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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바울이 심판을 강론하니(행24:24-27)

by 권또또 2022.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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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심판을 강론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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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어느 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 날짜를 공지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지 않겠습니까?

한 부류의 학생들은 시험날짜를 의식하지 않고 평소처럼 놀고 싶은 대로 노는 학생들이죠. 

당연히 시험도 망치겠죠.

 

반면에 시험을 중요시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험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인 채 매일 매일 시험 날짜를 체크하면서 게임도 제쳐놓고 최선을 다해 시험을 준비하겠죠.

무슨 일을 하든 그 학생들은 그 마음 속에 시험을 염두에 두며 공부에 집중을 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얻을 것이고, 각종 수상의 영광도 누리겠죠.

 

(깨달음)신앙생활도 그와 똑같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셈하시고 상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급으로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그 사실을 믿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진리와 생명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성화)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고백한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이 이와 같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깨달음)바울이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키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절제와 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오직 셈하시고 상 주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온전히 믿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매를 맞고 배가 뒤집히고 굶주림을 당할지라도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살았던 것이죠.

머잖아 저 하늘날에서 상주실 주님의 상급을 바라봤기 때문에 말입니다.

 

(적용)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죠.

이 땅에 천년만년 살지 못하는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날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설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상급을 베푸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은 그날이 영벌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날을 우리가 믿기에,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시는 셈하시는 날을 믿기에, 이 땅에 진리와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죠.

이 땅에서 우리가 퇴장하는 그 날이 하나님 나라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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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 바울이 벨릭스 총독 앞에서 자기 변증을 했습니다.

대제사장 무리들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웅변가 더둘로가 거짓 혐의로 바울을 세 가지로 고발했었죠.

바울은 폭도라는 것, 이단의 괴수라는 것, 그리고 성전을 더렵혔다는 고발이었죠.

 

그때 벨릭스 총독이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었을 때, 그 모든 내용은 거짓임을 낱낱이 밝혔죠.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온 지 열이틀 밖에 되지 않는데 무슨 폭도들을 규합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죠.

더욱이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라고 이야기했죠.

그리고 성전을 더럽힌 게 아니라 나실인 서약을 하는 이들과 함께 했을 뿐이라는 내용이었죠.

 

바울이 그렇게 변론하자, 대제사장이 데리고 온 박수 부대 가운데 누구도 나서서 위증이라고 소리친 이들이 없었죠.

왜냐하면 바울이 변론하게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응당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곧장 풀어주지 않고 천부장이 오면 그때가서 심문하겠다고 하면서 바울을 감옥에 가두게했죠.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여태껏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뇌물을 받아 온 터라 함부로 풀어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을까 하여, 바울을 붙잡아두려는 속셈이었죠.

 

(깨달음)그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그런 판결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는 그런 관점으로 말입니다.

 

마치 다윗이 15살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30살 무렵에서야 왕이 될 때까지 수많은 연단의 과정을 거친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몇 년에 걸쳐 사울 왕의 신임을 받은 뒤에 사울 왕의 사위 곧 부마가 되었죠.

그렇지만 그런 다윗을 향해 시기하고 질투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로돌 3천명의 정예부대를 동원했죠.

하지만 다윗은 그때부터 8년 넘게 유대 광야를 주무대로 한 도피행각을 벌였죠.

 

그때 다윗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고백한 내용이 시편 139편 1-4절 말씀이었죠.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부대에 쫓겨 도망치는 삶을 하나님께서 모르실리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자신의 앉고 일어섬과 눕는 것조차도 살펴보시는 주님이시고, 그래서 자신의 모든 상황을 아시는 주님을 더욱 의지한다고 고백한 것이죠.

 

(적용)바울도 이때로부터 2년간 감옥에 감금돼 있었는데, 그 모든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께 맡긴 바울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바로 그런 관점으로,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사는 자세가 필요한 법이죠.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한 때에 가장 선한 방법으로 새 길을 여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증언해주는 말씀인데, 24절 말씀이 이렇죠.

“수일 후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깨달음)벨릭스는 며칠이 지나서 자기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바울을 개인적으로 부른 것이죠.

