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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오늘날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 형식은 따르지 않지만 그 형식 속에 담긴 정신만큼은 이어받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레위기에는 제사와 관련된 말씀이 초반부부터 나옵니다.
레위기 1장은 모든 제사의 모본이라 할 수 있는 번제를 어떤 정신으로 드려야 하는지 잘 설명해주죠.
번제란 제물을 남김없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불태우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 제물과 함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부인하며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 제사죠.
오늘날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은 예배를 드릴 때 철저히 나 자신을 부인하고 동시에 하나님께 나 자신을 의탁하여 드리는 것이죠.
그런데 번제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흠없는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흠 없는 번제물을 바치기 위해서는 그 전부터 먼저 살펴야 했죠.
양의 경우에 어디가 다쳤거나 고장난 부위는 없는지 하고 말이죠.
지금도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준비된 마음과 자세죠.
그래야 흠없는 예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요일 날 같은 경우엔 바쁜 일정이 겹치고 일하다가 늦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일예배 때 허겁지겁 나와 예배드리는 분과 미리 나와 침묵으로 기도하며 준비하는 분의 예배는 다를 수밖에 없죠.
그런데 번제의 그 흠없는 제물을 어떻게 드립니까?
레위기에 보면 제물을 가지고 나온 사람이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죠.
이른바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게 전가시키며 그 제물이 자신의 죄를 위해 죽는 것을 말하죠.
그것은 오늘날의 예배가 회개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지은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기도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품어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죠.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게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의롭게 여겨주시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회개 없이 굿을 하는 무당의 굿판과 우리의 예배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면 회개죠.
번제물을 가지고 온 사람이 그 번제물에 안수한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이제 그 번제물을 잡아야 하겠죠.
레위기를 상세하게 읽기 전까지는 그 당시의 제사장들은 백정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레위기를 자세하게 읽어보니까 그 제물을 가지고 온 당사자가 안수한 다음에 그 제물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역할은 제물을 잡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꺼내 정결하게 씻은 다음에 제사장에게 주는 것이죠.
그러면 제사장은 그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고기와 내장을 모두 불에 태우는 역할을 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제물의 목을 칠 때, 가죽을 벗길 때, 팔다리를 자르고 내장을 꺼내 씻을 때, 그 모든 피를 뒤집어 쓰고 역겨운 냄새도 다 맡겠죠.
그때 자신이 지은 죄가 그렇게 피로 물든 죄와 같다는 것, 자신이 지은 죄가 그렇게 역겨운 냄새나는 죄임을 자각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과정을 행해나갈 때 그 제사가 살아 있는 제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자기 목을 치는 심정으로 제물의 목을 치는 것이죠.
자신의 안팎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결단으로 제물의 가죽을 벗겨 각을 뜨는 것이죠.
자신의 사지백체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리라 다짐하며 제물의 내장과 다리를 씻는 것이죠.
그런 과정을 통해 제사드리는 그 당사자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지는 것이었죠.
그런 과정을 통해 제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 어떤 심정일까요?
내가 이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역겨운 냄새를 다 맡으며 집으로 돌아간다해도 그의 영혼만큼은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는 다시는 내가 동일한 죄를 범하지 말아야 되겠다는 결단을 하면서 집으로 일상으로 돌아갔겠죠.
왜죠?
이미 제사를 통해 자기 자신을 부인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의틱할 때 그 심령에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어 자리잡게 된 이유입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예배는 어떤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배는 목사의 설교와 누군가의 기도를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나를 의탁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는지 말입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나를 굴복시키고 나를 부인하는 시간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고자 하는지 말입니다.
그런 예배를 통해서 나를 죽일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여 한 주간을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그렇게 매 주일 주님앞에 나를 부인하고 나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때 어찌 우리의 삶이 날로 새로워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년 52주 예배를 드리고 2년 100주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5년 10년 예배를 드릴면 그만큼 우리의 삶도 더욱더 은혜로 충만해지고 우리의 삶도 날로 더 새로워져야 하는 것이죠.
예배당 안에서 드리는 살아 있는 주일 예배를 통해 예배당 밖 우리의 삶과 일상이 생활 속 예배자로 변화되는 것 말이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일깨워주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노예 출신으로 총독의 위치까지 올랐던 벨릭스는 사도 바울에게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의란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무릎 꿇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할 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걸 말하죠.
