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요설교WednesdaySermon/사도행전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행26:1-2)_20221019

by 똑똑이채널 2022. 10. 19.
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예화)교역자수양회로 경남 창원시 진해 웅천의 ‘항일운동가주기철목사기념관’에 다녀왔죠.

주기철 목사는 1897년 11월 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4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그의 이름은 주기복이었습니다.

 

유년시절 그의 집안은 유복한 편이어서 웅천개통학교라는 학교를 집안에서 세울만큼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아버지 주현성 장로도 신교육에 눈을 떴던 때라 유교사상이 만연한 가운데서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설득력 있게 말하는 그는 삼촌들과 형들에게까지 자기 의견을 분명하게 전달했죠. 

 

그는 웅천면 개통학교를 졸업했고 그 후 이광수 선생이 웅천에 와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를 홍보했는데, 그를 계기로 오산학교에 입학을 했죠. 

그곳에서 고당 조만식 선생과 남강 이승훈 선생으로부터 신앙교육과 민족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는데 안질환으로 중퇴를 했습니다.

그 후 고향 웅천에 돌아와 청년운동과 교남학회를 지도하며 후배들을 가르쳤죠.

그러다 깡패 김익두가 변화돼 목사가 돼 마산 문창교회에서 집회를 할 때 주기철도 성령을 받았죠.

2개월 뒤 웅천교회에서 또다시 김익두 목사가 집횔 때 그때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목사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죠.

 

목사안수를 받은 그는 부산의 초량교회에서 6년 시무했습니다.

그 뒤 마산 문창교회가 분열을 거듭할 때 문창교회에 초빙을 받아 섬겼죠.

그런데 그 무렵 주기철 목사의 부인도 피부암으로 죽고 아버지도 죽고 노모가 걱정된 상황이었죠.

이후 주기철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죠.

그때가 일제강점기 시절이자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동참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가 속한 평북노회는 신사참배에 가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교회의 목사직에서 물러났죠.

일본 경찰은 주기철 목사에게 회유와 협박 그리고 감옥에 가두고 고문했습니다.

그러기를 네 번의 옥고를 치렀죠. 

 

마지막 풀려났을 때 그 분은 마태복음 5장 11~12절과 로마서 8장 31~39절을 통해 ‘다섯 가지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죠.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소서.

둘째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소서.

세째 노모와 처자를 부탁드립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한다는 내용의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1944년 4월 21일 밤 9시 30분경 49세의 일기로 일본의 옥중에서 순교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은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사참배와 같은 우상 앞에 절하지 않는 불굴의 모습을 말이죠.

바로 그 분의 뜻을 기리고자 경남 창원 진해 웅천에 ‘항일운동가주기철 목사기념관’이 서 있습니다.

 

(깨달음)그런데 주기철 목사님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게 된 가장 근본 요인이 무엇이었을까요?

민족주의 운동이 그에게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이 그의 심령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미신을 숭배하기보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제1신앙으로 섬기고자 했던 것이죠. 

 

우리는 박근혜 정권에서 상상할 수 없는 국정농단의 비리가 드러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중심축이 바로 미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런데 미신이란 실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미신과 욕망은 동의어입니다.

미신은 무당의 푸닥거리나 점쟁이의 부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죠.

욕망에 사로잡혀 바른길에서 벗어난 행위는 모두 미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과 미신은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욱더 미몽에 빠지기 마련이죠.

욕망과 미신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윤석열 정권이 미신을 추앙하는 정권이라면서 비난하기도 하죠.

김건희 씨가 무당의 굿판에 놀아나고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실체가 지금은 베일에 가려 있지만 언젠가 다 드러날 때가 온다고 이야기를 하죠.

 

(적용)일제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끝내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의 뜻을 왜 우리가 받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주기철 목사님을 우상화하거나 미신화하는 게 아니죠.

오직 그 분은 일제신사참배는 미신화의 길이요 하나님의 말씀만 살아계신 말씀임을 믿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 분의 산 증인으로 보여준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product.kyobobook.co.kr

(역배)신임총독 베스도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무리들이 바울을 심문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은 로마법에 대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성전에 대해서 결코 법을 어긴 적이 없다고 변론했죠.

신임총독 베스도는 바울이 로마법을 어긴 게 아니고, 유대인들의 율법에 관해 다투는 정도임을 알게 되었죠.

그렇다고 당장 바울을 석방해줬다가는 예루살렘에서 온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미운털이 박힐 것이 뻔했죠.

그래서 그는 정치적인 제스쳐를 쓰기 위해 바울에게 말하기를 “너를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법정에서 판결하면 어떻겠냐”고 했죠.

그러자 바울은 2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니오, 로마 황제 가이사의 법정에 상소합니다”하고 말했죠.

 

그때 신임 총독 베스도는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여 황제의 법정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할 입장이었죠. 

그 무렵 분봉왕 헤롯 아그립바2세가 왕비 버니게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신임총독 베스도와 상견례를 하고자 찾아왔죠.

베스도 총독은 유대인의 종교법에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의 조언을 구하고자 바울의 재판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했죠.

그러자 총독 베스도의 설명을 들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진술을 직접 들어 보길 원했고 이튿날 즉각 청문회를 열였죠.

