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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잠언 17장 말씀도 ‘솔로몬의 잠언’ 그 두 번째 책에 해당횝니다. 어제 읽은 잠언 17장의 말씀처럼 ‘대조 병행구’와 ‘동의어 병행구’가 반복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잠언 18장 말씀은 28개의 잠언들이 담겨 있는데, 이 내용을 종합적으로 보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철한 자 곧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 곧 미련한 자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자가 명철한 자 곧 지혜로운 자이고, 또 어떤 자가 미련한 자 곧 어리석은 자인가? 그것이 실은 ‘말’ ‘혀’ ‘입술을 사용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 명철한 자는 그 입의 말이 ‘깊은 물과 같다’ 또 ‘지혜의 샘’과 같이 솟구쳐 흐르게 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또 명철한 자는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음을 아는 자’입니다. 본문 21절에서 그런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자신의 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치 부정적인 의미가 더 강하지 않습니까? 혀를 잘못 놀렸다가는 순식간에 죽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만큼 명철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은 혀를 올바른 데에 잘 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과연 그런 인물이 어디에 나옵니까?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산헤드린 공회원들, 오늘날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들 앞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들 앞에서 지혜로운 말, 곧 지혜의 샘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 말을 함으로 인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죠. 하지만 그의 죽음이 헛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감옥에 처넣는데 앞잡이 역할을 했던 사울 앞에서 죽임을 당했기에 그는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죠. 훗날 사울이 바울이 되어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그도 감옥에 잡히고,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때 누구를 떠올렸겠습니까? 자기 앞에서 죽어간 스데반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는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스데반 집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증언했습니다. 그들이 우상처럼 떠받드는 성전 안에 하나님께서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용납할 수 없을 진데, 어찌 당신들은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어 놓은 채 왜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했으며, 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 곧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느냐” 하고 깊은 샘물과도 같은 지혜로운 말을 웅변적으로 쏟아냈던 것이죠. 바로 그 말을 들을 때, 사도행전 7장 54절은,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들이 스데반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릇되게 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반응이 어떠한가? 사도행전 7장 54절의 후반부가 이렇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이를 갈았다, 곧 스데반을 향해 살기가 등등해졌다, 죽이려고 벼르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그런 복음을 증거하다가, 하나님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그들의 판결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야말로 본문 21절의 말씀 그대로 열매를 거둔 것이죠.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하는 말씀 말입니다. 스데반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그렇게 죽을지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아니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그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행전 4장 20절에 나오는 바, 베드로와 요한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당했을 때,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그리고 스데반 집사도, 산헤드린 의원 앞에서 증거했던 것이죠.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의 유불리, 나의 유리함과 나의 불리함을 따져 옳은 것을 옳은 것이라 말도 못하고 사는 게 아니라, 내게 불리한 상황이 닥쳐와도,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입술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혜롭고 명철한 자의 입술을 사용한 스데반과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리석은 자의 입술, 곧 미련한 자의 입술을 사용한 인물도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한 인물, 한 부류의 사람들을 들라면, 다단과 아비람 같은 인물입니다. 과연 그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6-8절의 말씀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의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미련한 자 곧 어리석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는 말을 하고, 매를 자초하고, 그 입술로 인해 멸망당한다고, 그 영혼이 그물에 걸려 죽임을 당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다단과 아비람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바란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서, 그 곳의 석류와 포도송이와 무화과 열매를 따오게 했죠. 그리고 보고를 받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능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다, 하고 믿음의 보고를 하죠. 그런데 나머지 10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다 메뚜기 떼 같고 저들은 아낙 자손처럼 거대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하고 말했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밤에 밤새도록 통곡했고 밤새도록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죠.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그렇게 악담하는 10명의 정탐꾼을 모두 재앙으로 죽이셨고, 함께 불평하고 원망한 출애굽 1세대 모두 광야에서 죽을 것이고, 다만 출애굽 1.5세대와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죠. 바로 그 사건 다음에 일어난 게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사건’입니다. 그들은 야곱의 장자 곧 르우벤 지파의 자손들인데, 그들 두 사람이 레위 지파의 증손자 ‘고라’와 함께 당을 지어서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이른바 모세가 나서서 다시금 마음과 뜻을 모아 가나안 땅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라고, 채근했는데, 그때 모세의 말에 반기를 들으면서 따르지 않겠고 한 주동자가 다단과 아비람이었고, 그들과 함께 250명의 지도자들도 함께 했으니, 거의 1천명이 넘는 무리들이 모세를 위협한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 다단과 아비람이 민수기 16장에 두각을 나타내지만 유대 랍비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애굽에서 모세가 바로 앞에서 출애굽한다고 이야기할때부터 반기를 들었던 인물입니다. 왜 그들은 출애굽자체를 반대했는가? 우리나라의 친일파들처럼 애굽 땅에서 누리고 있는 부와 권력, 기득권을 내놓치 않고자 함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출애굽기 5장 6절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독관과 기록원’들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바로 앞에 내 백성을 보내달라고 할 때, 그렇게 모세가 설쳐대는 게 못마땅했고,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바로를 만나고 나올 때 길에서 마주쳤을 때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이죠. 출애굽기 5장 21절에 “그들에게 이르되(모세와 아론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살피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바로 그때부터 그들은 모세가 하는 일, 곧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반역을 꾀했던 것이죠. 그들 나름대로는 백성들 앞에 명분을 쌓고, 합리적인 말을 하는 것 같고, 지혜롭게 비쳤을지 모르지만, 실은 그 입술로 인해 그 영혼이 그물에 걸리는 일 뿐이었다는 것, 우리가 깊이 새겨야 말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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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쪼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반역을 꾀하려는 다단과 아비람, 자기 기득권과 이권을 놓치 않고자 어리석은 말을 해 대는 다단과 아비람 같은 인물이 되지 않고, 오직 스데반 집사처럼 의롭고 정직하고 영원한 진리의 말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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