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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행24:1-9)

by 똑똑이채널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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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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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전광 목사의 〈백악관을 기도실로 만든 대통령 링컨〉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1837년 링컨은 ‘노예제도 폐지론자 규탄안’이 통과된 것을 보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토록 노예제도 폐지에 대해 열을 올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법안을 만들어 변론했지만 그 문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링컨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요 생명의 길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링컨이 국회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때도 링컨은 노예제도 반대입장을 분명히 밝혔죠.

하지만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백인 노예 옹호론자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노예제도에 대한 논쟁을 교묘히 피하면서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하고 애매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과연 누가 상원의원에 당선되었을까요?

링컨의 주장이 옳았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A. 더클러스가 당선되고 말았습니다.

왜 링컨이 낙선됐을까요?

인간의 욕구 곧 대다수의 백인들이 원하는 노예제도를 유지하고픈 백인들이 더글러스를 밀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링컨은 그 후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믿고 계속 정계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급기야 1860년 링컨은 더글러스 의원과 다시 겨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때도 링컨은 노예제도 해방을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과 지혜를 구했죠.

그렇게 성실하게 준비한 끝에 1863년 1월 1일 마침내 다음과 같이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인에게 자유를 주신 것처럼 흑인에게도 자유를 주셨습니다. 이날 즉시, 그리고 이후로 모든 노예들에게 영원히 자유를 선포합니다.”

 

그때 누가 가장 기뻐했을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억압과 구속 속에 살아왔던 흑인들이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기뻐했겠죠.

그와 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흑인들 중에 한 사람이 링컨 앞에 무릎을 꿇더니 링컨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당신은 우리 모든 노예들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러자 링컨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성경에도 같은 이스라엘 동족끼리는 노예로 삼지 못하도록 율법으로 정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해서 전답을 팔 경우 남의 집에 노예로 들어갈 수 있었죠.

그러나 한 번 노예는 영원히 노예가 되는 제도를 두지 못하도록 50년 곧 희년이 되면 다들 자유케 하는 법을 제정해주셨죠.

왜죠?

같은 동족끼리 대대로 종과 상전으로 차별을 두며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것처럼 흑인들을 노예로 두며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링컨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인들은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으면서도 흑인을 노예로 두며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 까닭에 링컨이 노예해방제도를 가져오려고 법적으로 안달할 때 그 백인들이 진리와 생명을 짓밟고자 안달했던 것이죠.

 

(적용)이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할때도 마찬가지였죠.

예수님께서 각종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줄 때 수많은 유대 군중들이 메시아로 믿고 따랐죠.

하지만 그 당대의 기득권층 곧 미국의 백인 기득권층처럼 대제사장과 성전 관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들었죠.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자신들의 기득권 세상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자신들의 기득권에 반하는 자는 그래서 누구든지 살려둘 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때가지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하셨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땅에 보내신 예수님의 사명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도록, 하나님께서 부활의 영광을 덧입혀주심을 아셨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바울이 드디어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 섰죠.

그날 밤 9시에 바울은 무장한 군인 470명의 호위를 받으며 예루살렘에서 104km 떨어진 기아사랴까지 말을 타고 왔죠.

물론 가이사랴까지 40km를 남겨둔 안디바드리에 도착했을 때는 무장한 군인 중 400명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거기까지면 바울을 죽이겠다는 암살단원이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곳부터는 가이사랴까지 남은 군사들이 충분히 호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바울이 그렇게 70명의 호위 군인들의 보호 속에서 벨릭스 총독 앞에 섰을 때 그 총독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바울이 어느 관할에 속한 사람인지 물었고,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임을 밝혔죠.

그러자 벨릭스 총독은 자기 관할임을 알고 바울의 고발자들이 오면 그때 정식으로 재판하기로 하고 바울을 그 관저 지하 감옥에 가두도록 했죠.

 

(깨달음)이상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이었습니다.

왜 로마 총독 벨릭스는 바울을 그곳 헤롯 궁전의 지하 감옥에 가둬두고자 한 것이었습니까?

왜 바울은 그곳 지하 감옥에서 2년간 갇혀지내야 했습니까?

 

벨릭스 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뇌물을 좋아하는 탐관오리라 바울에게 뇌물을 받을까 하여 2년간 가둬둔 것이었죠.