이당시 벨릭스에게는 세 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유대 여자 드루실라는 세 번째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드루실라도 마찬가지였죠.

당시 드루실라는 헤롯 대왕의 손녀이자 헤롯 아그립바1세의 딸이었는데, 그녀도 벨릭스 총독을 세 번째 남편으로 맞이한 것이었죠.

 

그렇게 총독 벨릭스와 그의 아내 드루실라가 감옥에 구금된 바울을 호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무엇이라고 복음을 전했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본문 25-26절에 나와 있죠.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원해)바울은 벨릭스 총독 부부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의’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입니다.

주일날 말씀을 드렸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의’라고 했죠.

아무리 정주영 회장이 옥한흠 목사님 앞에서 ‘나는 죄인인데 어떻게 목사님 옆에 앉겠습니까?’라고 했지만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았죠.

그렇게 사회적으로 무흠해보이고 완벽해보여도 그것이 의의 기준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의의 기준이라고 했죠. 

바울이 ‘의’에 대해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바울은 또 ‘절제’에 대해서 복음을 전했죠.

우리말 ‘절제’로 번역된 헬라어 ‘엥크라테이사’(ἐγκράτεια)는 ‘-안에’를 뜻하는 ‘엔’(ἐν)과 ‘능력’ ‘권세’를 뜻하는 ‘크라토스’(κράτος)의 합성어죠.

절제란 성령의 능력 아래 머무는 것을 말하죠.

절제란 육신적인 소욕을 내 힘으로 이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스림받는 것을 말합니다.

벨릭스 총독의 경우에 뇌물을 바라는 게 그의 육적인 소욕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의 소욕 안에서 그것을 끊어내는 걸 말하겠죠.

 

그리고 바울이 마지막으로 전한 것은 ‘심판’의 복음이었습니다.

‘심판’이란 헬라어로 ‘크리노’(κρίνω)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은 자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죠.

그리고 죽을 때는 이 땅에서 심고 뿌린 대로 하나님께서 셈하실 때가 있죠.

그것이 바로 각 사람의 행위대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사용했는지에 따라 상을 주시는 것이죠.

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자들은 그 마지막 날에 영원한 형벌의 심판이 있는 것이죠.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세 심판에 대해서 복음을 전한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관계를 형성하고, 육신적인 정욕을 성령의 다스림 속에 절제하고, 이 땅에서 선한 것을 뿌리고 심어 영원한 상급을 셈을 받도록 말이죠.

 

(전개)그렇다면 벨릭스 총독과 드루실라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본문 23절 중반에 보면 “두려워하여”라는 말씀이 나오죠.

‘두려워하다’는 헬라어 ‘엠포보스’(ἔμφοβος)는 ‘겁에 질리다’(terrified, affrighted), ‘두려움에 내던져지다’(thrown into fear)는 뜻입니다.

벨릭스는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복음을 듣자 순식간에 겁에 질린 채 두려움에 내던져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태껏 로마 총독으로 부임해 있는 동안 그 누구도 바울처럼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해 날카롭게 그의 영혼을 흔들어깨워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죠.

모두가 아부하고 모두가 벨릭스 총독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지만, 그래서 한 번도 심판에 관해 생각도 못했는데, 바울이 그 심판을 이야기하니까 두려움에 벌벌 떨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두려움 때문에 바울을 다시 부르겠다고 했는데, 26절에 보면 그 두려움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 두려움 보다도 더 큰 것, 곧 바울한테 돈을 받을까 바라는 마음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옥에 구금돼 있는 바울을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했다고 전하는 것이죠.

바울이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복음을 전해도, 그야말로 그때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벨릭스에게는 의와 절제와 심판에 관한 복음보다도 오로지 이 현실 세계의 돈, 뇌물이 훨씬 크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결론이 납니까? 본문 27절 말씀입니다.

“이태가 지난 후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깨달음)‘이태’란 2년을 말하는 것이죠.

2년이 지나 벨릭스의 소임이 끝나 새로운 총독 보르기오 베스도가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벨릭스 총독은 로마 황제 네로에게 로마로 소환을 당했습니다.

