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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시142:1-7)

by 권또또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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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사극영화는 개봉이 되면 대부분 보는 편입니다. 그 중에 2011년에 상영된 〈최종병기 활〉이라는 영화도 참 흥미진진했고, 또 스펙타클하게 돌아가는 영화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2014년에 최민식 주연의 〈명량〉이란 영화도 너무나도 멋진 영화였고 최근에 상영한 박해일 주연의〈한산〉일나 영화도 스팩타클했습니다. 조선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선조의 통치시절이고, 그 무렵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이 있었는데, 그 때 펼친 진도 울돌목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13척의 배로 왜적 330여 척을 물리친 대승을 거둔 사건을 보여준 영화였죠.

그 임진왜란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록한 역사책이 바로 서애 류성용이 쓴 〈징비록〉이 있죠. 그것을 언젠가 텔레비전의 드라마로 만들었고, 개그콘서트에서도 풍자극으로 극화해서 내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있던 그 시절에 이순신 장군이 기록했다는 〈난중일기〉에 보면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지휘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같이 쏘아대지만 여러 배들은 바라만 보고서 진군하지 않아 일을 장차 헤아릴 수 없었다.”

명량해전의 바다는 이순신 장군에게는 싸움터였지만, 인간 이순신에게는 ‘홀로’ 있어야 하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수많은 적선들이 둘러싸 달려들고 있고, 그로 인해 겁먹은 조선의 배들은 홀로 살고자 뒤로뒤로 물러서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명량의 그 바다는 장군 이순신에게는 용맹함을 더 해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인간 이순신에게는 또 다른 외로움과 고독이 밀려드는 바다였던 것이죠. 그것을 일컬어 한자로 ‘고주(孤舟),’ 외로이 떠 있는 배라고 부르죠. 방금 불렀던 찬송가 345장의 노랫말과 똑같습니다. 명량의 그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은 외로이 떠 있는 배 한 조각 자체 곧 고주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의 표제는 ‘다윗의 시’입니다. 그런데 그 표제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라고 말입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해 다윗이 굴에 있을 때 겪었던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을 떠올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인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에게까지 어떠한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상황은 사무엘상 22장에 상세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이른바 다윗이 10대 후반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도피행각을 벌인 초창기의 모습입니다. 최초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놉 땅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숨어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다윗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사울 왕이 지금 나를 홀로 보내서 작전을 수행하도록 했다고 했는데, 이내 굶주림에 처했으니 먹을 것이 없는지 물었죠. 그때 제사장 아히멜렉은 진설병 떡을 다윗에게 나누어 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큰 칼을 주었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맷돌로 무너뜨렸는데, 그때 뽑아든 칼을 제사장 아히멜렉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지금 다윗에게 전해준 것이죠.

그리고 이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블레셋의 가드 지역의 아기스 왕에게 들어갑니다. 그곳 가드는 골리앗의 고향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자기 장수 골리앗을 쓰러트린 장본인인 다윗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곳 사람들은 그런 노래까지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는 노랫말 말입니다. 그 까닭에 블레셋의 가드 지역의 왕 아기스 앞에 섰을 때, 다윗은 그 밑에 들어가 부하 장수로서 숨어서 살려고 했는데, 그 장수들과 뭇 백성들이 다윗을 알아보게 된 것이죠. 그때 다윗은 졸지에 미친 체를 하면서, 짐을 질질 흘렸죠. 그래야만 자기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아니나 다를까, 아기스 왕은 그때 다윗을 향해, 그리고 자기 휘하의 장수들을 향해 그렇게 화를 냈습니다. 내게 미치광이라 부족하여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 미친 짓을 하도록 내 버려두고 있느냐, 당장 내 집에서 쫓아내라.”(삼상21:15)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미친 짓을 하면서까지 목숨을 건진 다윗이 그 뒤에 어디로 향하는가? 또 다른 도피행각을 찾아 떠나는데, 그곳이 바로 아둘람 동굴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다윗을 숨겨 줬던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과 또 다른 제사장 85명을 죽인 사건에 대해서는 엊그제 살펴봤는데, 그렇게 사울의 칼날에 억울함과 고통과 환란을 당한 자들이 이제 다윗 곁에 몰려들었는데, 그 수가 400명 가량이었다고 사무엘상 22장 1-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다윗과 뜻을 같이한 사람이기도 하고, 사울의 전횡과 횡포에 못 견뎌 다윗에게 붙은 사람이기도 한데, 그들을 가리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 아둘람 동굴 다시 말해 ‘아둘람’(עֲדֻלָּם)이란 히브리어의 뜻은 ‘은신처’, ‘피난처’입니다. 그 지역은 유다 지파, 곧 다윗이 속한 지파의 영토인데, 베들레헴에서 남서쪽으로 약 20km에 위치한 평지 성읍의 동굴입니다. 성서고고학자들은 그 지역에서 약 400명 가량이 살기에 적합한 동굴을 발견했다고 밝혀주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아무리 요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으면 그 인생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여부스 성읍이라 할지라도, 그 어떤 이스라엘의 왕들도 그 성읍을 정복치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 성읍을 정복하도록 열어주셨을 때, 6년에 걸쳐 그 성읍을 정복하게 해 주신 것과 같습니다.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는 것, 인생도, 사업도 직장도, 자녀들도, 우리 각자의 미래도 하나님께서 그 키를 쥐고 계시다는 것, 그것이 곧 아둘람의 사건을 통해 깨닫는 바입니다. 아무리 공고한 성읍이라도 하나님께서 열면 순식간에 무너지지만, 아무리 연약한 평지의 요새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굳게 지켜주시면 그 누구도 침범치 못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2절에서 다윗은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가 원통함을 당했다’, 또 3절에서는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 영혼이 ‘상했다’, 그리고 4절에서도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오른쪽 왼쪽을 살펴봐도 아는 이가 없이 ‘외로웠다’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동굴 안에 400명 가량의 남자 장정이 함께 할지라도, 다윗은 고주, 곧 ‘외로이 떠 있는 배’였다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가라앉고 있는 외로운 배 한 척과 같다는 뜻이죠.

이것이 실은 우리 인생의 배와 같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이 많은 것 같고, 나를 알아주는 이들이 많은 것 같아도, 정작 나의 고독과 외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은 실로 나 혼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군중 속의 고독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그래서 제가 최근에 느끼는 것은 그것입니다. 주일날 15-20명이 모여도, 50-100명이 모여도, 제 영성을 고취시키고 제가 목회자라는 사실을 각인하고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비결은 새벽기도회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와 함께 기도하는 분들로 인해 더욱더 주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이죠. 군중 속의 고독을 느끼지만, 그래도 새벽기도회가 있어서 말씀을 한 장씩 더 들여다보고 연구할 수 있고, 그래서 더더욱 새벽에 기도하면서, 나의 모난 부분, 또 정화시켜가야 할 부분을 다듬어 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목회자는 주일날 영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의 새벽에 그 영성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벽에 나오는 여러분들은 제게 가장 소중한 분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계시기에 제 영혼의 배는 ‘고주’가 아니라 ‘다주’ 여럿이서 함께 하는 배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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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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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인생 배를 ‘테바’로 삼으십니다. 노아의 방주도 ‘테바’요 모세의 갈대상자도 ‘테바’요 법궤 역시 ‘테바’라고 했듯이, 우리 스스로에게는 키도 노도 닻도 돛도 없이 오직 주님의 말씀을 테바로 삼고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 삶이 복된 인생이요 그 삶이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께서 붙들어주시는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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