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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2번째 권에 해당하는 잠언 10-15장까지는 대조법 병행구를 이루는 2행시를 썼는데, 오늘 읽은 16장은 동의어 병행구 혹은 합성 병행구를 이루는 2행시로 기록하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가령 10-15장까지는 ‘그래서’와 ‘그러나’의 접속사 가운데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가 많이 사용되었다면, 오늘 본문의 16장은 ‘그래서’라는 접속사가 훨씬 더 많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10-15장까지 나타난 대조법의 병행구 다시 말해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아예 안 쓰인 것도 아닙니다. 중간 중간에 대조법 병행구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3절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또 10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또 27절에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29절에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하는 말씀들이 동의어 혹은 ‘합성병행구’죠.
물론 1절의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2절의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14절의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하는 말씀들이 이전에 10-15장까지 나와 있는 ‘대조법 병행구’와 같은 격입니다.
오늘 그 중에서도 무슨 말씀을 눈여겨봐야 하겠습니까? 1절에 있는 말씀 곧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이 말씀은 9절의 말씀과 거의 흡사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더욱이 1절과 9절은 25절의 말씀과 연속선상에 있는 말씀으로 여기기에 충분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 세 가지 말씀이 무엇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이 무슨 일을 계획하고 내다볼지라도, 실제적인 응답, 실제적인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죠.
잠언 15장 말씀을 살펴보면서 누가 과연 생명나무와 같은 말을 하는 자이고, 누가 과연 거친 말을 하는 자인가? 우리가 살펴 본 인물이 아브라함과 시므리라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관계 속에서 둘 사이에 재물이 많아지고 가축 떼가 많아졌을 때 조카 롯의 상황을 먼저 헤아리면서 양보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했는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한 유순한 말, 생명나무와 같은 말을 한 인물이죠.
그리고 시므리는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 쫓겨날 때 ‘바후림’이란 지역에서 쉬고 있을 때 저 멀리 언덕빼기에서 ‘비루한 자여, 비루한 자여, 네 피가 네게로 돌아갈지로다, 어디 한 번 멀리 도망가봐라.’하고 조롱하고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던 인물이 시므리였죠. 그런데 다윗이 죽지 않고, 다시금 쫓겨났던 곳에서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맨 먼저 머리를 조아린 인물이 바로 그 시므리였습니다. “왕이시여 이전에 했던 저의 죄악을 기억지 마옵소서.”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그는 앞 뒤를 생각지도 않은 채 자기 기분대로 내 뱉었던 자였고, 이제는 또 자기 살길을 찾고자 한 인물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이 그때 어떻게 합니까? 다윗 곁의 신하들이 저런 인물은 살려둬서는 안된다고, 처음 모욕적인 말을 할 때에도, 당장 가서 죽이겠다고 말했는데, 그때도 다윗은 하나님께서 저의 입술을 통해 나를 꾸짖는 것이다, 하고 살려두도록 했고, 이번에도 돌아오는 길목에 그를 죽이고자 부하 장수들이 이야기할 때, 다윗은 가만히 내 버려 두라고, 저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의 길에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고 그야말로 사람을 살리고, 주위를 화평케 하는 말을 한 인물이 다윗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렇게 생명나무와 같은 말,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게 된 비결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고 했을 때, 롯이 선택한 땅은 에덴동산처럼 풍요롭게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이 멸망직전에 있는 땅이었는지, 롯은 내다보질 못했습니다. 그저 본문 25절의 말씀처럼 ‘자기 보기에 바른 것 같고 풍요로운 땅 같을지라도’ ‘필경은 사망의 길’이었던 땅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아브라함이 택한 곳이 어디인가? 창세기 13장 18절, 다시 말해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택해 옮겨 간 뒤에 홀로 남은 아브라함이 어디에 머물렀는지, 성경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재단을 쌓았더라.” 조카 롯이 자기 보이게 좋아보이고 성공할 것 같은 그 땅을 향해 나아갈 때, 아브라함은 ‘헤브론의 마므레’를 택해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헤브론’이란 ‘교제’를 의미하고, ‘마므레’란 ‘달구다’ ‘뜨겁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를 더 달구며 나아갔던 인물입니다. 그런 자세가 바로 본문 1절과 9절에 나오는 말씀을 중심으로 삼는 자세이지 않겠습니까? 내 삶의 응답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고, 내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내가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를 취하면 취할수록 내 갈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미래와 희망이 되실 것이란 믿음의 자세 말입니다.
그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칼을 겨누면서 왕궁을 쫓아올 때 다윗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그때 사울 집안에 속하는 그 시므리라는 인물이 다윗을 조롱하고 모욕할 때, 그는 지금 당장의 다윗이 처한 현실, 도망자 신세만 바라봤던 자였습니다. 만약 그가 다시금 왕권을 취하게 될 다윗의 모습을 내다봤다면, 다윗 위에 계신 하나님의 섭리를 내다봤다면 그렇게 언덕배기에서 다윗을 조롱하고 모욕을 하려고 했겠습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자신을 모욕하고,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조롱하는 그 시므리를 다윗의 부하 장수들이 처단하고자 할 때, 다윗이 왜 가만히 내버려두라고 했는가? 다윗 너머에 섭리하시고 주권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자신과 주변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 역시 아브라함과 똑같습니다.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7년 6월간 취한 곳이 바로 ‘헤브론’이었던 것이죠. 그 헤브론에서 7년6개월간 하나님 앞에 교제의 자리를 취했기에, 나머지 33년을 예루살렘, 곧 평화의 터전으로 일굴 수 있었던 것입니다(대상3:4).
그런 모습은 요셉의 믿음과도 연결이 됩니다. 창세기 50장을 보면 이제 야곱이 죽고, 요셉과 온 나라 대신들이 요셉의 장례 행렬을 따르지 않습니까? 물론 야곱의 아들이자 요셉의 형들도 그 장례 행렬에 동참하죠. 그런데 그 장례식이 끝나자 요셉의 형들은 좌불안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해, 혹시 동생 요셉이 자신들을 해코지나 하지 않을지말 입니다. 그래서 안절부절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때 요셉이 어떻게 위로하며 말을 합니까?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요셉은 그야말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형들을 복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다윗이 광야 도피행각 속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은 것과 똑같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것, 자기 마음대로 경영하고자 하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보다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 자신이 대신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도, 다윗도, 그리고 아브라함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경영권을 철저하게 내어드렸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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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내 인생의 경영권, 내 삶의 통치권을 하나님께 내어 맡겨드리며,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과 교제의 자리를 더 뜨겁게 달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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