절제란 하나님 앞에서 새 생명을 얻는 자가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을 건져올리고자 쓸모없는 것을 절제하며 사는 걸 말하죠.
심판이란 하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영벌의 심판이 있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상급의 심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죠.
그와 같은 의와 절제와 심판의 복음을 전해들은 벨릭스 총독은 무엇보다도 심판에 관한 복음 앞에 두렵고 떨 수밖에 없었죠.여태껏 그 누구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 준 사람은 없었고 모두가 아부성 발언만 해줬기 때문이었죠.
그러니 한 번도 들어볼 수 없었던 지옥 영벌과 상급의 심판 앞에 그는 벌벌 떨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두려움도 잠시였죠.
오히려 이 세상의 뇌물이 그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고 바울에게 그와 같은 뇌물을 받을까 하여 바울을 감옥에 가둬버렸죠.
그 후에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 민란에 생겼는데 그것 역시 뇌물로 처리하려다가 그만 네로 황제에게 소환당해 불명예 퇴진을 당하고 말았죠.
문제는 자기 자신이 네로 황제에게 소환당할 즈음의 일이었죠.
여태껏 2년간 바울을 감옥에 붙잡아두고 뇌물을 받고자 했지만 바울은 결코 그런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않았죠.
그렇다면 자신이 불명에 퇴진을 당하는 마당이라면 무고한 바울을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그는 신임총독 베스도에게 업무인계를 준비하다가 바울을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고자 다시금 바울을 결박해 투옥시켜버렸죠.
(깨달음)그와 같은 사건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처럼 그는 하나님 앞에 영벌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아내와 그의 자식은 로마의 지진과 화산참사로 불에 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불의한 일에 가담하기보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의와 절제와 심판을 바라보며 진리의 씨앗을 심는 자들이 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 날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상급을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 주는 말씀인데 본문 1절에 나와 있습니다.
“베스도가 부임한 지 삼 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
(원해)벨릭스 총독이 네로 황제의 소환을 당한 뒤 신임 총독 베스도가 제12대 로마 총독으로 가이사랴에 부임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베스도 총독이 부임한 지 ‘삼일 후’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올라갔다’는 표현은 가이사랴가 저지대 해안가이고 예루살렘은 고지대 산악지대라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 배를 타고 와야 하는 상황이고, 그것은 그 당시에 하루 이틀 걸려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죠.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는 2,240km의 거리죠.
그 당시에는 요즈음처럼 빠른 페리호나 경비행기나 기차가 없는 상황이죠.
그 당시에 범선으로 로마에서 가이사랴까지 당도하려면 최소한 10일 이상 걸리는 항해 거리입니다.
배멀미도 할 수 있고 울렁증도 있다면 참 힘든 항해길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가이사랴에 도착하고서 하루만 쉰 다음에 바로 3일째 되는 날에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행차한 것이죠.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104km가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죠.
이유가 무엇일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임총독 벨릭스도 유대의 지도자들 곧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잘 보이고자 한 것처럼 신임총독 베스도도 똑같은 거죠.
그를 위해 몸이 피곤하고 고단해도 곧장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인사도 하고 잘 보이고자 간 것이죠.
(전개)그때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높은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신임총독 베스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본문 2-5절에 나와 있죠.
우리 함께 다시 한 번 읽어보실까요?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바울을 고소할새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더라
베스도가 대답하여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과 자기도 멀지 않아 떠나갈 것을 말하고
또 이르되 너희 중 유력한 자들은 나와 함께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만일 옳지 아니한 일이 있거든 고발하라 하니라”
(원해)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유대인 중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베스도 총독에게 바울을 고소하고 나선 상황입니다.
이전의 총독이었던 벨릭스 총독에게 직접 찾아가 변호사 더둘로까지 고용한 대제사장 무리들이 신임총독에게 똑같이 고소한 것이죠.
그래서 가이사랴에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까지 이송하게 해 주면 그 길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바울을 죽이려는 이유였습니다.
이때 베스도 신임총독이 뭐라고 답을 합니까?
