제는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 곧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사람의 생각이 더러운 바, 모든 음식에는 자유함이 있다고 여기는 그리스도인, 그렇게 형식과 본질을 추구하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본질을 추구하는 사람은 형식을 취한 채 먹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거나 조롱해서는 안되고, 또 반대로 형식을 고집한 채 삼겹살을 먹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모든 음식을 먹는 이들을 향해 비판하거나 조롱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은 먹고 마시는 것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는 나라여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놓쳐 버리면, 우리는 내가 옳다고 믿는 신념이나 가치를 강하게 주장한 채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로 인해 불화가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일들도 비일비재하죠. 그래서 서로 서로의 신앙, 서로서로의 가치관, 서로서로의 그 거리를 존중할 때 주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추구하는 진정한 Peace Maker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없이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Trouble Maker만 될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내가 경험한 신앙의 형식이나 내가 옳다고 여기는 믿음의 본질을 하나님 앞에서 고수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함께 신앙생활하는 교우들 안에서는 정말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포용하는 ‘Peace Maker’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먹고 마시는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1절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부분을 표준새번역성경은 “마른 빵 한 조각을 먹으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진수성찬을 가득히 차린 집에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제육, 곧 고깃덩어리, 그런 진수성찬을 차려 놓은 집에서 다투는 것보다 차라리 마른 떡이나 마른 빵 한 조각, 곧 콩 한 조각을 놓고서도 서로 화목하고 평화롭게 사는 게 낫다는 말씀입니다. 재벌집안에서 형제들끼리 지분이나 상속 때문에 으르렁거리며 서로 죽고 죽이는 모습 보다는 차라리 지분이나 상속받을 재산이 없이 오히려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형제간에 서로 돌아보고 격려하는 집안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은 다들 수긍하는 바이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미국의 재벌 기업들은 그 재산을 자식들에게 일정부분만 상속한 채 나머지는 아예 사회에 환원해 버리죠. 실은 그것이 자식들의 삶을 바르게 이끄는 성경적인 길이죠.
그처럼 먹는 것이나 재산과 관련하여 서로서로 화목할 수 있는 방안과 해법을 찾는 것, 그것이 실은 Peace Maker 곧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 곧 평화를 만드는 사람과 불화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부류가 5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한 사람에 대해 조롱하는 자, 궁핍하게 사는 이를 비웃고 험담하는 자, 다시 말해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자는 실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 재앙을 당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의 형편을 보고 기뻐하는 자는 주님의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가난한 자를 조롱하고 무시하는가? 자신의 형편이 그보다 훨씬 더 낫기 때문이고, 자기 자신은 언제나 좋은 시절만 맞이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일날 오후 시간에 살펴 본 주님의 기도문에서 생각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하는 그 기도문에는 세 가지 뜻이 있는 데 그 첫 번째가 바로 자기 자신의 결핍, 곧 연약한 상태를 늘 인정하는 기도라고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오늘날의 농부도 그렇고 오늘날의 직장인이나 회사를 경영하는 리더들도 마찬가지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그들이 해방 받을 시점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10가지 재앙은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그리고 장자의 죽음이었죠. 그 재앙은 한 두 달 만에 끝난 게 아니라 한 가지 재앙이 1달씩 곧 열 가지 재앙이 열달 동안 지속되었던 것이죠. 재앙에 대한 예고기간, 재앙의 실행기간, 재앙의 처리기간, 그리고 또다시 재앙이 이어지는 기간으로 그렇게 10달간 지속되었고, 마지막 장자의 죽음이 바로의 턱밑까지 조여왔던 것이죠. 그래서 바로도 그때는 ‘제발 나가 달라고’ 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다다랐는데, 그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오지 않습니까? 그때 모세가 어떻게 하는가? 2014년에 개봉된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이란 그 영화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홍해 바다 앞으로 내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홍해가 갈라지는데, 사실 그 홍해의 바닷물을 바짝 마르게 한 게 불기둥이요, 그 백성들이 다 건넌 뒤에 다시금 홍해 바닷물을 몰려들게 한 게 구름기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애굽 군대가 다 빠져 죽었는데,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유대 랍비문헌에 보면 그 애굽 군대가 출격할 때 마차와 말 그리고 그 군사들이 치장한 금은보화가 엄청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물에 떠밀려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군사들에게 전리품을 엄청나게 취했고, 그것으로 성막을 짓는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그런 은총을 경험했어도 그들이 40년 광야 삶을 살 때 불평과 원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위해 만나와 메추라기를 매일매일 공급해주셨고, 6일 째에는 7일 곧 안식일을 맞이할 것까지 다 내려주셨죠.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지 않으면 그들은 살아갈 수가 없었다는 것, 그만큼 그들은 자기 결핍을 느끼게 하셨고, 자기 연약한 한계를 깨달으며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농부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비를 공급해 주지 않으면, 직장인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직장과 기업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지 않으면, 워크아웃이나 기업파산당하는 게 현실 아닙니까? 그만큼 아무리 떵떵거리며 부유하게 살아도, 넉넉하게 살아도, 언제 어느 때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는 자기 존재, 곧 자기 한계와 자기 결핍을 늘 인식하며, 일용할 양식을 구하며 사는 자라야, 가난한 자를 조롱치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 오히려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베풀 수 있는 것이죠. 그것이 9절에 나와 있는 말씀 곧 “허물을 덮어주는 자”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자”,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Peace Make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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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살고 있는 재정적인 수준이나 가정환경에 자족하며 감사하고, 일용할 양식 곧 나의 결핍과 나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연약한 자의 허물도 감싸주고 사는 Peace Maker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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