하지만 바울은 그 2년 동안 결코 그 어떤 뇌물도 쓰지 않은 채 하나님의 뜻을 받들며 나아갔습니다.

 

(적용)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충성되게 받드는데 그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고 했죠.

그때 우리는 벨릭스 총독이 원하는 것처럼 뇌물을 쓰거나 불의한 방법을 동원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인내하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11년 종살이와 2년간의 옥살이 끝에 국무총리로 삼아주신 하나님께서는 바울도 그렇게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결해주셨으니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계셔서 우리를 향해서도 그렇게 신실하게 일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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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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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헤롯 궁전, 다시 말해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랴의 지하 감옥에 갇힌 지 닷새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 닷새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104km떨어진 가이사랴의 총독 벨릭스를 찾아왔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을 고발하기 위함이었죠.

 

물론 대제사장 아나니아 혼자 온 게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몇 몇 장로들과 함께 왔고, 그리고 자신의 뜻을 대변해 줄 변호사 더둘로도 대동했습니다.

더욱이 9절 말씀을 보면 그들의 주장에 무조건적으로 동조할 박수부대까지 동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아니니아는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쁨이 되는 대제사장이었을까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바르고 의로운 길로 인도하는 대제사장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십일조를 횡령했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폭력과 암살까지도 동원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었죠.

그토록 불의한 대제사장 아니니아는 바울을 죽이기 위해 대규모의 고발단을 이끌고 총독 벨릭스 앞에 선 것이었습니다.

 

(원해)그런데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우리말 ‘변호사’로 나와 있는 헬라어 ‘레토르’(ῥήτωρ)는 ‘연설자’(a speaker) 혹은 ‘웅변가’(an orator)를 뜻하는 말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별도의 자격을 갖추지 않아도 누구든지 돈을 받고 법정에서 변론을 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누군가를 말로 잘 설득하는 수사학을 지닌 웅변가라면 특별한 법률지식 없이도 충분히 변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로마법에 능통한 율법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말발이 좋고 언변술에 능한 수사학자요 웅변가였던 것입니다.

더둘로가 목적하는 것은 바울을 로마법대로 판결해달라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직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유대 암살자들이 원하는 것, 곧 바울을 죽이는 판결만 이끌어내면 되는 것이었죠.

그를 위해 더둘로는 율법보다도 오직 현란한 말발로 벨릭스 총독의 마음을 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더둘로가 총독 벨릭스 앞에서 어떻게 세치 혀를 놀리며 바울을 고발하고 있습니까?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3)

 

(깨달음)더둘로는 벨릭스 각하를 칭송하는 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가 놀리고 있는 세 치 혀 그대로 벨릭스 각하는 유대인들에게 태평성대를 제공한 총독이었을까요?

 

주후 52년부터 60년까지 유대 지역의 11대 총독이었던 벨릭스 재임 기간은 오히려 크고 작은 소유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노예 출신으로 총독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였으니 얼마나 그가 뇌물에 밝은 자였겠습니까?

그러니 시민을 괴롭히는 도둑떼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 소요를 방치한 인물이 그였습니다.

그러니 후에 로마 황제 네로에게 소환당한 것도 권력을 남용한 그의 처신 때문이었던 것이죠.

그런 벨릭스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평안과 더 개선된 삶을 제공했다고 말하는 더둘로의 발언은 그아말로 아부성 발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개)그렇게 세 치 혀를 뗀 더둘로가 본격적으로 주장한 바울의 고소 내용이 무엇입니까?

본문 4-8절이 그가 주장하는 바이고, 9절은 함께 온 유대인들이 박수를 치며 동조하는 말입니다.

당신을 더 괴롭게 아니하려 하여 우리가 대강 여짜옵나니 관용하여 들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그가 또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므로 우리가 잡았사오니6하반-8상반 없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 하니 유대인들도 이에 참가하여 이 말이 옳다 주장하니라

 

(역배)이 부분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총독님을 오래 방해하지 않겠으니,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우리의 고발을 잠깐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본 바로는, 이 자는 염병 같은 자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소란을 일으키는 자요, 나사렛 도당의 우두머리입니다.

