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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가이사께 상소하노라(행25:6-12)

by 똑똑이채널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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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캔터베리 주교였던 윌리엄 템플은 이렇게 예배를 정의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모든 인격을 하나님께 순종케 하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우리의 의식을 소생시키는 것이며, 

그의 진리로써 우리의 생각을 자라게 하는 것이며, 

그의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그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의 원하시는 뜻에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배에서 하나로 모아지게 되며, 이것은 우리의 본성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덜 이기적인 감정이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말입니까?

예배는 그리스도인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영적 행위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의 심령을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토록 아름다운 영적 행위가 우리의 삶 속에 실행될 수가 없는 것이겠죠.

 

(적용)주일날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이다”하고 한 말씀도 그와 똑같죠.

우리 스스로는 더럽고 추악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죄악을 깨끗해 씻어 주시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본다 곧 하나님과 소통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과 소통하며 사는 그 모습을 세상 밖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가치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기 때문이죠.

 

그 모든 삶은 내게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위에 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뜻에 초점을 맞추며 살 때 가능한 법이죠. 

그만큼 우리 자신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드러나실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예배란 자기 부인이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시간입니다.

구약의 제사 역시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번제를 드릴 때도 흠없는 번제물을 고르고, 그 번제물을 가지고 나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여 자기 죄를 짊어지도록 하죠.

그리고 머리를 치는데 피를 뒤집어 쓰면서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떠서 내장을 끄집어내며 온갖 역겨운 냄새를 도맡게 되죠.

그때 그 제물의 피와 씻은 고기를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걸 번제단에 모두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게 되죠.

바로 그 모습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이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도 주일 전날부터 흠없는 모습으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먼저 나와 침묵으로 참회하며 기도하는 게 필요하죠.

그리고 예배때 찬양과 기도를 드리고 목회자의 설교를 듣고 헌금을 올려드리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시간이 예배시간이죠.

 

그것은 2천년전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들 곧 종교지도자들도 한 주간에 한 번씩 번제를 드릴때도 그런 모습이었겠죠.

그들 역시도 제사를 드릴 때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의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 2년간 번제를 드렸어도 100회 이상의 제사를 드린 셈인데, 그렇다면 2년간 더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돼 있어야 하죠.

하지만 그들은 2년간의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의탁한다고 해도 그들의 삶은 2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죠. 

그들은 2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바울을 증오하면서 바울을 고발했고, 2년 전처럼 바울을 죽이고자 똑같은 음모를 꾸몄죠.

 

(깨달음)신임 총독 베스도가 3일 만에 올라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와 대면인사를 나눌 때 요구한 게 바로 그것이었죠.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이곳에서 재판하도록 요청한 것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2년 전의 모습처럼 예루살렘에 오는 길목에 암살단을 동원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의도였죠. 

 

물론 신임총독 베스도는 그들의 심중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그들의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죠.

자기 자신은 곧바로 가이사랴로 돌아갈 것이니, 그때 바울을 고발코자 하는 이들은 함께 자신과 가서 바울을 그곳의 법정에 세우자고 하면서 말이죠. 

 

(적용)그렇기에 대제사장 무리들은 2년 전이나 2년 후나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전적으로 의탁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형식적인 예배자에 불과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예배를 드렸다면 그들의 삶은 한층 더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되었겠죠.

하지만 2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의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에 불과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이 반면교사로 삼는 예배자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했죠.

우리가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라 삶 속에 예배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말이죠.

바울은 2년 동안 더욱더 주님의 이끄심에 순종했고 자기 자신을 더욱더 의탁하는 모습으로 신실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예배를 통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대로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되는 삶 속의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오늘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인데, 보눈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스도가 그들 가운데서 팔 일 혹은 십 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 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라 명하니”

 

베스도 총독은 예루살렘에서 8일을 머물다가 가이사랴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그가 출발하여 다시금 돌아간 기간까지 합하면 10일 정도 걸렸던 것이죠.

보통 새로운 총독이 부임하면 관할지역에 시찰을 갈 경우 호화로운 대접을 받는 게 당시의 관계 아니었겠습니까?

그 기간도 훨씬 더 오래 머물렀을텐데 신임총독 베스도는 그만큼 성실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베스도 총독이 가이사랴에 돌아갈 때 대제사장 무리도 104km의 그 거리를 함께 동행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였죠.

