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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0)_팔복강해(4)_20220911주일설교

by 권또또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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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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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성경에 ‘온유한 자’로 기록된 사람은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분은 예수님이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모세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당신 자신이 온유한 분임을 밝히셨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예수님께서 온유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조롱하는 이들 앞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칼에는 칼로 맞섰겠죠.

예수님께서 온유하지 않았다면 대제사장의 군사들이 체포할 때도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해 물리쳤겠죠.

예수님께서 온유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순종하지 않았겠죠.

 

예수님께서는 온유하셨기에 모든 조롱과 멸시를 감당했고 십자가 대속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감히 이 세상에 어떤 인간이 예수님의 온유함을 따라 행할 수 있겠습니까?

흉내조차 내기 힘든 모습이죠.

 

그런데 모세는 어떻게 온유한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모세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밝힌 바와 달리, 다른 인간들보다 온유함이 더 낫다, 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타고날 때부터 예수님처럼 온유한 자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는 애굽의 파라오가 죽이라고 명령할때 나일강의 갈대상자 속에 버려졌죠.

하지만 파라오의 공주가 목욕하러 갔다가 모세를 갈대상자에서 건져내 자기 양 아들로 키웠죠.

그때부터 모세는 애굽 궁궐에서 언어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종교 사회 심지어 군사력까지 모두 습득했습니다.

40살이 될 때까지 그는 애굽 궁궐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으니 남부러울 것 없이 모든 걸 누렸죠.

 

그런 환경에서 자란 그의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히브리 동족끼리 싸우는 모습 앞에 모세는 중재하려다가 그만 한 사람을 때려죽이고 말았죠.

어떤 면에서 보면 실수였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자기 주장 자기 고집이 강한 모세였던 것을 알 수 있죠.

그로 인해 더 이상 애굽 궁궐에 살 수 없던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죠.

그곳에서 빈털터리로 이드로의 양을 치며 살았고 십보라와 결혼하여 두 자식을 낳게 되었죠.

40년이 되던 어느 날 가시 떨기나무 불꽃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 부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후였죠.

나이 80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빠져나와 홍해를 건널 때부터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는 곳마다 불평와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도, 마라의 쓴 물을 만날 때도, 신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도, 르비딤 반석에서 마실 물이 없을 때도 말이죠.

 

그런 불평과 원망의 모습은 출애굽해서 50일째 되는 날 시내광야에 당도할 때까지 계속되었죠.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을 때마다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너무나도 답답하고 괴롭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하나님과 언약식을 맺고서 사라졌습니까? 아니죠.

그 후 7개월에 걸쳐 성막을 만든 걸 출애굽한지 2년 1월 1일에 펼쳐, 모세를 성막으로 불러들여 레위기의 율법을 알려주고 제사법도 시연케 했죠.

그리고 광야 행진을 모두 점검한 다음 출애굽한지 2년 2월 20일 날 광야 행진을 시작하죠.

그렇다면 그때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이 모두 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광야 행진을 시작한 그때도 행진대열을 따라오는 이방 잡족의 무리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했죠.

그 뒤에는 모세의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다면서 백성들 앞에 모세를 깎아내렸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말씀하시는 분이냐? 우리와도 얼마든지 말씀하는 분이 아니시냐? 하고 말이죠.

 

(깨달음) 그때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모세는 자신의 지도력을 깎아내리려는 아론과 미라암의 비난 앞에 똑같이 맞섰습니까?

아닙니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습니다.

미리암은 나일강에서부터, 아론은 파라오 앞에 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 배를 탄 혈족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그렇게 자신을 깎아내리는데 솔직히 배신감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그들의 비난과 배신 앞에 그 어떤 말도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어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죠.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모세가 온유하다는 그 말씀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셨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모세의 온유함이 낫다고 말한 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을 인정해주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더 중요한 것은 모세의 온유함이 침묵만으로 드러난 게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한 일로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 제 누나의 문둥병을 고쳐주소서’(민12:13)하고 간구하며 기도했다는 것이죠.

 

그 정도로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온유함은 본래부터 타고난 성품이었습니까?

아니죠.

애굽의 궁궐에서만 살았다면 그는 결코 온유한 성품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디안 광야의 빈털터리로 40년을 지낼 때 하나님께서 온유한 성품으로 다듬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애굽의 궁궐에서 자기 주관 자기 판단 자기 고집으로 똘똘 뭉친 야생마 같은 모세였죠.

하나님께서 빚어주시는 미디안의 40년 광야 삶이 있었기에 80에 부름받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면서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온유한 자가 됐던 것입니다.

 

(적용)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성품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역배)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천국복음 곧 산상수훈의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쳐주셨죠.

산상수훈은 세상에 속한 자들, 어중이떠중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죠.

 

그 첫 번째로 하신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어서 하나님만 철저하게 붙잡고 사는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먹을 것 전부를 드리며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했던 사르밧 과부가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죠.

자신의 두렙돈마저 하나님나라를 위해 기꺼이 드렸던 그 가난한 과부가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신의 새 동굴 무덤까지 내어드린 유대 관원이자 부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죠. 

