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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에 제가 좀 인자하게 생겨 부부싸움을 안 할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부부싸움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자녀들의 교육관에 관해서는 서로 티객태격합니다. 이를테면 아이들 교육에 핸드폰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해 주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저의 생각이고, 아내는 요즘 아이들에게 핸드폰이 없으면 무시당하게 되고, 지금부터 쥐어줘야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입장입니다. 물론 그에 대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서로 자라온 환경과 배경과 교육철학이 남다르기 때문이죠. 서로 간의 거리를 존중하고 배려해줘야 하는데, 다만 서로의 일치점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사용설명서로서,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협력에 의해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죠.
오늘 읽은 잠언 19장 말씀 속에는 가난과 갈등이라는 두 주제가 가장 부각이 돼 있습니다. 그 가난과 갈등이 인간세계에 어떤 역할과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알려주고 있고,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떻게 맞추며 살아야 하는지 일깨워 주죠.
사실 한국교회에서 기복주의 신앙으로 인해 부작용이 심각하지 않았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면 그 정성에 하나님께서 감복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성공한 자들은 다 열심히 신앙생활한 자요, 가난한 자는 신앙생활을 게을리한 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주의 신학에 병든 신앙논리일 뿐입니다. 정말로 열심히 헌신하고 자기 생명을 바친 사도 바울도 병에서 고침받지 않았고, 끝내는 순교당했는데, 기복주의 신앙관으로 성공주의 신앙관으로 어떻게 그걸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가난이나 질병, 고통과 같은 것들이 우리 삶에 찾아오면 그 위력 앞에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움찔하게 되고, 또 그런 것 앞에 무릎 꿇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위력이라는 것은 쉽게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본문에 나오는 4절 “재물은 많은 친구를 더하게 하나 가난한즉 친구가 끊어지느니라.” 또 6절에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그리고 7절에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하고 말씀합니다. 가난하게 되면 친구도 떨어지고, 가족 관계도 멀어진다는 것이죠. 반면에 재물이 많아지면 친구가 많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 속에서 우리가 겪는 부분입니다. 어떤 분이 크게 성공했다면 그 앞에 줄을 대고자 하는 사람이 많고, 대신에 갑자기 망했다면 있던 친구들도 다 떠나게 되죠.
이것은 오늘날만 그런 게 아닙니다. 과거에 읽었던 욥도 그랬습니다. 욥기 42장 11절을 보면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욥이 고통을 당해 괴로울 때는 다들 떠나갔던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이, 이제는 갑절이나 소유가 늘어나자 형제자매는 물론 모든 이들이 다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그런 모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똑같은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현상이 올바른 일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100년 전에 부자와 가난한 자는 그 차이가 겨우 먹는 것, 입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때는 개천에 용이 날 수 있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런 시대, 그런 사다리조차 다 걷어차 버리는 시대 아닙니까? 그래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삶에 엄청난 차이가 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차이가 더 많은 패배감과 좌절감을 겪게 하고, 젊은이들도 꿈을 잃어버린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 충격과 공포는 더 극심할 것입니다. 이런 부와 가난의 차이가 자연스런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일례로 골든 수피 센터가 엮은 〈신성한 씨앗〉이란 책을 보면, 2011년부터 2016년 6월까지 5년 6개월 동안 우리나라에 GMO 곧 유전자변형식품을 수입한 업체가 CJ제일제당 대상 사조해표 삼양사 그리고 인그리디언코리아 등 5개 업체인데, 그 5개 업체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식용 GMO 농산물의 99%를 수입했다는 것입니다. 대기업들이 유전자변형식품과 농산물 수입을 주도하고 있고, 그 GMO 본사도 몬산토와 신젠타 곧 다국적기업들입니다. 그들은 토종 씨앗의 씨를 말리고 있고, 대신에 자신들이 유전자 조작과 합성을 통해 만들어내 자기 씨앗을 전 세계에 유포하고 있고, 그런 유전자조작식품을 전 세계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막대한 이득, 결코 올바른 부를 취득하고 있는 게 아니죠. 러시아 정부는 GMO의 생산과 수입과 판매를 테러범에 준하는 형벌로 다스린다는 국회결의와 함께 추방 정책을 펼치고 있고, 필리핀대법원은 GMO 수입중단은 물론 그 작물실험까지 금하고 있고, 베네수엘라는 GMO의 종자보급을 획책하는 몬산토 사와 신젠타 사의 종자산업침투를 원천봉쇄했고, 대만을 이끄는 민진당 정부는 학교급식에 GMO작물이 포함된 어떤 식품도 학생들에게 공급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제정공포를 했는데, 우리나라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왜냐하면 대기업들이 정부와 정치권에 그만큼의 로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런 모습들은 갈수록 더 팽배해질 것입니다. 문제는 그 몬산토사가 유대인 자본기업이라는 것이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구조 속에 살게 되면, 사회적인 실패와 좌절을 겪는 이들이 가난에 길들여진다는 점입니다. 가난을 자족으로 삼기보다는, 스스로 잉여인간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그것이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사회 구조속에서도 가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주십니다.
본문 1절에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입술이 패역하고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은 바로 2절과 3절 말씀을 가리킵니다. 지식이 없이 열심을 내고, 자기 스스로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여겨, 자기 인생을 잘못된 길로 택해 놓은 채 남의 탓을 하는 사람입니다. 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가난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악이 분명히 있긴 하지만 남의 탓만 돌린 채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자, 하나님에 대해 불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자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는 정말로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일해서 재물을 모은 사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하다고 좌절하고 남을 정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게 아니라, 성실한 모델을 삼아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또 17절을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자신이 가난하여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도움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도울 때, 그것은 그 당사자에게만 돕는 게 아니라 실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 복을 받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때로 생각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더욱더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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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잠언 19장은 또 하나의 주제가 나옵니다. 이른바 갈등이 그것입니다. 갈등을 야기시키는 다양한 요인이 있는데, 거짓 증인, 거짓말, 미련함, 게으름, 패륜, 다투기를 좋아함 등 여려가지죠. 실은 그 모두가 죄악의 요인, 죄악의 요소입니다. 물론 갈등은 낯모르는 사람과 생기는 게 아니죠. 평소 가깝게 지내는 사이, 부부관계, 부모관계, 형제자매지간, 또 교우관계, 그리고 일터의 동료들 관계속에서 갈등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매일 서로간의 거리를 더더욱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우리 주님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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