바울이란 자가 지금 가이사랴에 붙잡혀 있고, 자기도 곧 그곳으로 갈 테니, 너희들 중 유력한 자들은 함께 내려가자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에게 옳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곳에 함께 가서 얼마든지 고발하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게 무엇입니까?
신임총독 베스도는 이전의 벨릭스와는 조금은 결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베스도 신임총독이 벨릭스처럼 뇌물을 바라는 자였다면 오직 유대인의 환심만 사고자 한 자였다면 당장에라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을 했겠죠.
하지만 신임총독 베스도는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신중한 사람답게 그들의 요구를 정중하게 거절하죠.
대신에 함께 내려가서 함께 죄를 따져보다조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베스도 신임총독은 새로 파견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지금의 모습만큼은 이전의 벨릭스 총독과는 다른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을 고소한 대제사장 무리들과 유대 사회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장로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바울이 감금돼 있는 2년 동안 그들은 지금 변화된 모습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죠.
오늘 본문의 이 상황은 2년 전에 음모를 꾸민 모습, 사도행전 23장과 24장에서 벌였던 것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의 요새에 투옥되었을 때 40여 명의 암살단원이 대제사장 무리들과 공모했죠.
바울을 산헤드린 법정에 끌고 나올 때 길에서 매복해 있다가 죽이기로 말이죠.
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천부장 루시아가 자기 책임을 면하고자 그날 밤에 470명의 무장군인을 동원해 바울을 가이사랴의 벨릭스 총독에게 보낸 것이었죠.
그러자 5일 만에 대제사장 무리들과 유대 장로들이 변호사 더둘로까지 고용해 바울을 고소하고 죽이려 들었죠.
바로 그 모습이 지금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2년 전의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의 모습이 2년 후에 하나도 달라지거나 변화된 게 없다는 점입니다.
(적용)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 2년 동안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나가 하나님 앞에 매주일 번제를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때마다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을 것이고, 그 제물의 목을 치고 가죽을 벗기며 피튀키는 모습을 봤겠죠.
더욱이 각을 뜨고 내장을 끄집어 낼 때 그 역겨운 냄새나는 것들을 맡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는 그 제물의 당사자와 그 제사를 집례하는 대제사장 무리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유대 장로들은 어떻겠습니까?
실은 자신들도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 정말로 자기 자신도 변화돼야 하는 것 아닙니까?
바로 그것이 제사의 본질 아닙니까?
그런데 그 2년 동안 주일날만 해도 100번의 제사를 드린 대제사장 무리들과 장로들은 그 2년 동안 하나도 변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본문 속에 등장하는 대제사장 무리들과 유대 장로들은 형식적인 제사, 습관적인 제사를 드리는 자들일 뿐이었던 것이죠.
예배의 생활화, 생활 속의 예배자가 되길 바라는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자들이었던 것이죠.
그런 그들의 예배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예배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자기 자신을 의탁하는 것인데 말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자가 되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지난 2년간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너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예배를 드렸느냐?”
“너는 구약의 번제를 드리는 모습처럼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흠없는 번제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미리 준비하며 드렸느냐?”
“너는 구약의 번제를 드리는 당사자가 번제물의 목을 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끄집어 내며 피를 튀기고 냄새를 뒤집어쓸 때 그런 심정으로 드렸느냐?”
“너는 예배를 드릴 때 목사의 설교와 누군가의 기도를 감상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너를 부인하고 하나님께 의탁하는 시간으로 삼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너의 자아를 굴복시키고 너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고자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예배자였느냐?”
“그런 그런 예배를 통해서 너를 죽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여 한 주간 한 주간 삶 속에 예배자로 살아왔느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의 무리들과 유대 장로들이 지난 2년간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섰는데도 그들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지 았는데 너는 어떻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매 주일 주님 앞에 너를 부인하고 너를 죽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린다면 너의 삶도 2년 전의 모습과 조금은 달라져야 하지 않겠느냐?”
“1년 52주 주일예배를 드리고 2년간 100주 넘게 예배를 드릴 때, 너의 삶도 그만큼 예배의 생활화로 변화돼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본문 속에 등장하는 대제사장의 무리들과 유대 장로들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은 습관적인 예배자 형식적인 예배자에 불과하지 않겠느냐?”