바울을 베스도 총독의 법정에 세워 바울을 처단하고자 하는 것 말이죠. 

그래서 베스도 총독은 그곳에 도착한 이튿날 바울을 호출해 법정에 세웠죠.

 

그것이 본문 7-8절의 상황인데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나오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하되 능히 증거를 대지 못한지라 바울이 변명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예루살렘에서 온 대제사장 무리와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다만 2년 전처럼 변호사 더둘로 곧 웅변가 더둘로를 대동하지 않았죠.

왜냐하면 그때도 돈만 들였지 별로 효과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변호사 없이 바울을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고발했지만 그 증거도 그 증인도 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해)그때 바울이 뭐라고 변명합니까?

바울 역시도 2년 전처럼 똑같이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고 변호하죠.

그런데 우리말  ‘아니하였노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문에는 ‘오우테’(οὔτε)라는 부정사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죄를 짓지 않았고, 성전에 대해 죄를 짓지 않았고, 가이사에게 대해 죄를 짓지 않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변론은 피고로서 자신이 범죄한 사실을 가리기 위한 거짓 진술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은 후에는 이 세상의 법도, 하나님의 법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곧 로마 황제의 법도 어긴 적이 없었죠. 

 

그때 베스도가 뭐라고 바울에 말했습니까?

9절에 보면 베스도는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고자 바울에게 제안을 하죠.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겠느냐?”하고 말이죠.

 

(깨달음) 왜 그런 말을 했겠습니까?

바울 스스로 확고부동하게 율법에 대해서나 성전에 대해서나 로마 황제에 대해서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무죄를 선고하면 함께 온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의 체면을 깎아버리는 일이기에 그들의 낯을 세워주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죠. 

그만큼 신임 총독 베스도는 고도의 정치적인 제스쳐를 취한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때 바울이 대답한 말입니다.

본문 10-1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 

당신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불의를 행한 일이 없나이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 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하노라 한 대”

 

바울은 베스도 총독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가 산헤드린 법정에서 심문을 받는다는 것은 2년 전과 똑같은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끼 때문이죠.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 총독이나 그 자리에 참석한 대제사장 무리들의 뜻과 달리 로마 황제에게 상소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임 총독 베스도는 그곳에 앉은 자들과 상의해서 말하죠.

‘바울아, 네가 가이사 곧 로마 황제에게 상소했으니 로마 황제에게 가도록 해라.’(12절)하고 말이죠. 

 

(적용) 그런데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이때 무죄로 석방돼 풀렸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즉시 대제사장 무리들이 예루살렘의 암살단과 연통을 넣어 바울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겠다는 것은 죽어도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죽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미 3차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 성령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선지를 통해 똑같이 말씀해주셨죠.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정말로 그런 일을 당했고, 뇌물을 밝히는 벨릭스 총독에게 2년간 구금당했죠.

그리고 신임 총독 베스도 앞에서 2년 전과 똑같이 바울을 고소하고 죽이려 드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들이 있는 것이죠.

그러니 바울은 차라리 로마 황제에게 가서 상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섭리 가운데 바울을 로마로 이송토록 하게 된 것입니다. 

 

(원성)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바울이 지난 2년간 무엇을 바라보며 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3:1-3)

 

바울은 지난 2년간 헤롯 궁전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위의 것을 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칠흙같이 어두운 지하 감옥 속에서도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자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았던 것이죠. 

비록 자기 자신은 언제 풀려날지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주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다시금 심문받을 때 이때가 로마 황제에게 설 수 있는 기회임을 알고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한 것이었죠.

 

이 모든 일은 바울이 억울한 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오지 위에 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바라며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죽임당하지 않도록, 그를 더 책임감 있게 지켜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감싸주신 것이었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어떤 환경속에서도 신실한 예배자가 되어 위에 계신 주님과 주님의 뜻을 바라보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예배를 통해 너의 자아를 죽이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여 드리고 있느냐?”

“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너의 상상력을 정결케 하시고 너의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시키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본문 속 바울은 지난 2년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 속에서도 오직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의 뜻에 복종한 것 아니더냐?”

“히지만 대제사장 무리들은 지난 2년간 형식적인 예배자들로서 하나도 변화된 게 없지 않더냐?”