 

바로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전개)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하신 팔복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여.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자가 서로 다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팔복의 주인공들은 서로 다른 8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이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이면서 애통하는 심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라야 애통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심령이 가난해지면 내 심령에 눈물이 흐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레미야도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기에 민족의 죄악 앞에 민족의 멸망 앞에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며 애통했던 것이죠.

모세도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기에 백성들의 원망 앞에, 미리암의 문둥병 앞에,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애통해했던 것이죠.

다윗도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기에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의 지적 앞에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이죠.

 

그렇게 애통해 하며 통곡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말씀으로 위로하며 유대 민족에게 소망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모세가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 누나의 문둥병 앞에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 미리암의 문둥병을 고쳐주셨죠.

다윗이 자기 죄악 앞에 침상을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빚어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악 앞에 회개하며 눈물을 흘릴 때, 내 주변의 사람이 고통당하는 모습 앞에 함께 아파하고 애통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곁에 다가와 위로와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예수님께서 세 번째 팔복으로 선언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5절에 나와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원해)여기에 ‘온유’로 나온 헬라어로 ‘프라우스’(πραΰς)는 ‘온화한 성품’(mildness of disposition)을 뜻하는 말입니다.

또 ‘영적인 부드러움’(gentleness of spirit)으로 해석하는 말이기도 하죠.

 

물론 ‘온유’란 타고난 자연적인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하는 말씀은 구약의 시편일 인용한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

 

거기에 나오는 ‘온유한 자’ 곧 ‘온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나빔’(‎עֲנָוִ֥ים)입니다.

‘가난한 사람’(poor) ‘고통받는 사람’(afflicted) ‘겸손한 사람’(humble) ‘온화한 사람’(meek)을 뜻하는 말이죠.

그런데 ‘아나빔’의 첫 글자 ‘아인’(עָ)이란 단어는 ‘절하는 행위’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온유한 자란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 받는 사람,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는 사람을 칭하는 말입니다.

 

(깨달음)오늘 내가 하나님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에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통제되고 컨트롤 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사람입니다.

 

통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통제되지 않는 물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갑니다.

태풍 힌남노 물난리로 포항 아파트 지하 침수돼 7명이 죽은 것도 통제되지 않는 물 때문이었죠.

그러나 집 안에서 통제되고 관리할 수 있는 물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집안을 풍성하게 해 줍니다.

물도 자유자재로 마실 수 있고 집안의 화초도 산뜻하게 가꿀 수 있기 때문에 말이죠.

 

자식이 부모님의 말씀에 통제되고 다듬어진다면 그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인 부모의 말씀에 그 자식이 다듬어질 때 온유한 성품으로 빚어질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대리자 격인 목회자의 당부에 성도가 다듬어진다면 그 또한 온유한 심령의 소유자이겠죠.

아무리 남자친구 여자친구가 좋다고 결혼전 성관계를 갖는 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이다, 하는 부모님의 말씀도 명심해야 하죠.

부모님은 자식을 이롭게 하는 길을 알고 이끌어주고 다듬어주길 원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물론 올바른 말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합당한 말일지라도 상대방의 심성을 헤아리지 않고 몰아붙이는 말은 분노만 일으키게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15:1)

 

(적용)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광야 40년동안 그를 빈털터리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빚어주셨죠.

빚으심의 그 과정을 통해 나이 80이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 이끌고 40년 광야를 헤쳐나가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과 원망을 할지라도 온유한 심령으로 이끌게 하신 것이었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다듬어주셨기에 미리암이 분노를 자아낼 때도 대꾸하지 않고 침묵했던 것이고, 그가 병들었을 때 고쳐달라고 간구했던 것이죠.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선 증인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는 멧돼지처럼 날뛰며 살았죠.

그런 바울을 주님께서 만나주셔서 그의 야생마 기질을 꺾고 주님께 복종하는 온유한 자로 빚어주셨죠.

그래서 선교지에서 자신을 비방하고 돌로 죽이려 할 때도 분노를 내려놓고 스데반의 얼굴을 떠올리며 온유한 자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죠.

 

온유한 자, 그것은 타고난 자연적인 성품 그 인간적인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다듬어지고 훈련되고 통제되는 성품,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는 성품입니다.

 

우리도 모세처럼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지고 통제되는 온유한 성품이 되길 주님은 원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께서 다듬으실 때 온전히 복종하는 온유한 성품이 되길 주님은 원하신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의해 다듬어지고 통제되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통제되고 컨트롤되고 다듬어지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이더냐?”

“모세가 애굽 궁궐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도, 애통해하는 소유자도, 온유한 자도 되지 못하지 않았겠느냐?”

“모세가 40년 미디안 광야 시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빚으시고 관리하시고 통제하셨기에 그가 온유한 심령의 소유자가 된 것 아니더냐?”

“통제되지 않는 물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지만 통제되고 관리되는 물은 사람의 목숨을 이롭게 하고 풍성케 하지 않더냐?”