“오직 너는 그들과 달리 예배의 생활화, 생활 속 예배자로 너의 삶이 주님의 말씀 속에서 차츰차츰 진리와 생명의 삶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구나.”
(찬양)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금보다 귀한 나의 주님 내게 만족 주신 주
당신만이 나의 기쁨 또한 나의 참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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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미국 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을 양을 훔쳤는데, 그들의 이마에 양 도둑의 약자인 S.T.(Sheep thief)라는 낙인을 새겼습니다.
일생 동안 다른 데 가서도 양 도둑질을 못하도록 하는 청교도적인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둘 중 한 사람은 회개하지 않고 먼 곳으로 도망 다니면서 또 다시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서 도와주고 대신 아파해 주고 대신 매를 맞았습니다.
죽음의 자리가 있으면 대신 처해 주고, 슬픈 사람 옆에는 사흘이라도 같이 있어 줬죠.
그래서 그 동네와 이웃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없으면 살 맛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서서이 그 동네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그 동네의 목사님보다 더 존경을 받았고, 그 동네의 친아버지처럼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양도둑질하던 그에게 낙인을 찍었던 사람들이 다 죽고 그들의 2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만은 장수했습니다.
2세들이 자라 그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초등학교나 중학교 입학식 때면 훈사를 하는 유명한 분이 되었습니다.
그 사이 이마에 낙인을 찍는 풍속도 없어졌죠.
학생들은 그렇게 훈사를 하는 그 할아버지 이마에 왜 S.T.가 붙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대답해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양 도둑의 약자와 성자(Saint)라는 말의 약자는 같다는 것이었죠.
사람들은 그가 너무나도 거룩해서 성자라는 낙인을 찍었다고 대답해 준 것이었습니다.
양도둑이 거룩한 성자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이 양도둑을 거룩한 성자로 변화시킨 것이었습니까?
양을 도둑질하고 이마에 양도둑이라는 낙인을 찍은 채 그는 매주일 예배당에 나가 참회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서 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가서 도와주는 일을 그가 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아파하면 대신 아파하고 누군가 매를 맞을 일을 저질렀으면 그가 대신 맞았던 것이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예배를 통해 자기 자아가 죽고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면서 살았기 때문이죠.
그 예배가 자신의 삶에 생활화되도록 자신을 쳐 주님께 복종시켰기에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급기야 예배가 생활화되고 생활속의 예배자가 된 그를 사람들은 ‘성자’ 곧 Saint라고 여겼던 것이죠.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저도 양도둑이 성자가 된 것처럼 그런 예배자가 되게 해 주세요.”
“이전에는 양을 훔치면서 살았지만 예배를 통해 자기 죄를 깨닫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줬던 그 사람처럼 살게 해주세요.”
“예배란 내 자아를 죽이는 시간이요 하나님께 전적으로 나를 내어드리는 시간임을 믿습니다.”
“예배를 통해 주시는 말씀대로 내 삶에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그리하여 양도둑이 거룩한 성자가 된 것처럼 나도 삶 속에 성자가 될 수 있도록, 그런 예배자가 될 수 있도록 역사해주세요.”
“본문 속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유대 장로들이 얼마나 형식적인 예배자였는지, 오히려 그들이 양도둑이었음을 알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저는 본문 속의 바울처럼 한 해 한 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자요 생활의 예배자로 변화되게 해 주세요.”
(찬양)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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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들과 유대 장로들이 얼마나 많은 제사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렸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일상은 2년 전이나 2년 후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그들의 눈엣가시와 같은 바울을 고소하고 죽이는데 혈안이 돼 있던 그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그들의 제사,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셨겠습니까?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2년 전보다 더 변화된 바울처럼, 더욱더 하나님께 자기 삶을 의탁한 바울처럼, 그런 예배자를 찾고 계신 줄 믿습니다.
양도둑이었던 동네 사람이 예배를 통해 그릇된 삶을 청산하고 동네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삶을 사는 그런 예배자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2년 전이나 2년 후나 전혀 변화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대제사장들과 유다 장로들과는 달리 2년 전보다 2년 후에 더욱더 주님께 자기 삶을 의탁한 바울처럼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변화되는 은혜가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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