 

그 청문회 장에 나타난 아그립바 2세와 왕비의 옷, 그의 대신들의 관복 그리고 베스도 총독과 그 천부장과 가이사랴 시의원들의 옷이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면서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옷을 입고 나타나죠.

그에 비해 헤롯궁의 지하 감옥에 감금돼 있던 바울의 모습은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 그 자체였죠.

어찌 보면 일제치하 악명높은 감옥의 간수장과 일제의 관리들의 모습과 옥중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는 주기철 목사의 모습과 견줄 수 있는 것이었죠.

 

(본문)바로 그런 상황에서 오늘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하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고발하는 모든 일에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

 

아그립바 왕은 신임총독 베스도가 마련한 그 자리에서 바울에게 위세를 떨치면서 말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아. 내가 너에게 말할 권리를 허락하노라”하고 말이죠.

 

그때 바울이 어떻게 합니까?

그 자리에 참석한 이들이 저마다 형형색색의 최고급 왕복과 관복과 의복을 입고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 있는데, 바울은 초라한 모습의 몰골이죠.

그렇다고 바울이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바울은 “손을 들어 변명하되” 할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죠.

그러면서 말하기를 “유대인들이 고발하는 모든 일에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깁니다.”하고 말하죠.

 

(원해)여기에 ‘다행이 여기다’는 헬라어 원어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입니다.

우리가 팔복에 대해 살펴보면서 알게 된 ‘복되도다’하는 단어가 바로 ‘마카리오스’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복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왜일까요?

사도행전 9장 15절을 보면 주님께서 바울을 택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해줍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깨달음)다메섹에 사는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을 받았죠.

지금 다메섹의 직가에 사울이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말이죠.

그러자 아나니아는 그가 유대이들을 체포해 감옥에 처 넣는 앞잡이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제가 갑니까, 하고 말했죠.

바로 그때 주님께서 친히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기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다, 하고 말이죠.

 

그 말씀 그대로 바울은 지금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모두 마치기까지 지난 20년 넘는 세월 동안 곳곳을 누비며 복음을 전했죠.

그 중에는 이스라엘 자손들 곧 유대인들도 있었고, 수많은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태껏 임금들 곧 왕에게 복음을 전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드디어 그 임금 곧 아그립바 왕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런 일이었겠습니까?

그렇다고 바울이 임금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죠.

오히려 그 임금이 바울을 찾아온 격이요 바울이 그 자리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게 되었으니 그걸 ‘복되도다’하고 감사한 것이죠.

 

(적용)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 1절 끝 부분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라고 돼 있는데, 누구를 향해 손을 든 것이겠습니까?

바울이 손을 든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손을 든 것이요, 그 자리에서 저를 ‘복되게 하심’ 감사드립니다, 하는 뜻으로 손을 든 것이죠.

 

여기에 ‘손을 들다’는 헬라어 ‘엑테이노’(ἐκτείνω)는 ‘쭉 내밀다’(stretch forth)는 뜻입니다.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손을 내밀었겠습니까?

자신의 변명거리를 잘 들어봐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말씀을 지금 왕 앞에서 드디어 전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손을 들어 감사를 하는 것이죠.

우리도 기도할 때 감격스러우면 손을 들어서 찬양하면서 기도하는데, 그 모습과 같은 격이죠.

 

그만큼 바울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그대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하신 말씀 그대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손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무엇보다도 복된 바울의 인생 아닙니까?

 

(깨달음)왜요?

바울은 무당처럼 미신을 숭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당 최태민에게 놀아난 박근혜 정권의 하수인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당과 그 하수인들은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 푸닥거리를 하고 점쟁이의 부적만을 좇지 않습니까?

 

하지만 바울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왔고, 바로 그 생명의 말씀을 지금 아그립바 왕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것이 몰골은 비참하지만 가장 행복한 바울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좇는 자기 욕망의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은혜를 부어주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기철 목사가 일제의 신사참배에 절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는 알지 않겠느냐?”

“일제의 신사는 무당과 같은 욕망의 신화일 뿐이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옥중에서 순교한 것 아니더냐?”

“바울이 지금 아그립바 왕 앞에서 손을 들면서 복되도다 하고 감사했던 것도 그런 모습이지 않더냐?”

“그 당시에 모두가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던 그때 오직 바울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참되게 받들지 않았더냐?”

“지금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그 부인이 무당 앞에 놀아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 못가 다 드러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눅12:2)는 것을 늘 잊지 말고 살도록 해야 한다.”

“이 땅에 무당과 무속인들은 유한하기 짝이 없는 욕망에 놀아나는 자들이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영원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이 지금 복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손을 든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이지 않겠느냐?”

“유한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통해 왕앞에서 영생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너도 이 땅에 욕망을 좇는 무당이나 무속인과 같은 기복주의 신앙보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주기철 목사님이 일제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까지 순교하게 된 것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함이지 않더냐?”

“그와 같은 인생을 하나님께서 어찌 영원토록 귀하게 여기지 않겠느냐?”

 

(찬양)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 것 전혀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6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product.kyobobook.co.kr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무당과 무속인들은 모두 자기 욕망을 좇는 자들입니다.

그 어떤 신사도 마찬가지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며 그 분의 말씀만이 살아있는 말씀이요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복되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손을 들어 올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자신을 택해주신 것을 감사드리는 것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100세 안팎의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무당이나 무속에 놀아나는 삶이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영원히 받들며 사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