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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시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1-26)

by 권또또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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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를 할 때, 우리는 그 진정성의 정도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감사해서 그런지, 아니면 립서비스 차원에서 하는 말인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이 가르쳐 주는 감사는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감사할 때는 자신에게 유익한 일이 일어났을 때 하게 됩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좋은 것을 해주면, 그때 감사를 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죠.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우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해 주셨기 때문에 하는 감사죠. 내가 병을 고침받고, 사업이 잘 되고, 자식들이 성공할 경우, 그때 하나님께 감사헌금을 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죠. 하나님께서 그만큼 좋은 것을 해 주셨으니 그에 대한 고마움으로 감사를 하고,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서는 곧장 잊어버립니다. 다시 현실에서 어려움이 나타나기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다시금 고통의 물결이 밀려들게 되면, 그 어려움을 헤쳐보고자 하나님을 찾게 되죠. 그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또다시 감사하는데, 그리고는 또 잊어버립니다.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런 감사의 형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유인 즉 그때의 감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에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내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는 그런 분이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 하나님을 아는 것에 진전이 없죠. 그래서 10년, 20년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나님은 내 생활에 보탬이 되는 그런 분이라는 것 외에,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알고, 교제하려는 그런 진전된 신앙의 수준은 거의 볼 수가 없는 것이죠.

 

두 번째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는 정말로 아름다운 신앙의 반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의 본래 의미는 다니엘의 세 친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뜨거운 용광로, 곧 풀무불에 던져질 위기에 놓입니다. 그때 그 세 친구들이 보여준 신앙 모습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모습입니다. 그들 세 친구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풀무불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실 것이라 마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그것이었죠.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8) 설령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지 않을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이 신앙의 모습을 흐트러뜨리지 않겠다는 고백과 다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숭고한 신앙의 형태가 오늘날 변질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몸에 병이 들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감사하는 모습을 보고 병을 고쳐주실 것이다. 집에 우환이 생겼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라.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나쁜 일이 생겼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해라. 그러면 긍정적으로 상황이 바뀔 것이다.” 하는 변종의 감사로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순종이라기보다는 뇌물을 주어 어떤 대가를 얻으려는 거래차원의 감사일 뿐입니다. 사람도 자신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면 그 진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감지하는데,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진정성을 어찌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우리의 감사는 변형된 감사아 아니라, 진정으로 숭고한 감사의 고백이 토대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감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상황이나 조건과는 상관없는 감사입니다. 이 감사가 진정으로 바른 신앙의 반응이자, 진정한 감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이를 악물고 해야만 하는 신앙의 의무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주실까봐, 하는 식으로 자기 위안에 가까운 감사가 있죠. 그러나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는 조건없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는 감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감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앎에 대한 관계’가 전제돼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까지는 ‘하나님의 탁월성’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9절까지는 그 탁월함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어떤 신들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는가? 없다고 고백하죠. 신이라면 피조물을 창조해 내아만 하는데, 그 어떤 존재도 하늘을 창조하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들의 신을 만들어 내더라는 것입니다. 나뭇잎 하나 만들지 못하는 그런 존재에게 절하고 고개 숙이고 숭배하는 것 말입니다.

혹시 ‘손 없는 날’이라고 아십니까? 귀신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삶을 훼방 놓는데 그 귀신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날이 바로 ‘손 없는 날’이라고 하죠. 이사나 개업할 때 이 손 없는 날을 택일합니다. 그래서 손 없는 날에는 이사비용이 2배 이상 비쌉니다. 날짜만 피해버리면 꼼짝도 못하는 그런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 귀신이 자신을 해칠까봐, 그 귀신이 싫어하는 일은 안하려고 하고, 푸닥거리를 해서 달래려고 하는 게 인간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신을 만들어 내는 인간에게 도대체 그런 신들이 해와 달과 별과 빛을 만들기는 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천지만물을 만드실 때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피조물도 감히 1%도 그 힘을 보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이 우주를 만드시고 주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얼굴을 감추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얼굴을 비춰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셨음을 오늘 본문이 계속 이야기합니다. 10절부터 보면 애굽의 장자를 치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셔서, 가나안 땅에 정착케 하신 걸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악 된 인간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내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 가운데 구원해 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음을 노래합니다. 감사의 조건이 전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역사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가나안 땅까지 이끌어가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리고 나에게 행하신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대한 바른 해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신앙생활을 해 갈수록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알아갈 때 진정한 기쁨과 참된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해답은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어떤 한 구절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번이나 반복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구원해 내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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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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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저 영원한 약속의 땅까지 우리를 인도해 가실 때 하나님이 얼마나 참아주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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