“과격한 말은 분노를 격동시키지만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잠잠하게 만들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이롭게 하지 않더냐?”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의 말씀에 자식이 통제된다면 그것이 자식이 행복이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영적 대리자격인 목회자가 성도를 생명의 길로 인도할 때 그 말에 순종하는 것이 그 영혼이 범사에 잘 되는 길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께서 모세를 가난한 심령, 애통해하는 심령, 온유한 심령으로 빚으셨듯이 너를 빚으실 때 기꺼이 복종하길 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멧돼지처럼 길길이 날뛰던 바울을 가난한 심령, 애통해하는 심령, 온유한 심령으로 빚으실 때 기꺼이 순종하길 원하지 않았더냐?”

“그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금의 너를 가난한 심령, 애통해하는 심령, 온유한 심령으로 빚고자 하실 때 기꺼이 복종하길 원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는 길이지 않겠느냐?”

 

(찬양)주 여기 운행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여기 역사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주 우리 마음 만지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치유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새롭게 하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회복시키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주의 일하심 볼 수 없어도 주의 일하심 알 수 없어도 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원성)하나님께서 다듬어주시고 컨트롤하신 온유한 성품의 바울이 고린도전서13장 4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죠.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도 온유함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때의 온유란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모습을 내 곁의 사람들에게 친절과 선으로 베푸는 걸 말합니다.

사랑은 친절과 선을 베푸는 것, 그것이 온유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우리는 부모님에게나 자식에게 말할 때 유순한 말로 친절을 다해서 말해야 하는 것이죠.

목회자는 성도에게 성도는 목회자에게 역시 그렇게 말해야 하는 것이죠.

아무리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일지라도 유순한 말로 친절과 선을 베풀 듯이 말이죠.

(본문2)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받는 기업이 무엇이라고 본문에서 말씀하십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땅’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말씀하셨듯이 미래의 약속한 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비춰본다면 머잖아 이 땅에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2-13)

 

(깨달음)그것은 모세를 생각해봐도 똑같죠.

하나님께 온유하다고 인정받은 모세가 누나가 죽고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아우성칠때 어떻게 했나요?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헤쳐나온 그 끝자락에 달한 시점이었습니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 진저리가 난 광야의 땅과 달리 그들에게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곳이 눈앞에 보이는 거죠.

 

그때 누나 미리암은 죽어서 슬픈데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을 쏟아내고 있었죠.

하나님께서는 그때 모세를 향해 ‘모세아 반석을 향해 물이 나오도록 명령해라’(민20:8)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광야를 출발할 땐 지팡이로 반석을 치도록 했는데, 이번엔 말씀으로 대언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죠.

 

그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통제되고 컨트롤되는 모습과 달리 반석을 향해 지팡이로 두 번 치죠.

왜 그랬을까요?

민수기에서는 그 내용을 설명해주지 않지만 유대전승인 미드라쉬엔 자세하게 설명돼 있습니다.

그때 누나 미리암이 죽어서 너무나도 슬픈데, 그 와중에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니, 모세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이었죠.

그래서 모세는 화를 내면서 지팡이로 반석을 한 번 쳤는데 물이 졸졸졸 나오자, 이번엔 자기 과시 차원에서 반석을 한 번 더 친 것이었죠.

물론 그때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긍휼히 여겨서 백성들에게 마실 물을 공급해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인해 모세에게 가나한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죠.

하나님과 백성들 앞에서 온유함을 상실한 그 모습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그때 자기 분노 자기 과시를 드러낸 일로 인해서 말이죠.

그것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의 반면교사와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광야 40년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요, 백성들 앞에 친절과 선을 드러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그 일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로부터 천년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가실 그때 영으로 가나안 땅을 밝은 모세였죠.

그만큼 모세가 모세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죠.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주님 앞에 사람들 앞에 온유한 자로서 주님께서 충성을 다하게 하시고 사람들에게 친절과 선을 베풀며 살게 해 주세요.”

“하나님께서 나를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온유한 심령으로 빚으실 때 기꺼이 통제되고 다듬어질 수 있게 해 주세요.”

“부모님의 말씀을 통해 내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이라면 기꺼이 통제되게 해 주시고,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제게 생명을 길로 인도하신다면 기꺼이 순종하게 하시옵소서.”

“그토록 하나님 앞에 또 백성들 앞에 온유했던 모세였는데,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온유함보다 자기 분노와 자기 과시로 인해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네요.”

“오늘 저도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저 영원한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까지, 하나님 앞에 온유할 수 있도록 통제해 주시고, 사람들 앞에 친절과 선을 베풀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주 여기 운행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여기 역사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주 우리 마음 만지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치유하시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새롭게 하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주 우리 회복시키네 주 경배해 주 경배해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주의 일하심 볼 수 없어도 주의 일하심 알 수 없어도 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주는 결코 멈추지 않네

새 길을 만드시는 분 큰 기적을 행하시는 분 그는 우리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분 어둠 속을 밝히시는 빛

그는 우리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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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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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새 길을 내시겠습니까?

누구에게 큰 기적을 행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걸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통제되고 다듬어지는 온유한 심령 아니겠습니까?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그 부족함 상태속에서 주님의 뜻과 말씀에 컨트롤되고 통제되고자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의 길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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