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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형들과 달리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서 입혀줬죠.
그것도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일이죠.
그런데 요셉은 해와 달 열 한 별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도 꿨다고 자랑을 했죠.
아버지의 편애, 그리고 자기 꿈을 자랑하듯이 이야기하는 그 모든 일들이 형들에게 시기와 질투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로 인해 형들이 양을 치고 있는지 확인하고 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받아 요셉이 세겜으로 도단으로 갔죠.
그때도 형들에게 뽐내기 위해 채색옷을 입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 형들은 그 요셉을 보자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하면서 그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서 죽여버리고자 했죠.
다행히 르우벤에 죽이지 말고 내버려두자고 했고, 유다는 요셉을 은 20냥에 애굽 상단으로 팔아넘기자고 했죠.
대신 짐승의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아버지에게는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말했죠.
그러니 아버지 야곱은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하자 너무나도 큰 고통과 슬픔에 처하게 되었죠.
그 후 요셉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곧 노예로 들어가 일하게 되었죠.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인생을 걷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을 것이고, 다른 형들에게 얼마나 교만한 모습으로 보였는지 깨우쳤겠죠.
17살에 종으로 팔려 온 요셉은 약관 30살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그러니까 13년간 종살이와 옥살이를 하며 지낸 셈이었죠.
그 중에 11년은 종살이를 하면서 살았고, 나머지 2년간 옥살이를 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11년간의 종살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까?
요셉은 평소에도 정직해서 보디발 장군의 가정 총무를 맡았고, 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도 결코 넘어지지 않았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 부인은 요셉이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자 오히려 겁탈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요셉을 감옥에 넣도록 한 것이었죠.
물론 보디발 장군은 요셉이 결코 그런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감옥에 넣었어도 옥에서 제반 사항을 돌보도록 했죠.
그렇다면 보디발은 2년간 요셉에게 옥살이를 시킬 게 아니라 1년만 하고 내보내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 2년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2년 만에 애굽의 파라오가 7년 흉년의 꿈을 꿨고, 애굽의 술사나 박사가 풀지 못할 때 요셉이 그 꿈을 풀었기 때문이죠.
만약 그 전에 나갔다면 요셉은 애굽의 파라오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국무총리가 되는 길도 열리지 않았겠죠.
(깨달음)그렇기에 요셉이 2년간 옥살이하게 된 그 이유를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기간입니다.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그 땅으로 이주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 말이죠.
그렇기에 요셉에게 옥살이 2년은 억울하고 참기 힘든 수모의 기간이지만 그 기간을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였습니다.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 때로 우리에게 힘든 일과 수모를 겪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이죠.
내가 악한 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다면 그것을 작정하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기간이 내가 생각한 것도 더 길수도 있겠죠.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속에서 나를 믿음으로 연단시키고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바라보는 게 중요하겠죠.
천사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전도서 3장 1절에 말씀합니다.
그 때를 주장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말이죠.
(역배)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끌려나와 안토니아 요새 감옥에 붙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때 감옥 밖에서는 예루살렘 내에 40여명의 유대인 암살단이 조직이 되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죠.
그 사실을 바울의 조카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감옥 속에 바울에게 알려줬고, 또 그 사실을 천부장 루시아에게 알려줬죠.
그때 천부장 루시아는 로마 사람인 바울을 함부로 처단했다는 그 모든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생각하게 되었죠.
그 까닭에 그는 그날 밤 9시에 보병 200명과 창병 200명 기병 70명 총 470명의 군인을 동원해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호송케 했죠.
예루살렘에서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까지 104km거리인데, 그곳까지 바울을 말로 태워 470명의 군인들로 호위케한 것입니다.
물론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로마 총독에게 편지를 써서 군사들 편으로 보냈죠.
그 편지는 바울을 위한 편지가 아니라 바울을 빙자한 자기 자신을 알아달라는 아부성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로마 사람인 바울을 죽음에서 건져낸 자요, 그 바울을 이 밤에 보내는 것은 죽음에서 건져내기 위함이라고 말이죠.
더욱이 바울의 반대편 고발자들도 곧바로 보낼 터이니, 이 바울을 총독께서 잘 심문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편지였죠.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죠.
글라우디오 루시아 천부장은 바울에게 써 보낸 편지를 통해 자기 공적을 알아달라는 허풍을 떠는 것이었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 공적을 내세우고 허풍을 떠는 자들을 통해서는 그 어떤 영광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를 통해 바울을 가이사랴까지 호송토록 했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그 어떤 영광을 누리지 못한 천부장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70년만에 고국으로 돌려보낼 때 바사 왕을 사용하신 것과 같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바사 왕을 ‘내 목자’라고 이사야 44장 28절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있죠.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몽둥이와 같은 역할을 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는 ‘내 종’이라고 예레미야 25장 9절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죠.
하지만 바사 왕 고레스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쓰임받은 것 같았어도 진리이신 주님을 믿지 않았기에 구원받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은 것도 없었습니다.
470명의 무장한 군인들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보낸 천부장 루시아 역시 바로 그와 같은 자였던 것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을 행했을 때 우리는 나의 자랑거리나 허풍을 떨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했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곳 가이사랴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에 도착한 상황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무장한 470명의 군인들이 예루살렘에서 60km 떨어진 안디바드리에 도착을 했습니다.
말을 타지 않은 보병 200명과 창을 든 창병 200명이 하룻밤에 60km를 도보로 행군할 정도로 강행군을 펼친 것이었죠.
그들이 안디바드리에 도착했을 때 보병 200명과 창병 200명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는 기마병 70명만 있어도 바울을 호위하고 호송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죠.
