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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잠언 그 두 번째 책, 그 중에서도 오늘 읽은 11장 말씀은 어제 읽은 10장에 이어 ‘지혜로운 삶의 표증’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지혜로운 삶의 표증, 다시 말해 ‘삶의 증표’ 곧 지혜로운 삶의 증표는 15장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11장 1-15절까지는 그 지혜로운 삶의 증표 가운데, 정직과 신중함과 무죄함에 대한 내용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무엇보다도 정직하게 사는 자요, 사리분별에 신중함을 기하는 자, 그리고 죄와 결탁하지 않는 무죄함의 삶을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도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3절에서도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6절에서도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그렇게 정직하게 살 것을 촉구하고 있고, 정직하게 사는 자가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자임을 밝혀준 것이죠.
그런가 하면 지혜로운 자는 ‘신중한 자’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2절에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또 13절에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그런가 하면 15절에서도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이게 다 ‘신중’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신중하다는 것이 겸손하다는 말과 어울리고, 남의 비밀을 함부로 누설치 않는 자이고, 함부로 보증서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죠. 특별히 보증에 관한 말씀은 이미 잠언 6장 1-2절에도 나와 있던 말씀이었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왜 보증을 서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보증이라는 단어는 같은 인간 끼리를 사용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단어이기 때문이죠. 그만큼 인간은 변덕이 심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그 누구도 타인의 미래를 자가당착으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 보증을 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보증을 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는 꼴이라고 했죠. 그렇기에 보증을 서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있는 돈의 여유에서 얼마를 무상으로 빌려주거나 그저 베풀어주는 게 낫다고 했죠. 그것이 지혜로운 삶이죠. 그만큼 사람에 대한 신중한 자세를 갖출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누가 과연 지혜로운 삶의 증표를 갖추는 자인가? 무죄한 자임을 천명합니다. 다시 말해 악한 자가 아닌 자입니다. 그것을 본문 5-10절을 통해 권고합니다.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정직한 자의 공의는 자기를 건지려니와 사악한 자는 자기의 악에 잡히리라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 악인은 입으로 그의 이웃을 망하게 하여도 의인은 그의 지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느니라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의인은 환란에서 구원을 받지만, 악한 자는 자기 악에 잡힌다고, 그리고 악한 자는 자기도 망치지만 이웃까지도 패망케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 가지 사실은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과 악인의 기준이 분명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아담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다 죄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영접하며 주님의 통치를 받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자, 주님께서 이끄시는 방향을 부족하지만 좇아 사는 자는 ‘의롭다고 인정해주는 의인’이 되는 것이고, 그러나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자, 자기 의로움과 자기 방식으로만 가득 차 있는 자는 악인인 셈이죠. 그는 자기 교만, 자기 아집,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본문 후반부인 16-31절까지는 ‘지혜의 투자’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내가 투자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만큼 내게 그것이 되돌아온다는 뜻이죠. 16절에서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덕이 있는 여자는 그만큼 존경을 받게 되고, 부지런한 남자는 그만큼 재물을 얻으며 산다는 뜻입니다. 내가 덕을 베푼 만큼 존경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내가 부지런한 만큼 그 재물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 인생을 투자하며 살아야 할지, 확연하게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17-19절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 악인이 뿌리는 삯은 허무한 것으로 돌아오지만, 공의를 뿌린 자는 확실한 상급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투자하며 살아야 할지 확연하게 구분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또 구제와 관련된 잠언, 내가 얼마만큼 베풂의 투자를 하면서 살아야 할지를 일깨워주는 내용도 있습니다. 24-2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흩어 구제하는 자,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 곡식을 내 놓으며 사는 자, 그렇게 자기 것을 움켜쥐면 썩고 부패하기 마련이지만, 자기 능력의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구제하고 베푸는 자는 오히려 윤택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고, 반대로 수전노처럼 과도하게 아끼고, 곡식을 움켜쥐면서 자기 밖에 모르는 자는 오히려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렸지만, 구약에서 강조하는 것,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구제하고 나누고 베푸는 삶이었습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면, 그 땅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런 이유였죠. 소돔과 고모라 땅이 멸망한 것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며 살아야 하는 삶을 살지 못한 이유가 가장 컸죠. 그런 살아 있는 역사를 체득하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도 자기 지역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 굶지 않고 살도록 동네나 길거리에 빵이라든지 다른 구제품을 내 놓으며 살아가고 있죠. 그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는 특징이 있죠. 물론 신약의 말씀은 거부하지만, 그러나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구세주로 영접하며 살아가는 ‘메시아닉 쥬’(메시아닉 유대인들)들이 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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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요한 게 있습니다. 왜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은 정직하게 살고, 신중하게 살고, 또 무죄함 가운데 사는가? 왜 그렇게 지혜에 대한 부분을 투자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단순히 그렇게 살면 내가 잘 되고, 행복해지고, 부유한 삶을 살기 때문인가?
그것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지극히 현실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와 같은 정직, 신중, 무죄함, 그리고 덕에 투자하고, 구제에 투자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투자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순종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심을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늘 의식하며, 그런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고, 지혜의 삶에 투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이 땅에서도 복된 삶이지만, 하늘나라의 상급이 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언으로 말씀하신 부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하신 말씀과 더불어, 지금도 매 순간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지혜로운 삶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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