그가 성전까지도 더럽히려고 하므로, 우리는 그를 붙잡았습니다. (없음)

총독님께서 친히 그를 신문하여 보시면, 우리가 그를 고발하는 이유를 다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 사람도 이에 합세해서,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하였다.”

 

(원해)과연 더둘로는 무엇을 고발하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법정에서는 유대인들의 법을 적용해 바울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곳이라 로마법을 적용해서 바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두 가지 사항을 고발하고 있죠.

첫째는 바울이란 자가 ‘전염병’과 같은 자라는 것이요, 이 자는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 ‘소요’로 번역된 헬라어 ‘스타시스’(στάσις)는 ‘반란’(an insurrection) ‘폭동’(strife)을 뜻하는 말입니다.

당시에 역병이나 흑사병을 예방하고 다스리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백성들에게 민란을 일으키는 자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더둘로가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그렇게 고발하는 이유가 뭡니까?

바울이란 자가 그 정도의 전염병을 지닌 자처럼 매우 위험천만한 자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두 번째 더둘로가 고발한 내용은 바울이란 자가 ‘나사렛 이단의 괴수’ 곧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이단’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처럼 ‘신조를 따르는 모임’(a body of men following their own tenets)을 말합니다.

한 마디로 ‘당파’ 곧 ‘파당’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만큼 더둘로는 바울이란 자가 ‘나사렛 도당’처럼 ‘불순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이란 자도 30년 전의 나사렛 예수처럼 얼마든지 세력화하여 로마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봉기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울을 고발한 더불로의 내용은 그것입니다.

바울이란 자가 ‘성전을 더럽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그런데 어떻습니까?

더불로가 그 세 치 혀로 놀린 바울의 고발 내용이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죠.

더둘로는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무지할 뿐 아니라 로마법에 대해서도 무지한 자입니다.

 

그가 바울을 고발한 내용들은 다 거짓입니다.

바울이 전염병과 같이 유대인들을 소요케 한다,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다,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했다, 모두 거짓입니다.

바울이 유대인들을 소요케 한 증거도,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증인도, 바울이 성전을 더럽게 했다는 증인도 없기 때문이죠.

 

모름지기 법정에서는 증인이 있어야 하고 증거가 있어야 고발 내용이 채택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더둘로는 그 어떤 증인도 증거도 없는 형편입니다.

그래서 본문 8절을 보면 뭐라고 벨릭스 총독에게 말합니까?

“당신이 친히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고발하는 이 모든 일을 아실 수 있나이다”하고 말하죠.

자신이 고발한 내용에 대해 어떤 증인도 증거도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벨릭스 총독이 바울을 심문해 보면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누가 동조합니까?

대제사장이 이끌고 온 몇 몇 장로들 그리고 암살단원들, 그리고 함께 온 박수부대죠.

그들은 더둘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옳소, 옳소.”하고 거들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옳소, 옳소’하고 소리치는 것입니까?

지금 벨릭스 총독이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지 6년째 되는 해입니다.

그 동안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로마 총독 벨릭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바쳐왔습니다.

그러니 박수부대 격인 그 군중들이 ‘옳소, 옳소’하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당신은 판결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죠.

 

(성화)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 30년 전 유대인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고발하고 압력을 가한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때도 대제사장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죄를 들먹이며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붙잡혀 한 밤부터 이른 아침까지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가 심문받았죠.

대제사장 안나스의 법정, 안나스의 사위요 현행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 총독 법정, 헤롯 법정, 그리고 다시금 심문한 빌라도 총독의 법정이었죠.

그때도 대제사장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성전모독죄를 덧씌우고자 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죄까지 덧씌우고자 했죠.

하지만 그에 관한 증인과 증거가 부족하자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행세한다면서 정치범으로 고발하고자 했죠.

그가 유대인의 왕이 되면 얼마든지 그 추종 세력과 함께 로마에 반기를 들고 민중봉기를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대제사장 무리들이 예수님을 정치범의 죄목으로 덧씌우고자 한 것이었습니까?

