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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내 마음을 아시며(시139:1-24)

by 권또또 2022.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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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시편 139편은 어제에 이어 ‘다윗의 시’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명확하게 밝혀주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특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모든 행위를 다 알고 계시되, 내 속 마음도, 내 혀로 내뱉는 말도, 알지 못하는 게 하나도 없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앉고 일어서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내 모든 행위까지도 잘 알고 계셔서, 내가 도무지 하나님을 떠나 피할 곳 조차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어떤 것 하나라도 숨길 수 없음을,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처럼 알고 계신다고 하면, 나는 과연 어떻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은 죄가 없고, 주의 뜻을 잘 따르는 사람은, 주가 나를 아는 것이 즐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악된 행위로 살아가는 사람, 다시 말해 몸과 마음에 거짓 위선들이 들어차 있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당당하기보다는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흠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악을 결코 그대로 두지 않고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도 연약하여 죄를 범할 수 있고, 또 넘어지고, 사단의 유혹에 노출되지 않습니까? 그럴지라도 우리와 세상 사람들의 다른 점이 있죠. 우리는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여덟 번 일어나 주님 앞에 나아갈 특권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매번 넘어질지라도, 자기 연약함을 알아 주님께 내 죄를 고하면, 주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씻어주시고, 죄 없다고 지워주시는 분이시죠. 그렇게 긍휼과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하나님 앞에, 어찌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닌데, 다른 사람에게는 아주 좋은 사람으로 인식된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남들에게는 아주 나쁜 사람으로 인식된 사람도 있죠. 사람은 그렇듯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과 남아 알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죠.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내 모든 행동을 아시는 하나님’이시죠. 그 분은 우리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알고 계시고, 나의 어제와 오늘도 알고 계시고, 나의 미래까지도 환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과연 주님께서는 나의 어느 부분까지 알고 계시는가? 2절 말씀에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앉는다’는 것은 ‘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일어선다’는 것은 ‘일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만큼 우리가 언제 쉬는지도, 또 언제 어떻게 일하시는지도 환히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는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기 때문에 그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일 점 일획이라도 숨길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이죠.

그렇게 나 자신에 대해서, 어쩌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어떻게 나를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본문 7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하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을 컴퓨터 파일로 저장한다면, 손톱만한 파일 하나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도 그럴진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 일생을 저장하고 가늠할만한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손수 셈하시는 분이시니 말입니다. 물론 불의한 자에게는 영벌의 심판으로, 의로운 자에게는 영생의 상으로 셈하시는 분이시죠. 신년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 땅에서 받는 상급들은 다 상대적인 상급들이고, 다 한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교회에서 조차 그 상을 주는 이유는 상징성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머잖아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있음을 기억하고, 이 땅에서의 상대적인 상급보다도 보다 더 절대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상을 받는 자들이 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전도를 많이 하는 사람에게 금반지를 주고, 또 하와이 여행이나 제주도 가족 여행권을 주기도 하고, 텔레비전이나 냉장고까지 주는 서울의 어느교회도 있지만, 그것은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작고 소박한 상품이라도, 그것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도록 하는 상징성을 지니면 충분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어찌됐든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벌을, 의의 길을 좇는 자들에게는 영생의 상급이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니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디로 피할 수 있겠느냐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7-12절을 통해 다윗이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나는 주의 성령을 떠나 피할 수가 없다고,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또 스올 곧 음부와 같은 고통의 현장에 내려갈지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어떤 환경에 처한다해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른손으로, 홍해를 가르신 오른손으로, 아말렉 대군을 물리친 손으로, 아숫르 대군 18만5천명을 하루 저녁에 송장으로 만드신 그 오른손으로 나를 붙잡아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곧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다고 고백하는데, 본문 12절에서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인다”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기 때문이다.”하고 고백합니다. 흑암과 빛이 같다는 것은 빛과 어둠이 똑같다는 뜻이 아니죠. 내가 빛가운데 거할지라도, 내가 사망의 음침한 흑암 가운데 거할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게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흑암과 빛, 빛과 어둠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 빛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태양계의 빛을 말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진리의 빛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얼마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이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장 1-3절 말씀인데, 과연 본문 3절에 나오는 빛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자료를 살펴봤을 때,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게 넷째 날임을 감안할 때, 첫째 날에 만드신 빛은 자연계의 발광체 빛이 아니라 ‘진리와 각성의 빛’,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빛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심령을 채우며 사는 자들은 그가 어떤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설령 흑암의 깊은 가운데 처해 있다 해도 그 심령을 진리로 함께 해 주시는 깨달음의 빛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이죠.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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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나 삽비라의 모습, 다시 말해 성령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보다는,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의 모습임을 알 수 있죠. 무과화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의 나라 곧 메시아가 임하길 기대하며 기다리는 그 나다나엘처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나다나엘을 향해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하신 바가 있습니다. 진리와 각성의 빛에 거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고, 그런 신앙의 사람은 본문 마지막 24절의 고백처럼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심을 매일매일 확인하며 살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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