그 정도 거리면 예루살렘의 암살단도 어찌하지 못할 거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울은 말을 타고서 안디바드리에서부터 가이사랴까지 약 40km를 기병들과 함께 움직였던 것입니다.
드디어 그들이 도착했을 때 천부장 루시아의 편지를 총독이 받았고, 그 앞에 바울을 세웠습니다.
바울은 그때 죄가 확정된 상태가 아니라 미결수 신분으로 총독 앞에 선 것이었습니다.
그때 총독이 한 말이 본문 34-35절에 나와 있는데,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총독이 읽고 바울더러 어느 영지 사람이냐 물어 길리기아 사람인 줄 알고
이르되 너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으리라 하고 헤롯 궁에 그를 지키라 명하니라”
(원해)로마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보자마자 어느 영지 사람인지, 어느 관할에 속한 사람인지 확인하고자 물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임을 밝혔겠죠.
그 당시 유다 총독 벨릭스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의 대사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길리기아 출신이라면 자신이 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벨릭스는 바울의 고발자들이 오면 재판을 열기로 하고 부하들에게 명령해서 바울을 ‘헤롯 궁에 지키라’고 한 것이죠.
그 당시 헤롯 궁은 그 유명한 헤롯 대왕이 지중해 연안 도시인 가이사랴에 자신을 위해 건축한 궁전을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헤롯 대왕이 죽은 뒤에 헤롯의 궁전은 유대 총독의 관저가 되었죠.
물론 옛날 궁전에는 지하실에 감옥을 만들어 놓고 있었죠.
그렇기에 총독 벨릭스가 부하들에게 바울을 ‘헤롯 궁에 지키라’고 한 것은 바울을 지하 감옥에 가둬두라는 뜻이었습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이때부터 바울은 얼마 기간 동안 헤롯 궁전의 지하 감옥에 갇혀 지냈을까요?
벨릭스 총독은 바울을 고발할 사람들이 온다면 곧바로 재판을 열어 판결을 할 생각처럼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로부터 바울은 최소한 2년간은 헤롯 궁전의 지하 감옥에, 다시 말해 로마 총독의 관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왜죠?
사도행전 24장 26-27절을 보면 총독 벨릭스는 법대로 판결하는 정직한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재판에 연루된 사람들로부터도 뇌물을 거두어들이는 탐관오리였습니다
그러니 무려 2년 동안이나 바울을 헤롯 궁의 지하 감옥에 방치한 것은 종종 바울과 면담을 하면서 뇌물을 거둬들이고자 한 것이었죠.
하지만 바울은 그때마다 그 탐관오리 벨릭스 총독에게 뇌물을 주거나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 빨리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떠나고자 했지만 그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원치 않는 누명을 쓰고 2년간 감옥에 갇힌 신세처럼 바울도 원치 않게 2년간 그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적용)그러나 바울이 헤롯 궁의 지하 감옥에 갇힌 2년간의 세월이 허송세월이었겠습니까?
아니죠
그 속에서 바울은 주님의 섭리 속에서 말씀과 기도로 더욱더 갈고 다듬었을 것입니다.
그 2년 동안 벨릭스 총독에 수시로 바울을 불러내 뇌물을 받고자 감언이설로 바울을 유혹했겠지만 바울은 그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죠.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앞에 흔들림 없이 자기 자신을 말씀으로 지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말씀처럼 겉사람은 더 낡아졌을지 몰라도 속사람은 주 안에서 더욱 강해졌던 것이죠.
그런 과정에 있었기에 바울은 훗날 참수형 당하기 전 로마의 지하 메마틴 감옥에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그렇게 격려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뜻하지 않는 코너에 몰렸을 때 그 속에서 우리 속 심령을 단련케 하시는 믿음의 훈련장으로 삼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감동을 주시면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님께서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만드시는 분임을 너는 믿고 있느냐?”
“때로 네가 원치 않게 억울한 누명을 쓴 요셉이나 바울의 처지를 겪는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신실하게 살아왔는데 원치 않게 힘든 코너에 몰렸다면 말이다.”
“요셉도 11년의 종살이 끝에 억울한 모함을 받아 2년간 옥살이 하는 수모를 겪지 않았더냐?”
“바울도 복음을 전하다가 지금 원치 않게 가이사랴의 헤롯 궁전 지하 감옥에 2년간 갇힌 꼴이지 않더냐?”
“그러나 요셉도 바울도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고 속 심령을 믿음으로 세워가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되고 참된 제자로 살 때 그와 같은 억울한 환경에 처할 때 오직 인내했으면 좋겠구나.”
“너의 겉사람은 힘들지라도 너의 속사람은 날로 주님의 말씀과 기도로 강한 군사와 같은 믿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 어떤 환란도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에 말이다.”
“지금 네가 혹시라도 원치 않는 헤롯 궁전의 지하에 갇혀 있는 그런 신세와 같다고 생각하느냐?”
“지금 네가 혹여라도 보디발의 감옥 속에 갇힌 요셉의 신세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하의 때와 만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에 가장 선하신 때에 너를 새롭게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믿음으로 걷는 너를 향해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분이지 않겠느냐?”
(찬양)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기도 들어주소서 하나님 주의 길로 인도하소서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자다운 제자로 살지라도 때로 원치 않는 어려움과 환란의 코너에 몰릴 때도 있습니다.
그때 그 일을 주도하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때와 시기를 바라며 그 상황에서 겉사람은 답답할지라도 속 사람은 말씀과 기도로 세워나가는 것이죠.
천하 범사에 때와 기한을 정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그 모든 길을 새롭게 열어주실 분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요셉처럼 억울한 일에 휘말려도, 바울처럼 원치 않게 헤롯 궁전 지하 감옥에 갇히는 것 같은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장 8-10)
우리가 우껴삼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치 않는 것은 우리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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