총독의 거주지인 가이사랴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혼재해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주도권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벨릭스 총독이 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해 유대인들을 제압하면서 헬라인들 편을 든 것이었죠.

그 일로 유대인들이 생명을 잃고 재산을 잃게 되자 네로 황제에게 탄원서를 냈고 결국 벨릭스 총독이 소환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명예 퇴진을 한 것이죠.

 

그렇다면 그때라도 바울을 풀어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불명예 퇴진을 하는 마당에도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을까해서 바울을 감옥에 구류시켜 둔 것이었죠.

얼마나 교활한 자인지, 얼마나 부패한 관리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이 후에 벨릭스 총독의 최후가 어떻게 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는 주후 79년 벨릭스를 통해 낳은 아들 아그립바와 함께 폼페이에서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시절에 벨릭스가 바울이 전한 의와 절제와 심판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성령님의 통제를 받고, 이 땅에 생명과 사랑을 심어 하나님의 상급을 받았겠죠.

하지만 그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은 잠시 뇌물만 더욱 원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 끝까지 복음을 거부한 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더욱이 그의 아내 드루실라 역시 벨릭스와 함께 복음을 거부하다가 끝내 화산 폭발로 죽임당했습니다.

그녀 역시 바울이 전한 의와 절제와 심판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면 설령 화산폭발로 죽임당해도 영생의 상급을 얻지 않았겠습니까?

 

(적용)그렇기에 더 큰 문제는 우리들 자신 아니겠습니까?

나도 매일 의와 절제와 심판의 복음을 듣는데, 심판에 관한 복음을 들을때마다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보다 이 세상의 것이 더욱 크게 들어올 때 그 두려움은 잠시일 뿐 이 세상의 것에 더욱 취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늘 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 천년만년 살 존재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심은 대로 상급을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이 땅에서 퇴장할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베릭스 총독이 2년만에 퇴임하고 로마로 소환당했는데, 바로 그 시기를 안다면 매일매일 바르고 정의롭게 자기 일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더욱이 그가 언제 죽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머잖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할 존재임을 알았다면 이 땅에서 퇴장할 준비를 바르게 하며 살았겠죠.

 

그것은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화산폭발로 최후를 맞이할 때, 자연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우리는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늘 하나님의 셈하신 심판의 날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매일매일 바른 퇴장을 준비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문) 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의 셈하심을 생각하며 매일매일 바른 퇴장을 준비하며 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렇기에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하나님의 셈하심을 늘 염두에 두며 살고 있느냐?”

“바울이 벨릭스아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의 복음을 전했을 때 잠깐은 두려워했지만 이 땅의 뇌물을 훨씬 크게 여긴 자였지 않더냐?”

“너는 머잖아 도래할 하나님의 셈하심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살지만 이 땅의 것을 훨씬 크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더냐?”

“벨릭스가 매일매일 퇴장할 때를 내다보며 살았더라면 오늘 하루를 더욱더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지 않았겠느냐?”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그러니 너도 매일매일 퇴장을 바라보며 하루하루 성실과 진실의 씨앗을 뿌리고 심으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듯이 그날 하나님 앞에서 셈하실 때를 바라보며 산다면 진리와 생명을 뿌리고 심지 않겠느냐?”

“화산폭발로 최후를 맞이하든지, 자연사로 맞이하든지, 분명코 셈하실 그 날에 나게 상급을 받기를 주님은 원하지 않겠느냐?”

 

(찬양)그날이 도적같이 이를 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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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벨릭스 총독은 살아생전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복음을 두려워했지만 이 땅의 것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세상의 것을 훨씬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와 그의 아내와 자식까지 로마의 지진과 화산으로 인해 불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 영벌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죠.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은 매일매일 의와 절제와 심판을 염두에 두며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이 땅에 살아도 언제 어느때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주님 앞에 서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날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셈하심,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실 날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기회 있는 대로 진리와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심을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당장 이 땅에서 퇴장하더라도 주님의 나라에서 새롭게 등장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하나님의 상급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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