“그만큼 그들은 예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복종하거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먼 자들 아니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 주어진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오직 위에 계신 주님께 더욱더 복종하는 것이 참된 예배자의 모습 아니겠느냐?”

“바울이 2년간 무고하게 갇혀 있을 때 자기 뜻만 고집했다면 어찌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했겠느냐?”

“바울이 형식적인 예배자의 모습을 그쳤다면 그는 지금 당장이라고 풀어주라고 주장하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바울은 자기 판단 자기 주장 너머에 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복종하는 자였지 않더냐?”

“그런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바울을 로마로 보내고자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상소하도록 역사하신 것 아니겠느냐?”

“지금 너의 길이 안개처럼 어두울지라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임을 확고히 의지하며 위를 바라바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내가 걷는 이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둔 밤 어둠이 깊어 밤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내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렸이 보리이라 

가는 길이 없고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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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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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인도의 바케이 목사님이 친구와 함께 험한 길을 따라 구릉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걸어간 후에 그들은 계곡의 급류 위로 연결된 좁다란 밧줄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다리를 많이 건너 본 친구가 밧줄 다리를 건너 먼저 건너편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바케이 목사님은 쩔쩔매며 겨우 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케이 목사님은 소용돌이치며 노호하는 급류를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 다리가 마치 급류의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바케이 목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내려다보지마! 나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그러자 그 충고대로 바케이 목사님은 자기 시선을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서 친구에게로 돌렸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는 담대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이죠.

 

(깨달음)우리 인생 여정에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겠죠.

사도 바울처럼 감옥에 갇히는 상황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힐 때가 왜 없겠습니까?

때로는 바케이 목사님처럼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밧줄 다기와 같은 상황에 놓일 때도 있겠죠.

 

그때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하늘 아버지인 줄 믿습니다. 

내게 닥쳐오는 문제를 넘어 나에게 주어진 삶의 목표를 바라볼 때 능히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예화2)스펄전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이 자기의 생애에 깊은 회의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길을 다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혼이 된 것이죠.

 

어느 주일 아침에 시골길을 가다가 이름 없는 감리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람이 대여섯 명밖에 안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목사도 없어서 구두를 깁기도 하고 수선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는 구두 직공이 일어나서 설교를 했습니다.

물론 특별한 설교랄 것도 없이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을 보고는 큰 소리로 이렇게 소치리는 것이었습니다.

“저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 말에 스펄전의 영혼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스펄전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 예수를 바라보자.”하고 다시금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고 하죠. 

그 과정을 통해 스펄전은 영국의 거성 같은 위대한 설교자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만큼 우리도 실패와 좌절을 겪을 수 있지만 그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무슨 음성을 듣는가가 중요하죠.

스펄전처럼 무명의 구두 직공이 하는 설교를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이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예배를 통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위에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자가 깨어날 수 있는 것이죠.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사도 바울도 2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며 예배하는 삶을 살았어요.”

“그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뜻에 더욱 집중했어요.”

“사람들은 실패자로 낙인 찍었을지 몰라도 주님은 그 과정을 통해 새로운 길 가이사에게 상소하는 길을 열고 계셨어요.”

“바케이 목사가 계곡의 급류를 건너는 밧줄만 바라보면 두려워 벌벌 떨었지만 먼저 건너간 친구를 바라볼 때 용기를 얻게 되었어요.”

“스펄전 목사도 회의감에 빠져 절망했지만 무명의 구두 직공의 설교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새 힘을 얻게 되었어요.”

“주님, 저를 향한 주님의 소명을 완수하기까지 더욱더 위를 바라보며 주님께 집중하며 살게 해 주세요.”

“예배를 통해 더욱더 나를 부인하고 주님께 의탁하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내가 걷는 이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둔 밤 어둠이 깊어 밤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내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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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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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텔레비전 모니터에는 텔레비전 방송국이 카메라로 비추는 것만 투영됩니다. 

카메라가 축구장을 비추면 모니터에는 축구 경기가 방송 되고 앵커를 비추면 뉴스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

우리 심령의 초점이 세상에 맞추어져 있으면 우리의 몸이 설령 예배당에 있어도 세상의 속된 것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심령의 초점이 위에 계신 하나님께 맞추어 있으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될 줄 믿습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간에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통로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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