이전에는 대제사장과 헤롯의 법정에서 유대인의 법으로 죽이고자 했지만 안 됐기 때문에, 로마 총독인 빌라도 앞에서 정치범이라는 로마법을 들이대며 죽이려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우두머리로서 얼마든지 유대 사회에 폭동과 소요을 일으킬 전염병과 같은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무리들이 주장하는 고발 앞에 일반 군중들이 어떻게 호응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에 나오는 박수부대처럼 “옳소, 옳소.”하며 똑같이 소리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했죠.

 

(깨달음)그와 같은 사건을 통해, 오늘 본문의 이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30년 전이나 30년 후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진리와 생명을 죽이고자 하는 온갖 아첨하는 말과 불의한 뇌물을 쓰고, 박수부대까지 동원하고 있다는 것이죠.

30년 전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도 그렇고, 30년 후의 대제사장 곧 본문 속의 아나니아 대제사장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들이 유대 율법이나 로마법에 대해 알지도 못한 채 오직 수사학과 말발만 좋으면 된다는 더둘로를 고용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더둘로 역시도 마찬가지였죠.

더둘로는 유대인의 율법이나 로마법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라 그저 수사학 말할 하나로 바울을 고발코자 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나 생명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수중에 떨어질 돈만 많이 받으면 족하다고 생각한 파렴치한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바울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30년 전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진리와 생명의 길을 똑같이 밟고 있는 모습이죠.

바울은 30년 전 예수님을 짓밟고 죽이려던 대제사장의 무리들처럼 똑같이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바울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까?

왜 바울은 불의한 대제사장처럼 똑같이 뇌물을 쓰거나 말발 좋은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은 것입니까?

왜 바울은 예수님처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한 것입니까?

 

(적용)마가복음 8장 35절을 통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이죠.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바울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그대로 진리와 생명을 전하고자 자기 목숨을 주님께 내어맡긴 것이었습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위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가 진리와 생명의 길을 좇다가 불의한 자들이 처놓은 덫앞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주님께서 가신 길을 좇도록 하셔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을 옭아매려던 대제사장 무리들은 지금도 바울을 옭아매려고 동일한 방법을 쓰고 있지 않더냐?”

“30년 전에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고간 대제사장 무리들과 옳소, 옳소하는 군중들의 모습은 지금도 똑같지 않더냐?”

유대인들의 법으로 바울을 죽이려는 게 수포도 돌아가자 로마 총독 앞에서 내란죄를 적용해 바울을 죽이려는 대제사장 무리들의 모습 말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뇌물을 쓰거나 유능한 변호사를 고용해서 자기 방어를 한 게 아니지 않느냐?”

오직 바울은 30년 전 주님께서 보여준 진리와 생명의 길을 좇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바라고 있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세상 모두가 Yes Yes, 옳소 옳소 하며 불의한 길을 좇을 때, 너도 그 길에 들어서라고 유혹할 때 너만은 No No 해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의 길을 좇는 너를 향해 불의한 길로 들어서라고 유혹할 때도 너만은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이 세상은 사탄의 세력들이 공중권세를 잡고 있어서 너를 그렇게 뇌물과 권력으로 유혹해 굴복시키려 하지 않겠느냐?”

그때 너는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바라며 그 모든 유혹과 억압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면 좋겠구나.”

그런 너를 바라보시는 주님께서는 너로 인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요 너로 너의 발을 사슴과 같이 기뻐 뛰놀 수 있도록 인도해주지 않겠느냐?”

 

(찬양)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 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 하시리라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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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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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과 사탄의 세력에 속한 자들이 영적인 싸움을 벌이는 한복판입니다.

30년 전의 대제사장 무리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중들은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 죽이고자 빌라도 총독에게 고발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대제사장 무리는 말발 좋은 더둘로를 고용한 채 박수부대까지 동원해서 진리를 따르는 바울을 죽이고자 하고 있습니다.

거짓과 악에 속한 자들, 사탄의 세력에 속한 자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길을 좇아 자기 살 길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십자가 대속의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가셨습니다.

본문 속의 바울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진리와 생명을 길을 포기하지 않고 그 어떤 뇌물도 쓰지 않은 채 그 어떤 말발 좋은 변호사도 고용치 않은 채 하나님의 뜻을 바라며 주님의 기쁨되는 길을 좇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 때에 바울을 풀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불의한 세력 앞에 온갖 유혹을 받을 때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바울이 걸어간 진리와 생명을 좇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시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총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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